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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간음하지 말라! (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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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지 말라! (출 20:14) 
 

1. 율법, 십계명 설교에 대하여

지난 11월 22일, 국회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을 처리한 후, 어느 현직 부장판사가 페이스 북에 “뼛속까지 親美인 대통령과 통상관료들이 서민과 나라 살림을 팔아먹은 … 이날을 잊지 않겠다”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현직 판사는 ‘대통령 엿 먹인다’는 뜻의 新造語를 써가며 대통령을 조롱하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 북에 올렸습니다. 아무리 옳은 일, 바른 주장이라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과 같은 잘못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경기도 교육청은 ‘최근 2년 사이 교사가 학생을 때린 횟수보다 학생들이 교사를 때린 수가 더 많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고3 아들이 ‘공부해라, 좋은 대학 가라’는 엄마를 죽여 수개월 동안 집안에 방치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시대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있다는 것, 그 결과 질서와 권위 등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이것은 교회 밖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 안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의 신앙윤리와 질서와 권위 역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너진 것은 다시 쌓아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의 기초이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교리 설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그 첫 시작으로 십계명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율법의 가장 기초인 십계명을 전하게 된 것은 시대적인 사명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율법이나 십계명 설교에 대해 다소 否定的인 視覺이 있습니다. 

지난주 월, 화 이틀 동안 있었던 <목회자 포럼 수련회>에서 제가 이와 같은 말로 話頭를 꺼내었더니 전적으로 同議하는 목사님들도 있었지만, 反對하는 목사님들도 있었습니다. 반대의 주된 이유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라는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 주님의 은혜의 복음뿐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들은 덧붙이기를 ‘괜히 율법 설교하여 교인들 기죽이거나 죄책감을 갖게 하지 말아라’고 했습니다. 또 ‘균형을 가지라’고도 했습니다. ‘율법에 관한 설교와 은혜에 관한 설교를 골고루 하라’는 말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저의 確信은 이와 다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율법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를 산다는 것, 그리고 초대 교회가 율법주의자들로 인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근 현세 교회 역사에서 바리새적인 율법주의로 인한 혼란이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여러 목회자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율법은 복음의 그림자라는 생각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혹은 ‘율법주의자’는 잘못된 것이지만 ‘율법’은 선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성도를 복음과 은혜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즉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敎師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이 여러분의 실상을 엄정한 말씀의 눈으로 바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內面과 삶을 성경의 기준,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율법이라는 말이죠. 따라서 율법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진정한 자신의 實體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에, 은혜를 말하기 전에 율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론은 십자가 복음이고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진짜 복음이 되려면 반드시 율법을 지나야 합니다. 

자! 그럼, 그 율법의 중심이자 십계명 중의 하나인 오늘 본문을 보실까요? 우선, 오늘 설교는 주제가 主題인 만큼 用語나 表現에 대한 여러분의 양해를 먼저 구합니다. 

2. 간음하지 말라!

1) 제7계명의 중요성

미국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 사는 어떤 남자가 여자 친구를 차에 두고 프라이드치킨을 사러 갔습니다. 그는 치킨 가게 매니저가 치킨이 든 박스라며 주는 것을 받아들고는 근처 공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공원에 도착해서 치킨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박스를 열어보니 그 안에 돈이 기득 했습니다. 치킨 가게 매니저가 실수로 통닭 대신 은행에 입금할 돈이 가득 든 종이 박스를 주었던 것이죠. 유혹받기 쉬운 순간이었지만, 그는 가게로 돌아가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매니저는 정말 고마워하면서 말했습니다. “앉으십시오. 신문사에 전화해서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당신은 이 도시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아니, 왜요?” “저, 저는 유부남인데 함께 있는 여자는 제 아내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일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정직한 사람에게도 은밀한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는 흠잡을 게 없어 보여도 은밀하게 죄에 빠져 있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나 사실 이것은 양호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드러내어 놓고 노골적으로 성을 말하고, 性的 罪惡과 不倫을 미화하고 부추기는 문화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저희 동기 두 분이 아주 특별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만, 서울의 큰 교회 목사이자, 한국교회의 스승이요, 당시 교단이 다른 신학생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존경하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 대해 ‘7계명을 범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말씀드린 제 동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니라’고 한 분은 군종 시절 일개 군종이 ‘군부대 교회 지어달라’고 한 부탁을 선뜻 받아들여 교회를 지어주신 그 목사님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 내가 이리 저리 들어보니까 진짜라 카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둘이 계속 ‘기다’, ‘아니다’하고 싸우다가, ‘그럼 직접 만나서 물어보자’하고는 서울로 갔습니다. 여러분, 이 분들이 그 목사님을 만났을까요? 큰 교회, 바쁘신 목사님이 다른 일도 아니고 이런 일로 만나자고 하는데 만나주겠습니까? 그럼 포기해야 되는데,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 교회 사무실 직원들에게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사실인들 직원이 ‘그렇다’고 하겠습니까?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하자, 이번에는 당시 남서울교회 담임목사로서 저희 때 신학교 개학부흥회 강사로 오셨던 홍정길 목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홍 목사님은 기꺼이 그들을 만나 주셨고, 가타부타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목회자들이 이런 문제로 오해를 받을만한 경우들이 많다’고 만 하셨습니다. 결국 ‘기다’, ‘아니다’의 만족할만한 답을 못 얻은 이 분들은 ‘아직도 우리 둘의 내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30년이 다 되어가는 3 주 전까지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교회 지도자에 관한 7계명 관련 醜聞이 계속 이어지고, 평신도들의 성에 관한 잘못된 사고, 행동, 범죄는 그보다 더 많다는 말들이 공공연히 들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7계명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십계명에서 제7계명의 위치는 어떠할까요?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말씀드리면, 피조물인 인간의 첫 번째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간의 상호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관계에서 그 起源, 原型, 基礎가 되는 것은 부부관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맨 처음 창조하신 사회는 가정이며, 그 가정은 남자와 여자의 신성한 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관계도 부부만큼 근본적인 것은 없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관계되어 결코 왜곡되거나 변질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관계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反逆이요 挑戰입니다. 또 제7계명은 사람의 생명의 신성함을 밝히면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 제6계명의 뒤를 잇고 있는데요, 이것은 순결은 부부의 생명과도 같다는 뜻입니다. 즉 不貞은 부부를 죽이는 犯罪라는 말이죠. 

이런 기본적인 의미를 생각하면서 제7계명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 제7계명의 의미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 原語的으로 ‘불법적인 성적 교제를 가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남편이나 아내 외의 관계를 갖지 말라는 말이며, 남편이 없고 아내가 없는 사람은 결혼 안에서만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적용됩니다, 

그렇다면 이 죄를 범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 먼저 이 죄는 자신에 대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7계명을 범하면 먼저 육체적인 害惡이 분명히 그 몸에 나타날 것이고, 이어서 영적인 損失이 나타날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며, 성령님께서 침묵하시고, 은혜가 떠나고,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시키고 말 것입니다. 즉 7계명을 어기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행동입니다.  또한 이 죄는 가정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범하면, 반드시 부부관계에 여러 문제들이 나타나고, 그러면서 부부관계가 점점 멀어지며, 부부와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도 멀어지고, 결국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무너지는 비참한 결과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손실은 이러한 부정이 無形의 敎育이 되어 자녀들에게까지 물려지게 되어, 결국 자기 대만 아니라 자녀까지 파괴시키는 무서운 죄가 제7계명입니다.  

또한 이 죄는 사회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적인 관계의 기초인 부부관계를 깨트리면 그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관계들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는 말이요, 배우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죄는 국가에 대하여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간음은 국가의 기본적인 질서를 붕괴시키는 害惡 行爲이기 때문에 모든 국가는 국법으로 부정한 자들을 처벌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자는 국가의 敵이라는 말이지요. 궁극적으로 이 죄는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귀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적으로는 순결한 하나님의 신부이며,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배우자에 대해서는 순결한 配匹이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율법이 규정하는 좁은 의미에서의 간음은 ‘간통’, 즉 배우자가 있는 남자나 여자가 다른 가정의 배우자와 관계를 갖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피해갈 수 없는 명백한 범죄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이런 남자나 여자는 돌로 쳐 죽이거나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창38:24,신22:23). 
그런데 오늘날은 이 ‘간통’을 범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죄라고 규정한 법이 違憲이라고 대법원에 계속 抗訴를 합니다. 헌법재판관들 중에도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니죠. 일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간통은 제7계명을 범하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간통을 죄로 규정한 하나님의 기준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 결혼하기 전에 이루어지는 ‘혼전 성관계’ 또한 명백한 간음입니다. 아무리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 하더라도 결혼 전에 관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범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면 자신의 순결은 물론 상대방의 순결도 지켜주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기타 결혼을 벗어난 모든 ‘혼외 관계’와 돈으로 성을 사고파는 ‘성매매 행위’, ‘동성애’등을 성경은 명백한 간음죄로 규정합니다(레18~20).

그런데 이 계명과 관련하여 구약에는 몇 가지 경계선상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애매모호한 것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실제 행위가 아닌, 소위 ‘유사성행위’라고 하는 음란한 행위들, 자위행위, 야한 영상을 즐겨보는 행위, 성적인 공상 등을 제7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법에서는 이것을 간음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은 이것을 ‘부적절한 행위’라고 말하지요.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요?

3) 신약성경이 말하는 제7계명 

예수님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절에서 30절,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예수님의 이 말씀은 “몇 가지 경계선 상의 문제들”, 즉 애매한 것들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의 기준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일반적으로 애매모호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은 죄가 아니며 단지 부적절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명백한 범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말씀을 진지하게, 심지어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눈으로 이성을 보고 음욕에 빠지는 자신을 보고 눈을 뽑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손으로 죄를 짓자 그 손목을 잘랐습니다. 심지어 ‘오리겐’이라는 유명한 성직자는 자신의 성기를 절단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눈 하나 뽑고, 손 하나 자르고, 성기를 절단하는 것으로 인간의 음란한 욕구가 완전히 해결될 수만 있다면, 또 그렇게 해서 온 몸이 지옥에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정말 그리 될 수만 있다면, 한번 도전해 볼만한 일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눈을 뽑고 손을 자르고 성기를 절단해도 마음에는 여전히 음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목을 잘라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죽는 순간까지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 말씀이 이렇게 엄격하고 무거운지라, 사람들은 “과연 이 말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왜 말씀하셨을까?” 라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이 말씀이 엄격하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여도 우리 마음대로 변경시킬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능하고 안하고를 떠나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준 앞에서 수도 없이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은 무겁고, 우리는 그것을 지킬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 회개하면 용서하실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십계명 뒤에 나오는 제사 제도와 십자가의 복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할지라도 이 기준을 낮춰 잡지 않고, 이 기준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결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가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강력한 도전을 줄 수 있는 도덕적 힘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인 기준을 놓아버리고, ‘이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저울질하며, 그 기준을 낮춰갈 때, 우리는 거센 음란의 유혹을 이길 수 없으며, 자신과 가정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결국 경건의 모양만 남고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패잔병 같은 크리스천으로 전락하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준을 그대로 지키려고 몸부림치면서 이 땅에서의 성결을 이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율법 앞에서의 절망이 복음을 복음 되게, 은혜를 은혜 되게!

이제 저와 여러분이 제7계명의 결론 앞에 서야 할 시간입니다.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➀ 우선 저나 여러분이 간음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언론 방송 영상 매체를 통해서나, 혹은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귀로, 눈으로, 마음으로, 수도 없이 간음죄를 저질렀음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야 합니다. 

➁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정말 자신이 눈이나 귀나 마음으로 간음죄를 저지른 것이 몸으로 부정을 저지른 것과 같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간음죄를 저질렀다는 두려움과 수치심과 고통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이, 육신으로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뭘?’하신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성도는 이 말씀 앞에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함이 실제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처럼 수치와 죽음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➂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➃ 그런데 여러분, 이것도 끝이 아닙니다. 회개한다고 끝이 납니까? 뒤돌아서면 또 다시 죄를 범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實相에 낙심합니다. 그런데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으로 끝내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직까지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의 진정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포함한 십계명의 진짜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이 정말 주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 나는 정말 이 간단한 계명 하나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이구나!’를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그 다음 단계가 보입니다. 

➄ 그 다음 단계가 무엇입니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는 것입니다. 복음이 왜 복음입니까? 우리가 도무지 할 수 없는 것,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고,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그것을 면하게 하셨으니 은혜의 복음인 것이죠. 따라서 제7계명은 우리가 심각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엎드리게 만듭니다. 이것이 주님의 계명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조건 은혜가 아닙니다. 계명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실상에 대해 낙심하고 절망하는 자에게 십자가와 복음이 은혜가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를 통하여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사랑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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