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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낳고 낳았는데 희망은? (마 1:6b-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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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고 낳았는데 희망은? (마 1:6b-17)

: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엊그제, 원대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가면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주차 카드를 뽑는 일입니다. 차를 세우고 주차카드를 뽑으면서 제 마음 속에 ‘주차 카드를 장례식장의 빈소에 가서 찍어 올까’하는 생각이 살짝, 아주 살짝 스쳐지나갔습니다. 몇 일전 장례식장에 조문 갔다가 조문객들에게 3시간까지 무료 도장을 찍어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주차카드를 뽑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아내가 피씩 웃으면서 ‘주차카드는 장례식장 빈소에 가서 찍어 오지!’ 라고 말하였습니다. 부창부수, 그 남편에 그 아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아내가 그 일을 말로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아내는 곧 바로 이어서 “오백 원 아끼자고 그런 일은 안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제 입에서도 선문답처럼 “그래서 은혜로 사는 거야!” 라고 하였습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 날 분명히 주차 요금 700원을 주고 나왔습니다. 제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해서, 제 아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정말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런 생각만 하였고, 그런 말만 하였을 뿐입니다. 최소한의 양심과 지켜야 할 양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짚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잠시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했느냐 안 했느냐는 행동으로 구분하자면 분명히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무의식 깊은 곳에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숨어 있었습니다. 지위와 체면 또는 실익을 고려하여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마음의 생각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었으면 화장실에 가야만 하는 인간들의 내면에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인간입니다. 그냥 두면 스스로의 파괴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어떤 가문의 정확한 계보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마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여기에서 세 개의 시대로 구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시대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입니다.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에서 어떻게 다윗이라는 영웅이 출생하였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다윗의 화려한 가문이 아니라 다말과 라합과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기록함으로 그 바탕이 진흙 밭이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런 진흙에서 피어난 한 송이의 백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대는 다윗으로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다윗의 후손들이 어떻게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는지 그 기울어지는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대는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모든 시대를 의도적으로 14대로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14라는 숫자는 히브리어로 다윗이라는 글자가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계보는 철저하게 다윗 중심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4는 거룩한 숫자 7이 두 번 겹친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족보 연구는 단순한 흥미 거리가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기록에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의 역사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 때까지의 역사는 ‘어쩔 수 없는 타락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역사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인간의 역사란 무엇입니까? 왜 이 땅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하는 것입니까? 인간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냥 그대로 버려두면 인간은 어떻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까?

이제 다윗의 후손인 그들이 어떻게 타락하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그 이유를 보겠습니다.
  

그들은 

I. 성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구약 성경 사무엘하 11장은 다윗과 밧세바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주에 나누었기에 다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윗은 그의 영웅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실수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실수를 감싸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재혼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아의 아내이었던 밧세바가 남편이 죽은 후에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잘못되었습니다. 억울하게 우리아를 죽게 만들고 그의 아내를 차지한 다윗의 죄를 성경은 결코 묵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밧세바라는 이름을 대신하여 우리아의 아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하였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II. 지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이번에 생각하려고 하는 인물은 르호보암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솔로몬에게서 르호보암이라는 어리석은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전도서 2장 18절 말씀입니다.
(전 2:18)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솔로몬은 자신이 수고하여 이룩한 일을 후계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문제는 그 후계자가 지혜로운 사람인지 우매한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하여서 이룬 일을 후계자에게 물려주어 모든 수고와 고생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염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북쪽 지파의 대표들이 왕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지워진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백성의 소리였고, 민심이었습니다.

르호보암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 솔로몬을 모셨던 어른들과 상의하였습니다. 원로들은 “왕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면 백성은 영원히 왕의 종이 될 것이다.”고 자문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매우 지혜로웠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습니다.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자문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의 의견은 “더 무거운 징계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왕상 12:1-16)

어리석게도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자문을 버리고 젊은 친구들의 의견에 따랐습니다. 그 결과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던 통일왕국 120년은 막을 내리고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는 발전하겠지만 어리석은 자가 많아지면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가 쌓여 더 나은 역사를 만들어야하는데 오히려 선대의 지혜도 무시하니 발전이 아니라 퇴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모두들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자랑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지혜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식의 양은 많아졌지만 진정한 지식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입니다. 참으로 두렵습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III. 심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유대 왕들의 역사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 의로운 길을 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처음에는 의롭고 바른 길을 가던 왕들도 나중에는 불의하고 굽은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그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마음의 교만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여기에서 웃시야는 ‘나의 힘은 여호와’라는 거룩한 이름을 가진 유다의 10대 왕입니다. 그는 군대를 조직하고, 예루살렘의 방비를 강화하고, 또 군대의 무기나 병거를 증강시켰습니다. 그의 시대에 유다는 막강하여졌습니다. 그는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우물을 파서 농업을 진흥시켰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26장 1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하 26:16) 그(=웃시야)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웃시야는 나라가 번영하자 교만하여졌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고 하였습니다. 왕권이 강화되자 제사장직까지 자신이 수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문둥병에 걸려 죽는 날까지 별궁에서 격리되었고, 나라는 그의 아들이 대신 다스려야 하였습니다. 교만이 웃시야를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만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정말로 심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10절 말씀입니다.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여기에서 히스기야 역시 ‘여호와는 강하게 하심’이라는 아주 좋은 뜻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대 왕국의 가장 위대한 왕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히스기야는 즉위하자마자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는 닫혀져 있던 성전의 문을 열고 수리하였습니다. 그는 레위인에게 명령을 내려 성전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성전에서 올바른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그는 유월절을 부활시켰습니다.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이래 최대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상을 척결하여 모든 주상이나 목상을 부숴버렸습니다. 산당과 제단을 없애버렸습니다. 또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놋뱀이 우상 예배의 대상이 되어 있었으므로 이것마저 제거해 버렸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열심은 역대의 왕 중에서도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역대하 32장 2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하 32: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도 교만이 문제였습니다. 잘나가다가 교만하여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교만은 장차 나라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쳤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내리지 아니하였습니다(대하 32:26). 하지만 결국 유다가 무너지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그들의 교만이 나라를 무너뜨렸습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도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은 개인을 파멸시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지도자가 교만하면 그 나라도 파멸시킵니다.
  

네 번째로 그들은 

IV. 공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다윗의 나라가 무너져 바벨론의 포로가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를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10절 말씀입니다.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이번에 주목하려고 하는 사람은 므낫세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다윗에 버금가는 훌륭한 왕인 히스기야의 아들이 므낫세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군 히스기야에게서 폭군 므낫세가 태어났습니다. 므낫세의 잘못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그 한 가지는 사회정의를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1장 16절 말씀입니다.

(왕하 21:16)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므낫세는 장차 유다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심히 많이 흘리게 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열왕기상 23장 26절은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므낫세가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린 것은 유대 나라를 멸망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므낫세의 죄악은 요시아의 종교 개혁으로도 돌이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후에 요시아의 수 많은 개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아의 선한 일이 므낫세의 죄악으로 무너지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므낫세의 죄악의 결과로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정의가 무너지면 국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되면 나라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의가 무너지면 나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 번째로 그들은 

V. 영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모든 문제의 바탕에는 영적인 타락이 있었습니다.

므낫세의 커다란 잘못 가운데 하나는 사회정의를 무너뜨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우상 숭배였습니다. 우상을 숭배는 므낫세 만이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므낫세의 우상 숭배는 다른 모든 왕들보다 더욱 유별나고 삼했습니다.

역대하 33장 3절 말씀입니다.

(대하 33:3)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행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웠습니다.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겼습니다.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였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우상을 위한 제단들을 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았습니다. 성전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택하신 유다 나라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정신적 가치가 무너집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마음 씀씀이가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병들면 병든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병이 깊어지면 결국 등걸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신앙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바른 신앙이 되지 못하면 결국 종교의 타락으로 이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가 타락하여 고려가 무너지고, 유교가 타락하여 조선이 무너졌다는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타락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단(異端)은 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더 훌륭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시작하였을지라도 마무리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어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끝이 다릅니다. 인간의 역사는 그 끝이 잘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유다 역사는 결과적으로 망해가는 역사였습니다. 성적(性的)으로 타락하여 남의 아내에게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지적(知的)으로 타락하여 지혜로운 자의 일을 어리석은 자가 이어받았습니다. 심적(心的)으로 타락하여 잘 나가던 사람이 교만하여져서 일을 그르쳤습니다. 공적(公的)으로 타락하여 사회 정의가 무너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적(靈的)으로 타락하여 성전에까지 우상이 세워졌습니다. 이런 나라가 어찌 무너지지 않고 견딜 수가 있었겠습니까? 결국 다윗의 나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런 역사 속으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끝을 바꿔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b)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b)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룬 줄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요 13:1)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음으로 우리는 끝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고난을 겪었지만 영광스러운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끝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돌려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역사의 희망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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