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서주일] 예수, 계시된 말씀 (요일 1:1-4)

첨부 1


예수, 계시된 말씀 (요일 1:1-4)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 가슴에 불을 간직한 사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이면서 교회가 성서주일과 인권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교회 전통은 오늘을 ‘Gaudete Sunday’라고 불렀는데, ‘가우데테’는 라틴어로 ‘기뻐하다’라는 뜻입니다. 대림절은 참회의 분위기 속에서 자숙하며 보내야 하지만, 그 중간에 해당하는 오늘부터는 주님을 맞이할 기대와 기쁨의 분위기를 누려도 됩니다. 그 때문에 대림절 셋째 주일에 밝은 청색 초를 사용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것은 새벽이 밝아오기 직전의 색깔이고,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상징하는 색깔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그런 초 하나가 밝혀지면 좋겠습니다. 옛 사람들은 은혜 체험을 마음에 불을 밝히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불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러 ‘無明’이라 합니다. 마음에 빛이 없기에 집착과 망상에 사로잡혀 산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첫 아침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셨던 까닭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강림했을 때 불의 혀 같이 것이 사람들 위에 머물렀다고 전합니다. 사도들은 골방 밖으로 나가 예수가 퀴리오스 곧 주라고 선포했습니다. ‘主’라는 글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王’ 자 위에 점 하나가 찍혀 있는 모양입니다. 그 글자는 ‘촉대 위 촉광이 요요히 빛나고 있음’을 그린 그림 글자입니다. (우석영, <낱말의 우주>, 439-441쪽 참조)

머리에 혹은 가슴에 불을 간직하고 있어 어두워지지 않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성도들은 그 불을 나누어가진 사람입니다. 그 불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어야 세상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불은 우리 속에서 가물거리기 일쑤입니다. 그 불이 지속적으로 타오르기 위해서는 기름이 제때에 공급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기름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수록 우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가슴에 불을 간직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슴에 불을 간직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 파헤쳐지고 짓밟히고 있는 피조세계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로 기록된 책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생명의 말씀’, ‘생명’, ‘영원한 생명’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된 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자리로 화육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그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선택한 표현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 날로 깊어가는 신앙

여러분은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과 만나셨습니까? 똑같은 질문을 제게 하신다면 저는 만났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제 삶의 이유이고 목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아직 온전히 주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살지는 못합니다. 어느 순간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시지만 다른 순간에는 너무도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아직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제가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알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깊어가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요일1:1)

이 글을 쓰면서 요한은 주님과 함께 지냈던 시간을 마치 꿈결처럼 떠올렸을 것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미풍처럼 불어와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던 주님의 음성, 거센 물결처럼 몰아쳐 적대자들과 위선자들을 나무라던 주님의 음성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음성뿐입니까? 아직 새벽이 밝아오기도 전에 기도하신 후 산에서 내려오시던 주님의 모습,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던 모습,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와 심령이 상한 자들을 골육지친처럼 사랑으로 대하시던 그 모습도 떠올랐을 겁니다. 자기 발을 닦아주시던 그 겸손한 손길을 어찌 감격 없이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나중에야 그분이 육신을 입은 하나님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설교를 듣고, 책을 보고, 다른 이들의 간증도 듣는 그저 그런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에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귀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외부의 소리와 내부의 소리들을 잠잠케 해야 합니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시련의 시간을 겪은 후에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앎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직하게 자기 부족함을 시인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42:5)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주님께 빛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만연 원년의 풋볼>에는 미츠라는 애꾸눈 사내가 등장합니다. 어렸을 때 돌에 맞아 한 눈을 잃었던 그는 암흑 속에 있는 눈에 나름의 역할을 부여합니다. 

“기능을 상실한 눈을 나는 두개골 안쪽의 어둠을 향해서 열려 있는 눈으로 삼았다. 내 한쪽 눈은 피가 가득 담긴, 체온보다 얼마간 뜨거운 어둠을 항상 응시하고 있다. 나는 내 내부의 밤의 숲을 감시하는 척후를 한 사람 고용한 것이며, 그렇게 해서 나는 나 자신의 안쪽을 관찰하는 훈련을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것이다.”

미츠는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지어져갔던 것입니다. 자기 살핌 없이는 신앙의 성숙도 없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만남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주님과 몸으로 만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몸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가능성을 봉헌해 버릇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은 과거에 벌어졌던 완결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현재적 사건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사귐

믿는 이들은 자기가 보고 듣고 만진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와 만나 삶이 어떻게 변했고 지금은 어떤 소망을 갖고 살고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3:15)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의 나눔이야말로 가장 귀한 이웃 사랑입니다. 성도들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말로 사귐 혹은 친교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코이노니아koinonia 입니다. 그 말은 본래 ‘남과 함께 나누다. 공동으로 소유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뿌리인 ‘코이네koine’는 소극적으로는 ‘몫이 있다’는 뜻이지만 적극적으로는 ‘몫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친교는 음식이나 같이 먹고 허튼소리나 하고 게임이나 하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누릴 몫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래서 코이노니아를 나눔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자기 몫을 덜어 남에게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주 할 수 없는 일도 아닙니다. 초대 교회는 말 그대로 코이노니아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독점이 아닌 나눔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체험했습니다. 성령께서 만드신 일치의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와 무관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너와 나를 가르는 담이 무너지자 세상은 돌연 벗들의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가 세상에 증언해야 하는 것은 벗들의 나라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증언의 도구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나눔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코이노니아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오랫동안 한 교회 안에 있다 보면 인간적인 친밀함이 생기고 그 때문에 서로를 허물없이 대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친밀함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인간적 친밀함이 신앙의 진보를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막9:50) 하고 말씀하신 것도 아마 그런 뜻일 겁니다. 우리 교우들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하자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기쁨을 발견하는 눈

요한은 이 서신을 쓰는 이유를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기쁨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지금 여러분은 기뻐하는 분이십니까? 처리해야 할 골치 아픈 문제들, 괴로운 일, 실망스러운 일, 낙심되는 일로 인해 우리는 기쁨보다는 우울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마치 중력처럼 우리를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미 주어진 기쁨을 발견하는 눈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밝아집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들은 삶을 처리해야 할 일들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고,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이들은 생활 도처에 숨겨진 기쁨을 발견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우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시16:11)

어떤 순간에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 마음은 든든해집니다. 성도의 기쁨은 바라고 원하던 바가 이루어졌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큽니다. 그 기쁨은 시간이 지난다고 하여, 인생의 불황이 닥쳐온다 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것이고, 위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을 사는 것이 믿음이요, 이 기쁨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요, 이 기쁨을 전하는 것이 복음”(김흥호)입니다. 

며칠 전에 몽골 은총의 숲을 책임지고 있는 울란바타르 대학의 최재명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를 통해 아르갈란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태평화마을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나무를 심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전기를 끌어들이고, 우물을 파고, 게르를 세우고, 묘목을 키우고, 그것을 또 옮겨 심고, 지역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는 등 정말 고단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한국에서 안과 치료와 발목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눈발이 날리는 차가운 날 밖에서 일하다 보니 눈이 눈에 들어왔고, 기온이 낮은 탓에 그 눈이 얼음으로 바뀌어 각막이 손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히히히 웃습니다. 자기 돈을 다 쏟아 부으면서도 그가 기뻐하는 것은 주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입니다. <에너지 팜>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하고 있는 우리 교우 김대규 씨는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지에서 주민들의 에너지 자립을 돕기 위해 불철주야 애를 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마음에 기쁨을 심어주시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계시된 말씀이신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갈등과 폭력으로 빈사상태에 이른 세상에 산소를 공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앞서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세상에 기쁨의 에너지를 불어넣는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연대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믿음은 듣고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얀 손은 부끄러운 손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세상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만나는 기쁨을 맛보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