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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 (눅 2: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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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밖에서 오는 시간 (눅 2:25-39)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강절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속에서 살아갑니다.
시간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옷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금은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밥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크로노스 시간에 카이로스 시간이 임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강원도 함백산 정상에 오르면 태능 선수촌 부설 올림픽 선수 훈련장이 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들이 이 곳에서 합숙하면서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벽에는 <D-365>이라고 붙어 있습니다. 올림픽까지 365일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루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하고 다음 날에는 364로 바꿉니다. 365일을 그렇게 계산하면서 연습을 하다가 <D-10>이면 현지로 떠났습니다.
이것이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면서 365일 후를 끌어다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월남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30여년 전쟁을 하면서 남자들이 수없이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여자들이 5배나 많았습니다. 결혼하지 못 하는 여자들이 부지기 수였습니다. 전쟁이 준 비극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던 남자가 군대로 입대합니다. 군복무가 20년입니다. 240 달입니다. 끈에 240개 매듭을 만들어 선물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한 달에 매듭 한 개씩 풀어서 다 풀리면 내가 그대 곁으로 돌아 오지요.”
매듭이 있는 끈을 선물 받은 처녀는 한 달 한 달 매듭을 한 개씩 풀어갑니다. 이것이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입니다. 오늘을 살면서 그 날을 끌어 드리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 더 드려 볼가요?
어머니가 지병으로 소생할 가능성이 없이 안방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모기만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들아! 지금 눈이 내리는 구나! 이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나는 죽는다.”
어머니는 이 겨울이 마지막 겨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굳세게 살아 있었습니다. 몇 년을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어느 날 물었습니다.
“겨울이 아직 안 끝났니? 봄이 오지 않았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 창가를 보세요. 지금도 눈이 와요. 아직 겨울이 안 끝났어요.”
그렇게 3년이 지났습니다. 어머니는 죽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아들은 어머니가 누워 있는 창문에 눈이 오는 그림을 그려서 자꾸만 바꾸어 놓았습니다. 겨울이 지나가지 않는 것같았습니다. 이것이 시간 밖에서 오는 시간입니다.
지금 시간을 살면서 미래 시간을 끌어다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밖에 시간을 사는 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놀라운 두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고 다른 사람은 안나입니다. 한 사람은 남자이고 다른 사람은 여자입니다.
시므온에 대하여 먼저 말씀드립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어느 날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라는 감동이었습니다. 성전으로 갔습니다. 아기 예수가 성전에 와서 낳은지 8일만에서 율법대로 전례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 아기를 안고 외쳤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오늘 본문에 또 한 사람 안나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라고 하는 뜻은 <은혜>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은혜라는 이름과 달리 안나는 불행한 생애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결혼하고 7년 남편과 살다가 사별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아이는 하나도 못 낳은 것같습니다. 자녀 이야기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나는 그 후 성전을 떠나지 않고 84세까지 살았습니다. 
안나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여자 선지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구약에 4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미리암, 훌다, 드보라 그리고 노이댜(느 6;14)입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여자 선지자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빌립의 네 딸이 선지자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여자 선지자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나도 성경 전체 8명 여자 선지자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안나는 주야로 금식하며 오직 기도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나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와서 예물을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8일만에 성전으로 들어 왔습니다. 물론 아기예수였습니다. 그래서 4000년 동안 기다리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시간 밖에서 오는 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시간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시간을 기다리면 그 날을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밖에 시간은 어떤 시간일가요?

1. 목표 시간

시므온과 안나는 개인적인 목표가 있었습니다. 오직 그 목표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 목표가 무엇일가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시키시려고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 창세기부터 귀가 따갑게 들려 왔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역사속에 오시는 그 분을 만나야 겠다는 목표를 가졌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목표였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표를 끌어 안고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으로 살았습니다. 드디어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이같이 사람들은 목표를 바라보며 삽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면서 지금을 살아갑니다.
노인들이 제일 많이 죽는 때가 있습니다. 성탄절 직후, 자기 생일 직후에 많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노인이 병석에서 목표를 세웁니다.
“내가 성탄절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
“내 생일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날을 기다립니다. 그 날이 오면 목표를 달성하였다는 안도감에서 긴장이 풀어지면서 죽게 됩니다.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완성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고 말하는 목표로 산다면 그 사람은 시간밖에 시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이것을 이루면 한이 없다.”라고 하는 목표가 분명하신 가요?
미국 SMI 회장 폴 J 마이어가 말했습니다.
“내가 목표를 세우면 목표는 나를 끌어 준다.?”
목표 때문에 살기 때문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연구소에서 65세 이상되어 정년 퇴직한 사람들을 연구하였습니다. 3;10;60;27이라는 수가 나왔습니다. 최고의 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3%, 10%가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 60%가 근근히 사는 사람들, 27%가 자선단체 도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잘 나가는 사람들은 젊어서부터 목표를 끌어다가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월트 디즈니의 꿈은 디즈니랜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 공원으로 최고 공원을 만들던 중에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디즈니랜드가 완성된 후 개막식을 할 때 유명인사들이 한 마디씩 하였습니다.
“오늘 이 광경을 디즈니가 보지 못 하고 간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디즈니 아내가 답사를 할 때였습니다.
“앞에 분이 축사하실 때 우리 남편에 대하여 좋은 말씀을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수정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남편이 오늘 개막식을 보지 못 한 것이 아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남편은 이 디즈니랜드가 열리는 것을 보면서 일하였습니다. 그가 보았기에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시간입니다.
목표를 세워 놓고 그것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시간밖에서 사는 것입니다.

2. 죽음 시간

누구나가 죽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죽을 것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을 성실하고 엄숙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지금 시간아닌 지금 시간 밖에 시간에서 사는 사람은 무엇인가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설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단순한 고기덩어리였습니다. 보고자 하니까 눈이 생겼습니다. 걷고자 하니까 발이 생겼습니다. 듣고 싶어 하니까 귀가 생겼습니다. 냄새를 맡고자 하니까 코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말하고자 하니까 입이 생겼습니다.
입은 먹는 욕구보다 말하고 싶은 욕구가 더 큰 기관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욕망을 채우려고 발버둥치는 인간도 어느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사람들은 평생 욕구를 채우려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욕구와 관계없이 죽음이라는 시간밖에 시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진정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안나는 먹고 싶은 욕구, 잘 살고 싶은 욕구, 편안하고 싶은 욕구를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84년을 성전에서 자면서 금식하며 오직 예수님만을 기다렸습니다.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으로 살았습니다.
죽을 때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겸손하게 살게 됩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원수를 맺지 않고 살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책상위에 해골을 놓고 살았습니다. 죽을 때를 늘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최고 부자 로스차일드 집은 한 쪽을 헐어 놓았습니다. 죽을 때를 끌어 당기며 살았습니다.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속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요즈음 불교 서적도 읽고 싶어서 현각 스님이 쓴 <오직 모를 뿐>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항엄 스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적에게 붙잡혀서 묶인 째로 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매달려 있게 하였습니다. 손이 묶여서 나무 가지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발이 묶여서 나무 가지를 디딜 수도 없습니다. 입으로 가지를 물고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지나 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여기 오셨습니까?’
이렇게 물을 때 입을 열어 대답하면 떨어져 죽습니다. 대답을 안 하면서 또 말이 말같지 않느냐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이 때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오직 모를 뿐.”
우리는 오직 모를 뿐인 것이 얼마나 많은 지 셀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을이지 아무도 오직 모를 뿐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며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은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미국에서는 50세가 되면 장의사에서 묘지를 예약하지 않겠느냐는 안내서가 날라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죽어 묻힐 묘지 생각을 하여 보았습니까?”
50은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여야 하는 나이입니다. 60은 날마다 죽음을 준비하여야 하는 나이입니다. 70은 장례식 순서를 미리 짜놓는 나이입니다. 80은 베옷을 하루에 한번씩 입어 보며 죽음을 준비하여야 하는 나이라는 것입니다. 그 날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시간 밖에서 오는 시간으로 사는 삶입니다.

독일 함브르크 대학 바이올린 교수 골드스타인(Goldstein)은 쏘련으로부터 망명을 온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위암수술을 두 번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취하지 않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마취를 하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악보가 날라갈가 두려워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장기간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그는 부고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 놓고 죽었습니다. 부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조화를 가지고 오지 마십시오.
둘째 조화대신 돈으로 가지고 오십시오.
셋째 조의금은 현찰로 해 주십시오.
넷째 장례식장에 오시지 못 하는 분은 은행구좌에 넣어 주십시오.
다섯째 모아진 돈은 전액 장애인 시설을 위하여 써주십시오.”
그는 죽음의 순간을 끌어다가 사용한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에서 산 분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젊어서 미술공부를 하려고 유럽의 각 도시를 거닐면서 박물관 미술관들을 다 돌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림이 두 장 이상씩은 다 있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곰곰히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잠간 동안 십자가에 못박혀 계셨다. 그것도 끔찍한 장면이다. 그런데 왜 이런 십자가 그림은 세계를 덮고 있는 것일가?”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그 이유를 알아 냈습니다. 십자가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징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가 필요없는 곳, 십자가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 살고, 10년 살 것처럼 꿈을 가지는 것이 최고 지혜로운 삶입니다. 죽음이라는 미래 시간을 끌어드리며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3. 하나님 상 시간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대위에서 하나님이 상주시는 시간을 끌어다가 오늘을 사는 삶이 바로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시간 밖에 시간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유대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습니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아브라함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며 살았습니다.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에서 살았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종살이 할 때 궁중에서 편하게 살았습니다.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궁중을 거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 위하여 궁중을 뛰쳐 나옵니다.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3-26)

모세가 죽고 1200년 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가 그런 고난을 자초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1200년후의 밖의 시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다윗은 궁중보다도 다른 어떤 곳보다도 하나님의 집 문지기가 좋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최고 학부 가부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를 로마 교회에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리고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바울도 예수님께서 상주시는 시간을 끌어 오늘을 살았던 사도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심판대에 설 시간을 끌어 오늘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런 삶이 참으로 보람있는 삶이 될 것이고 궁극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올림픽 선수들이 몇 년 동안 피눈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올림픽에서 목에 금메달을 거는 순간은 모두가 눈물을 주루륵 흘립니다. 그 동안의 고생과 훈련이 주마등같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속에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나는 시간밖에 시간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10,000명을 돌파하는 그 날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을 것입니다.
열심히 살 것입니다. 심판대위에 설 것을 생각하며 조금도 쉬지 않고 달릴 것입니다. 죽는 그 날 수많은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 앞으로 가면서 곧 주님 만날 생각에 한없이 울 것입니다.
심판대위에서 주님이 면류관을 머리에 씌워 주실 때 눈물을 닦으며 말할 것입니다.
“주님! 오늘을 위하여 살아 왔습니다.”

시간밖에서 오는 시간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대강절 깊숙이 들어 왔습니다. 곧 성탄절이 다가 올 것입니다.
자부가 시아버지에게 손자를 등에 엎혀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버님! 오늘 시장 갖다 늦을 것같아요. 손자 좀 엎어 주세요.” 그리고 예정보다 더 늦게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오줌과 똥을 몇 번 싸서 펑퍼짐한 데도 그대로 엎고 있었습니다.
“아버님! 미안해요. 수고하셨어요. 힘들지 않으세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즐거웠다.”

아이를 내려고 놓았습니다. 그런데 옆 집에 빌려온 빈 독을 갖다 주어야 했습니다. 시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걱정 마라. 내가 갖다 주마.” 그리고 등에 지고 가다가는 쉬고, 가다가는 쉬면서 말했습니다.
“너무 무거워!”
그런데 알고보니 손자 몸무게와 독 무게는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힘들어도 힘든지 모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겁고 힘듭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모두가 즐겁습니다.
안나는 84년 주야로 금식하며 즐거웠던 여인이었습니다. 시므온도 오직 예수를 기다리며 즐겁게 살았습니다.
시간 밖에서 오는 시간속에서 살면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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