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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말씀이 더디 올 때 (출 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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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 더디 올 때 (출 32:1-6)

우리는 유사 종교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존 종교는 쇠퇴하는 듯 하지만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고 종교의 기능을 대신하는 유사 종교가 점점 유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비성직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프로에는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위로가 될 만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청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엄청나게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정신적인 영향력을 끼칩니다. 

오프라가 프로 중에 추천하는 책이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이니까. 또 조엘 오스틴이 또 다른 예입니다. 그는 베스트셀러 저자입니다. 그의 책 긍정의 힘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크게 어필했습니다. 그는 목사이지만 그 책의 내용은 순수기독교복음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사고 · 행복을 위한 지혜 · 행복한 삶 이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사라는 말이 반드시 부정적인 말은 아닙니다. 가짜라는 말을 뜻하는 게 아니고 다만 원래 기능을 담당하던 자가 아닌 다른 자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그럴 가능성은 점점 더 많아집니다.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 소설 · 미디어 · 트위터 또 연예인, 가요, 음악 이런 것들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거기에서 카타르시스를 얻고 거기에서 인생의 방향을 배우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고 거기에서 어떤 영혼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었던 매튜 아놀드가 말하기를 ‘종교가 사라지게 되면 시가 종교를 대신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종교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역할을 대신할만한 것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종교보다 더 가까이 있습니다. 더 자극적이고 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쉽고 더 빠르고 더 만족스럽습니다, 적어도 당장은. 사람이 점쟁이를 찾아가면 당장 궁금한 것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아이가 합격하겠습니까. 또 이 사업이 잘 되겠습니까. 그 사람과 제가 잘 맞는 커플이 되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이 옳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가려운 귀를 긁어줄 수는 있습니다. 교회에서 당장 말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우려를 낳는 현상은 많은 사람들, 특별히 젊은 세대가 기존의 질서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 분야에서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정당, 기존의 후보들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다른 곳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3의 정당이 다 그런 것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뿐만 아니라 인생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기존의 지도자들에게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세대로부터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불신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득권이라는 것입니다. 세대 간의 간격이 지금처럼 커진 적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세대를 헝그리 세대라고 불렀다면 자녀의 세대를 엥그리 세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부모의 세대는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자녀의 시대는 열심히 일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부모의 세대에는 하면 된다고 믿었는데 자녀의 세대는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부모의 세대는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할 수 있었는데 지금 세대는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분노가 발생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일 먼저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입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불문하고 포퓰리즘적 공략을 내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폭풍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재정이 파탄이 나든 말든 우리나라가 그리스처럼 되든 말든 일단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보자는 것입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이 같은 문제는 우리나라에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고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지난번 미국 대선에서 멕케인 후보가 미국인들은 불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 한번 했다가 엄청나게 뭇매를 맞았지요. 또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는 자리에서 불평하기보다는 노력해야 된다고 말했다가 욕을 먹었지요. 

사실 이 사람들은 바른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이 바른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리더십의 위기까지 닥쳐오고 있습니다. 정말로 국민이 들어야 될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고 정말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국민이 들어야 될 말은 희생, 노력, 헌신에 대한 말인데 누가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만일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식 때 한 말,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물어보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라.’ 만일 그 말을 지금 이 시대에 했다면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기업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벌어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예술인들처럼 감상에 휘둘리지 않고 정치인처럼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책임 있는 말을 해 줄 수가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기업을 일궈본 적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업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본적인 인생의 규칙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룰은 그대로입니다. 기본적인 열정, 노력, 실력, 근면, 경험, 동기 이런 것들입니다. 뻔한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본적은 룰은 바뀌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룰대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서 다른데서 길을 찾으려고 하니까 엉뚱한 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이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비슷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는 만큼 누가 신속하게 흡족한 해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자꾸 엉뚱한 곳, 이상한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종교적인 분야에서도 기존의 교회가, 기존의 성경이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들이 흡족하게 생각하는 해답을 신속하게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데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 전반에 대해서 유념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는 인간이 주도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이 주제를 정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것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말씀을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시고 우리의 역할은 그것을 기다리고 듣고 신뢰하고 따르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을 거부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이것은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유대인들에게도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방인들과 별로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해답을 요구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이방인과 다름이 없는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해답을 요구하는데 이런 요구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주 매정하게 손사래를 치시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요구한다면 너희에게 해줄 말이 없다. 이런 것을 나에게 물어보지 말아라.’ 매정하지요. 

그러나 그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다른 데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작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도 다른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듣노라면 우리가 대답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노라면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얻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님에게 요구하면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자칫하면 사람이 시험에 듭니다. 

우리는 인스턴트에 너무 익숙하지요. 수도를 틀면 당장 물이 콸콸 쏟아지는 데에 익숙합니다. 그것도 뜨거운 물이요. 식료품을 사고자 하면 슈퍼에 가서 즉시 사면됩니다. 쌀이든 과일이든 즉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쌀이 즉시 자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잊어버립니다. 그 과일이 즉시 자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인스턴트를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인간의 영적인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원하는 때에 얻지 못하면 다른 데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이 침묵하시니까 박수무당을 찾아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예언. 오늘날 포퓰리즘, 선동정치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해답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데에서 해답을 듣고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미래를,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지만 당장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말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1절에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더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더딤. 때로는 백성들이 요구하는 속도를 모세가 맞춰주지 못했어요.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디었어요. 백성들이 그것을 기다리지 못했어요. 백성들은 더 신속하고 더 확실한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뭐라고 말했느냐.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그렇게 해서 아론이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4절에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앞에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성경 최초의 포퓰리스트가 바로 아론입니다. 사람들이 모세 기다리기를 거부하니까 대신 그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이것이 유사 종교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디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었다는 얘기입니다. 

모세가 더디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더디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장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할 것을 요구했어요. 아론은 그런 그들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일어나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그게 당장은 만족이 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금송아지는 거짓 신입니다. 거짓 진리 · 거짓 선지자 · 사이비.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으로 거짓 신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았어요. 

군중은 예나 지금이나 인스턴트한 대답을 요구하고 가려운 귀를 긁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군중의 심리와 여론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군중이 반드시 진리를 소유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러한 군중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론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론이 뭘 몰라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차라리 백성은 몰라서 그렇게 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아론은 알지만 알면서도 거짓 신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무지한 군중보다 더 나쁜 것은 알면서도 거짓을 진리로 포장해서 군중에게 파는 사람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이요, 현혹하는 사람입니다. 충동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을 진리로 포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받을 심판이 더 큽니다. 

반대로 진리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군중이 재촉한다고 진리가 서두르지 않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지체된 것처럼 진리는 한 스텝 늦게 나옵니다. 먼저 뛰어나오는 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호머의 일리아드를 보면 헥토르와 싸우려고 먼저 뛰어오는 사람이 아킬레스인줄 알았는데 아킬레스가 아니었어요. 가짜 아킬레스였어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보면 리어 왕을 사랑한다고 제일 먼저 말한 딸은 거짓말쟁이였어요. 먼저 뛰어나오는 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큽니다. 진리는 서두르지 않아요. 진리가 더디다고 금송아지를 만들면 안 됩니다. 유사 신앙과 참 신앙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유사 신앙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누군가 만든 것이고 참 신앙은 사람이 기다리든 못 기다리든, 사람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나님이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계시하신 진리입니다. 그것이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치를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 눈치 보시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사람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사람이 돈이 많으냐 적으냐,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 이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는 거짓 선지가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사람이 듣기 싫더라도 말하는 사람이 진짜 선지자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진리이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 진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진짜 선지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핍박을 받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도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너무 인기가 있는 것은 수상한 것입니다. 너무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은 수상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기 얻기를 원하시면 얼마든지 얻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건 제자들도 듣고 싶어 하지 않던 내용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제자들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못 자국이 없는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이 아니에요. 십자가가 없는 신앙은 진짜 신앙이 아닙니다. ‘손에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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