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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관심을 극복합시다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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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을 극복합시다 (눅 10:25-37)


최근 인터넷 상에 ‘개 vs 사람 비교 사진’이 올라와 네티즌 사이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큰 부상을 입고 길가에 쓰러진 어린 아이를 본 사람들은 보고도 못 본 척 자기 갈 길을 가느라 바쁩니다. 그러나 개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는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뺑소니 사고를 당한 두 살배기 여자 아이가 결국 사망에 이르는 충격적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뺑소니차에 치여 길에 쓰러져있었는데, 무려 18사람이나 지나가면서 아무도 아이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사건으로 개가 길에 쓰러져 있습니다. 얼룩무니 개 한 마리가 곁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개는 지나치지 못하고 누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에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이 두 사건에 관한 사진이 인터넷에 함께 올랐습니다. 그리고 한 눈으로 이 두 사건이 비교할 수 있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어버리면 개만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금수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세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가 무관심입니다. 사람들이 아이가 차에 치인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1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가 무감각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어린 아이가 차에 치여 죽어가고 있는데,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눈앞에 어린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냥 지나치면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감각, 양심이 찔리는 마음의 감각이 무뎌져 버린 것입니다.

셋째가 무기력입니다. 분명히 어린 아이를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병원에 갈 수 있습니다. 안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어려우면 전화하여 신고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3무의 시리즈 즉 무관심 - 무감각 - 무기력은 무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무관심이 반복되고 깊어지면 무감각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무감각이 심해지면 무기력해집니다. 

그래서 무관심을 극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관심만 극복할 수 있다면 결코 무감각해 지는 일은 없습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서로를 향한 감각이 살아납니다. 불쌍한 마음 들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듭니다. 이렇게 서로를 향한 감각이 살아나면, 당연히 무기력해 지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해 무엇인가 행동하게 됩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위로의 말, 사랑의 말을 하게 됩니다. 작으나마 도움의 손길도 펼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 일체의 비결을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1.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율법교사는 지금까지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돕고 사랑해야 할 이웃을 대 보시라고 여쭙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자기가 도와야 할 자기의 이웃을 말씀하시면, 자기는 어떻게 도왔는지 말씀드릴 준비가 다 되었다고 자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관점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중심에 있고, 자기의 이웃을 찾았습니다. 도와야 할 자기 관점에서 도움 받을 이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움 받을 사람이 중심에 있고, 우리가 그 사람의 이웃인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움 받아야 할 사람의 관점에서 도와야 할 우리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를 보면, 강도만난 사람에게 다가온 사람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유대인이고, 그중에도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마리아인입니다. 

먼저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 곁을 그냥 지나갔습니다. 마치 차에 치인 두 살배기 어린 아이를 모른척하고 지난 간 사람들처럼 그랬습니다.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무관심했을까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율법을 따라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만일 강도만난 사람이 죽었거나 돕는 도중 죽는다면 그를 도와줄 경우 시신을 만지게 됩니다. 분명 저들은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레 21:1)라는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 저들은 만일 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우면, 자기들이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강도만난 사람을 더 이상 자기들의 이웃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다고 마음으로 결정하게 됐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 합리화를 정당화시키게 한 것은 잘못된 관점입니다.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결코 무관심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한 눈에 강도만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견원지간입니다. 서로 감정이 좋지 않고, 서로 상종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적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그냥 지나쳐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관심을 보이고 다가가 도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관점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강도만난 사람의 안타까운 상황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저것 따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잘못된 관점 때문입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내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갖가지 핑계거리가 떠오르고, 상황을 합리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관심하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게 됩니다. 저기 쓰러져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무관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저기 강도만난 사람이 내 동생이라면 내 아들이라면 내 아버지라면 무관심하게 그대로 지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상반되는 말이 있습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와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아전인수라는 말은 “자기 논에만 물을 댄다”는 뜻입니다. 늘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며 사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역지사지라는 말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처지에서 생각하며 사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무관심은 이 관점을 바꾸어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전인수에서 역지사지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 중심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도 고려하면서 생각하고 판단할 때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공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과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다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냉정합니다. 싸늘합니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고통 속에 길에 버려져 있는데, 아니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이성적으로 판단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33절을 보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기 전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의 그 고통을 공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관심은 공감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공감이 없으면 관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감할 수 있을 때, 무관심이 사라지고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 헨리의 [강도와 신경통]이란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가정에 강도가 들게 되었다. 강도는 잠자던 부부에게 칼을 들이대고 무서운 눈초리를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손들어! 우물쭈물하면 찔러 버릴꺼야!" 
그러나 남편은 한손만 번쩍 들었다. 강도는 그 모습을 보고서 당장이라도 달려 들 듯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두 손 다 들란 말이야!" 남편은 찌푸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실은 왼쪽 어깨에 신경통이 있어서 들 수가 없소이다." 

그 소리를 듣고 강도가 조금 누그러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신경통이요? 사실은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 그때부터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강도는 신경통을 놓고서 집주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증세에 대해서, 치료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의 꽃이 점점 피어나면서 
방안에 온기가 더해가기 시작했다. 부인은 그 모습을 보면서 주방에 나가 커피를 끓여왔다. 
잠시 후에 집주인에게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좋은 치료로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 원한다는 말을 남기고서 강도는 떠났다.

그렇습니다. 공감이 서로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냅니다. 

강도는 집주인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돈을 강탈하기 위해 쳐들어 왔습니다. 그러다 신경통 때문에 집주인과 공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자기도 신경통 때문에 직장을 잃고 강도짓을 해야 하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데, 신경통 때문에 손을 들지 못하는 주인을 보자 마음 깊이 공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강도가 아니라 친구가 됩니다.

집주인도 신경통 때문에 강도짓을 해야만 하는 저 강도의 안타까운 상황에 공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커피를 함께 나누어 마시며 강도를 더 이상 경계하지 않고 친구로 맞습니다. 

최근의 한국 정치를 들여다보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합니다. 대표적으로 ‘안철수 현상’입니다. 도대체 안철수가 누구길래 갑자기 대권주자 1위로 부각된 것일까요? 그분이 이루어낸 업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하겠다고 제시한 정책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전혀 검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굳히고 있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소통을 통한 공감’입니다. 그분이 청춘콘서트라는 것을 열면, 젊은이들이 열광을 하며 몰려듭니다. 이분이 내건 청춘 콘서트의 타이틀이 [희망 공감]입니다. 공감을 통해 함께 희망을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공감에 목말라있습니다. 공감을 해 주면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함께 희망을 나눕니다. 그래서 깊은 관심을 함께 가지게 됩니다.

3.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실천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3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니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만난 사람을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이 실제로 강도만난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그 곁에서 눈물만 흘리고 잠시 머물다가 자기 갈길로 가버렸다면 그 관심은 반쪽자리 관심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저 공감하는 일에만 머물렀었다면 그 관심은 값싼 동정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구체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완성했던 것입니다.

한 신학교 교수가 설교학을 강의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오늘 본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제로 설교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한 강의실에 가서 실제로 설교를 하게 했습니다. 그 설교를 다른 학생들과 함께 듣고 평가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수는 학생들에게 강의실로 가는 도중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했습니다. 이 교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설교를 하기 위해 길을 가면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날 때 설교자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시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급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준 학생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설교 시간까지 시간이 별로 없을수록 그 사람을 돕기 위해 길을 멈춘 학생들은 더욱 적었습니다.

이 교수는 설교시간에 늦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도왔던 학생에게 후한 성적을 주었습니다. 반대로 설교 자체는 정말 잘했지만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던 학생들에게는 박한 성적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천 없는 외침은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실천 없는 공감도 무기력한 감상에 불과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이 관심을 열매 맺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눅 15:4 말씀을 무겁게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목자는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관심입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렇게 관심을 보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무관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관심을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내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관점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가슴가득 공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작은 실천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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