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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와서 보라 (요 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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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 (요 1:35-42)


18세기 세계적인 영적 부흥을 낳은 웨슬리 운동은 뜻밖에도 그의 실패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영국 국교에서 선교사로 선발되어 미국에 갔지만 선교는커녕 여성 문제로 기진맥진하여 야반도주하다시피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인디언을 구원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오!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더욱이 배가 뒤집힐 듯한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찬송을 부르던 모라비안의 성도들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은 그의 믿음이 더 초라하게 느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절감으로 어두운 시간을 보내던 그로 하여금 젊은 모라비안 피터 뵐러를 만나게 하시고, 1738년 5월 24일 저녁에는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참석한 모라비안 기도회를 통해 특별한 체험을 경험하게 만드셨습니다.

“저녁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어느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얼마쯤 지난 후 그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는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이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 웨슬리는 뜨거운 복음 전도자로 88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40만㎞를 여행하며 영국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실패와 부끄러움이 큰 변화의 기회가 됐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우리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고후 5:17은 말씀하는데 과연 나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 다음에 우리가 느끼는바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나는 많은 부분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승리자로 우뚝 서 있어야 되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 주님의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의 변화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이튿날이라는 말이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제일 처음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에게 와서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네가 엘리야냐? 아니면 그 선지자냐? 그도 아니면 너는 누구냐?”
요한은 단지 자기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은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는데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리고 이튿날 빌립이 나다나엘을 불러 예수께 데리고 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마치 사도 요한의 일기장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듯 ‘이튿날’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요한복음의 초기 기록이 연속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임을 우리들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 예수님께서 거니심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할 때 ‘거니신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모습의 표현입니다. 
29절에서는 세례요한에게로 '나아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말하고 있고, 36절에서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드디어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상으로 나아가시는 주님을 보면서 자신과 함께 서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요한의 증거는 전날의 증거처럼 간단하면서도 동일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어린양은 어떤 양이었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왜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왕, 혹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구원자라고 소개할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소개가 우리들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은 말로 들리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이해하기 쉬운 말이었습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당시는 시기적으로 유월절 절기가 가까운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그들의 조상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서 풀어 자유롭게 가도록 하라고 했지만 바로가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모든 장자의 죽음입니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할 것 없이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첫 생명이 다 죽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기둥과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죽음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자기 집 문기둥과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애굽 사람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날에 바로가 모세를 불러 “너와 이스라엘 백성은 빨리 이 땅을 떠나라”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죽음이 넘어갔다, 죽음이 지나갔다’는 의미로 이 날을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년 유월절이면 애굽에서의 그날을 기억하면서 어린양 한 마리를 죽이는 의식을 행합니다. 
또한 1년에 한 차례 대 속죄일이 되면 두 염소를 성전으로 가져와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속죄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고 또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이 염소 위에 올려놓으니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백성들의 죄가 멀리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고는 그 염소를 멀리 광야로 끌고 가서 풀어놓습니다. 이 염소를 아사셀 염소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나 ‘죄를 지고 간다’ 는 표현들은 아주 익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이었습니다.

그럼 왜 하필이면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했겠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회복시킬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죽어줄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해방시킬 정치적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요한이 아닌데 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표현하고 있을까요?  

지금 요한이 전하는 것은 단순한 예수님의 소개가 아니라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동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안에 죽고 사는 문제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제도를 바꾸고 민족을 해방시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한 인간의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대속의 주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전날 베다니에서 외치며 증거했지만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정녕 메시아가 오셨을 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기대와 상관이 없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죄 많은 인생들은 메시야를 필요로 하면서도 신앙의 방식을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려는 잘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이미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사람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지도 않고, 사람들에 의해서 중단되거나 무시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언제, 어떤 형편에서도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다음날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옳습니다. 복음은 한 두 번의 증거로 중단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이 냉담하게 반응할지라도 예수님이 주되심과 우리의 그리스도 되심은 끊임없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를 위해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코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아니 전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알지 못하고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 눈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바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에 우리의 도리를 다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예수님의 “와서 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은 듣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라나섰습니다. 지금 요한의 제자가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었습니까? 요한이 전한 증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훌륭한 증거의 자세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의 제자가 아닌 자기 제자를 만드는 잘못된 증거자들이 참 많습니다. 이것은 다 강도요 절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가로채는 무서운 도적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라 나선 두 제자는 주님이 계신 곳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계신 곳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이 계신 곳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래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이 어디 입니까? 바로 성전된 내 안에 계십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향남 교회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향남 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인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와서 보고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날 때부터 믿었다고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모태 신앙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 안으로 모셨느냐 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랬습니다. 여기 음성을 듣고 문을 연다는 것은 곧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내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주님으로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고백 위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연다는 것은 예수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 주신 구세주로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택하고 내가 너를 불렀다”
우리는 그 음성을 듣고 와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 모두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본질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죄의 자녀, 저주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 의의 자녀, 복의 자녀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 이마에 성령의 도장이 꽝 하고 찍혀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답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는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자신을 인정하십시오.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그것 때문에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좌절할 것이 없습니다.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근심, 걱정, 패배의식, 좌절감, 이런 것들을 다 던져버리십시오. 나는 보잘 것 없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자요 하나님의 존귀한 자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요 보배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어여쁜 자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이 그렇다는데 왜 나는 아니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거기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다른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만 신분을 바뀌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신분을 바뀌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나와 똑같이 존귀한 자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은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너를 낳고도 너의 어머니가 미역국을 드셨겠지?” 하면서 조롱하지만 바로 그런 자를 위해서도 주님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만 존귀한 자가 아니라 옆 사람도 존귀한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는 자를 누가 업신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와서 보십시오.” 
내 안에 누가 계십니까? 주님입니까? 악한 마귀입니까? 
옆 사람 안에는 누가 계십니까? 주님입니까? 악한 마귀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바 의롭다고 인정받은 죄인입니다. 여전히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의는 내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 십자가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서로를 대하고 서로를 붙들어 주고 서로를 세워나가는 귀한 역사를 함께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 삶의 변화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따른다고 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우리가 알지만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학자들은 다른 한 제자가 요한복음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인 것을 스스럼없이 인정합니다. 요한은 겸손하게도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예를 요한복음서에서 일곱 군데나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데리고 예수께로 옵니다. 예수께서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라는 말은 베드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몬이 베드로로 온전히 바뀌는 과정이 단번에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동생 안드레에게 이끌려 예수를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본업에 종사합니다. 어부로서의 자기의 일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그 갈릴리 바다로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직전까지 밤새도록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했던 참으로 힘이 들었던 날입니다. 힘이 다 빠졌을 것입니다. 수고한 대가가 하나도 없습니다. 

밤을 꼬박 새며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어깨가 축 쳐져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함께 호숫가로 오셨고 시몬의 배에 오르시고 육지에서 조금 배를 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따라온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말을 쭉 듣고 있으면서 베드로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 말씀을 마치시고 난 다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순종하여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단 한 마리도 잡힐 수 없는 시간 잡힐 수 없는 곳에서 두 배에 잠기도록 고기를 잡게 됩니다. 베드로는 너무 놀라서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미 주님이 자기의 이름까지도 바꾸어주셨지만 그는 즉각적으로 따르지를 못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지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죄인됨을 고백하며 주여 나를 떠나시라고 나 같은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죄인일 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몬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기 예수님은 다른 말씀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너 죄인이라는 것 다 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너를 사람을 취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만들겠다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순간 하나님의 거룩한 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특별한 소유가 되었음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로 주님을 따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깨달아야 할 것은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나는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정도로 내가 큰 죄인이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보다 낫다는 말 하지 마십시오. 너 같은 게 무슨 예수를 믿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이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 아이와 똑같습니다. 전혀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해요. 일만 만들어요. 그런데 그런 아이를 어머니는 아버지는 예쁘다고 해요. 그런데 부모도 너무 힘들면 짜증을 내기도 해요. 하지만 영적 어린아이인 우리를 보시는 주님은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으셔요. 보세요. 예수님이 너는 이제부터 베드로라 부를 것이라고까지 하셨는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그 시몬을 예수님이 찾아가시지 않습니까? 주님을 따르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나는 주님을 따를 값어치도 못된다고 하는 시몬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서 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리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비로소 자녀된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아닙니다. 저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는 주님 앞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공개적으로 고백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제 시몬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계기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어영부영 하며 믿던 우리가 철저히 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뭐 좀 하는 줄 알고 서지도 못하고 선 줄로 알고 설쳐대기도 하고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을 다 잃어버리고 좌절감에서 살아가던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또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때 소위 은혜를 받게 될 때 말만의 자녀가 아닌 참된 자녀답게 살아가게 되고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권세를 허락하여 주시고 천국 열쇠를 맡겨주십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다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금방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습니까? 주님 십자가 지신다는 말을 듣고 그건 안 될 말입니다 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고 하는 책망을 듣습니다. 우리역시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후에도 시몬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하라고 그렇게 당부했음에도 기도하지 못하고 잠만 쿨쿨 자다가 결국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지경까지 갑니다. 그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다음에도 얼굴들 낯이 없어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다시 고기를 잡으려 하지를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갈릴리까지 찾아가 다시 그를 세워주지 않습니까? 이윽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난 다음 그가 하나님의 참 제자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눈앞의 누구 때문에 실망하고 분개하고 있습니까?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시간을 두고 변화시켜 나가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조급해하지 마삽시오. 묵묵히 주님을 따르십시오. 누구 때문에 억울해 하지도 분해하지도 마십시오. 그럴 때 시몬이 온전한 베드로가 되듯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진흙에 불과합니다. 나를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어 가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앞에 나를 온전히 맡기십시오. 쓰러지고 넘어지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그러기에 더욱 주님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나뿐 아니라 너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함께 붙들어주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세워나가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하늘 영광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라” 
그 말은 내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희망이 있습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안에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건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수준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점점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점점 온전해져 갑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감사하십시오.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여전히 나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며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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