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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을 중심으로 한 선택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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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중심으로 한 선택 (창 12:1-9)


교차로라는 것은 두 개의 어긋난 길이 서로 가로질러 가면서 만들어진 길입니다. 선택의 폭은 넓지만 한 번 선택하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하란이라는 도시는 ‘교차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 지역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물질이 풍요로운 곳이고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던 곳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각오로 가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가 가나안으로 가던 도중에 하란이라는 곳에 잠시 머물게 됩니다. 데라는 나이가 많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하란에서 머물다가 숨을 거두게 됩니다. 데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시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가나안 땅으로 향했지만 그는 그 가나안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그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아브라함에게 이어집니다. 

데라가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물다 세상을 떠난 하란이라는 도시 이름의 뜻이 교차로라는 것은 본문을 중심으로 볼 때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하란은 유브라데스강 북쪽 지류인 발리크강 유역에 있는 매우 번영한 무역 도시입니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와 니느웨 그리고 가나안과 애굽으로 가는 길을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하란이라는 도시는 그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모든 도시로 떠날 수 있는 중심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들을 보통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정확하게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입은 곳은 갈대아 우르가 아닌 하란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향하는 길과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교차로인 하란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 나이가 칠십 오세였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 곳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의 문화와 그곳의 정서에 익숙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그의 동의하에 이루어졌겠지만 그 결정의 중심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입니다. 그 아버지 데라가 죽었습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로 돌아갈 수도 있고, 아버지가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었던 땅인 가나안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는 두 길 중에 선택할 수 있는 교차로에 서 있습니다.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세계로 초대하시며 갈대아 우르가 아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즉 ‘보여주신 땅’이 아닙니다 ‘지시하시는 땅’ 즉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모릅니다. 그곳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그곳의 환경을 모릅니다. 반면에 갈대아 우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압니다. 그는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의 사람들과 문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떠나야 하는 곳은 그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알고 있는 세상입니다. 익숙한 곳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곳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생각과 경험, 세상의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떠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축복의 세계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떠나야 하는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경험한 세상인데 우리가 새롭게 향하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지만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워 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는 회개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눈물을 흘리고 잘못은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라는 원어의 의미는 180도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해 180도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을 믿는 세계로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세계는 떠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모세가 40년간 생활했던 궁정을 떠나 광야로 들어섭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지금까지의 생활의 전부였던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떠납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과거의 세상적인 모든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믿음은 떠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와 가나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교차로에서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믿음의 세계로 향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선택위에 함께 하시며 그를 양육하고 훈련시키셔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며 그의 삶에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어려운 과정들을 극복하고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세겜이라는 곳으로 아브라함을 인도하십니다. 오늘 세겜이라는 곳이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6,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삶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세겜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축복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가나안 땅 중에 세겜 땅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가 제단을 쌓으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곳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꿈을 확인한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꿈이 세워진 곳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저에게 번쩍 떠오르는 말씀이 있어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안에서 꾸었던 꿈은 그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은 그의 후대들의 꿈이었습니다. 데라의 꿈이 아브라함에게로 아브라함의 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꿈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40년을 걸쳐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지도자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은 점령합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이라는 지역으로 다 모이게 했습니다. 각 지파의 장로들과 재판장 그리고 지도자들을 다 불러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셔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를 때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 거하면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하며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은 지금 공동체에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도 모두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율례와 법도를 제정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제단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웁니다. 그 돌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증거로 삼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함께 찾아서 보겠습니다. 여호수아서 24장 25절부터 28절까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검이라는 지역으로 모이게 했을까? 왜 큰 돌을 여호와의 제단이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웠다고 구체적으로  말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을 하면서 세겜이라는 지역을 선택하고 제단 옆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큰 돌을 세운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게 됩니다. 

약 800년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 그곳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도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꿈을 이루며 살겠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아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와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했던 그것을 기억하고 그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거룩한 꿈은 수백년이 지난 후에도 이어지는 꿈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열매들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지금 내가 오늘에 충실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꿈을 꾸며 세우는 삶의 제단이 훗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커다란 역사로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는데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말합니다. ‘마침내’라는 것은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고비와 힘든 일들을 넘어서 결국 이루어지고 도달했을 때 ‘마침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꿈 너머의 꿈’을 꾸는 것과 그 꿈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의 마지막에 ‘마침내’ 그 꿈이 이뤄지고 그 꿈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어지는 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한 주간 살아 나갈 때 선택의 교차로에서 하나님의 안에서 품은 거룩한 꿈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쌓은 믿음의 제단들이 세겜의 제단이 되어 우리의 자녀들과 믿음의 후배들에게 선한 믿음의 꿈을 심어주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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