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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의 치유사건 - 네 손을 펴라 (마 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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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치유사건 - 네 손을 펴라 (마 12:9-2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었던 모든 인류를 십자가에 대속하시므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시기 전에 질병과 로마로부터 압제받는 무리들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분노를 품기 시작했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분노에 가득 차서 헤롯당과 전략적인 협력자 관계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과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신 사건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범한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다는 당시 규례에 의거하여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로마의 정식 재판 없이 임의대로 사람을 죽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로마법에도 저촉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의를 얻어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지를 의논 한 후에 헤롯당과 전략적인 협력자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당시에 헤롯당은 헤롯 안디바를 지지하는 세속적인 정치적 집단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제국의 통치를 지지하는 친로마파였습니다. 

따라서 다른 유대인들은 그들을 매국노 집단이라고 취급하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바리새파사람들은 율법과 정통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다른 나라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철저하게 배격하였던 애국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바리새인들이 평상시에 원수같이 지내던 헤롯당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전략적인 협력자 관계를 맺었습니다. 

1. 네 손을 펴라(:9-13)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에게 주셨던 창조사역 후에 베푸셨던 안식일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 법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자비'라는 용어를 다른 사람에게 사용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이 '자비'라는 용어는 법정 용어로서 피고인이 법정에서 재판관에게 동정심을 구하는 항변연설을 마무리하면서 선처를 구할 때에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이럴 때에 재판관들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자비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났던 대표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강제 노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에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 되었습니다(출2:23).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므로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던 회당에는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10). 

이 사람이 걸린 질병이 현대 의학적으로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 중에 의사였던 누가는 이 사람의 질병이 오른손이었으며 선천적인 질병이 아니라 후천적인 사고나 질병에 의해서 얻어진 손이 오므라든 상태라고 표현함으로서(눅6:6) 그 처지가 절박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손 마른 질병에 걸린 원인을 외경에는 이 사람은 석수장이였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누가는 그 석수장이가 마른 질병이 걸렸던 손이 노동력의 근원인 오른 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질병으로 인하여 생계수단이었던 석수장이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려는 순간에 바리새인이 송사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손 마른 사람'이 회당에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송사하기위해서 미리함정을 만들어 놓고 심문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 함정을 만들고 송사하는 방법을 함정수사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함정수사를 하게 된 원인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올바른 선행 방법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11,12). 

바리새인들이 송사하려고 심문할 때에 다른 질문으로 그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어떤 마을에 한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지면 누구든지 그 웅덩이에서 양을 잡아 올렸습니다. 

cf). 탈무드에는 동물에 생명이 위급하면 동물을 구출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식물을 주고 다음날까지 지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나 웅덩이에서 건져주는 것이나 바리새인들의 규례에는 노동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을 송사하였던 바리새인들은 그런 행위는 용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중 잣대를 가지고 송사하려고 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반문하셨습니다(12절). 바리새인들은 웅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면서 양보다 귀한 사람에 대하여 자비를 베푸는 일에 안식일 규례를 엄격하게 적용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사람의 생명보다 '재물'을 사랑하다보니 윤리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생명보험을 타기 위해서 부모형제를 죽이는 파렴치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한 생명은 전 우주보다 귀하기 때문에 자기나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이와 같이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안식일 규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가치를 동물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을 올바르게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안식일 규례는 "어느 것이 합법적이냐?"를 생각하였습니다. 그것도 인간이 만든 규례를 기준하였기 때문에 이웃의 어려움을 무시하였습니다. 

다른 병행구절을 보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3:4, 눅6:9)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이 올 바르다고 인정하는 것이요. '아니오'라고 하면 안식일에 '양'을 위해서 선을 행하면서 양보다 귀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한다면 자기들의 규례가 무자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 대답을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안식일에 선을 행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므로 선행을 베푸셨습니다(13). 

예수님께서 한편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네 손을 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자를 치료하신 방법은 예수님께서 그 전에 사용하시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전에는 병자에게 손을 대시거나 깨끗하게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그라졌던 손을 내밀어 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편 손 마른 사람은 손 마른 병을 고치고자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오그라든 오른 손을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폈을 때에 그 오그라진 손이 본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극히 사소한 문제로 한 손 마른 자처럼 위축된 삶을 살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정환경 때문에, 또 어떤 분은 외모 때문에, 돈 때문에 ... 

예수님께서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에게 "네 마음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할 때에 마음에 오그라든 마음에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치료해 주십니다. 내 문제가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 문제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면 문제를 치료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문제들을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나에게 해결되지 못한 마른 손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믿음으로 내어 밀어 깨끗이 나음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 손 마른 자와 같이 마음이 마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조금만 수고하여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고침받고 장애를 극복하며 문제를 해결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상한 갈대(마 12:14-2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심판을 전파하셨기 때문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다투는 것'은 논쟁이나 경쟁을 말하고 '들레는 것'은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수록 다투기 쉽고 들레기 쉽습니다. 그와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다투기를 잘하고 들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대업을 이루시면서 다투거나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어려운 곤경에 처한다할지라도 다투거나 들레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아직도 목소리 큰 사람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세상역사는 다투고 들레는 역사입니다. 

얼마 전에는 행정수도 이전 때문에 다투고 들레더니 후에는 수정안으로 시끄럽더니 요새는 누가 정당에 대표가 되느냐? 어떻게 해야 당을 쇄신하느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다투거나 들레지 않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한 사람을 살리는 일, 한 사람의 영적 지도자를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역사임을 인식하고 다투거나 들레지 말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섬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이 세상에는 많은 풀들이 있지만 갈대는 사람들에게 환영을 못 받는 풀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갈대는 다른 식물에 비하여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풍만 불어도 똑바로 서있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립니다. 그래서 "여자의 마음을 갈대와 같다"라는 노래가 인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 갈대 중에서 '상한 갈대'는 조금만 건들기만 해도 부러져 죽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꺼져가는 심지'는 어떠합니까? 마치 기름이 떨어져서 연기를 내고 꺼져가는 심지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어떤 분은 자의식과 두려움으로 인해, 어떤 분은 열등감으로 인해, 어떤 분은 패배감 때문에, 어떤 분은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어떤 분은 미움으로 인해, 어떤 분은 자기 의와 교만으로 인해, 어떤 분은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 인간은 사단의 펀치에 무방비 상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도 해보지만 변화되지 못한 이기심과 교만의 본성이 드러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날마다 계속하여 같은 죄에 넘어지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은 꺾어버립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은 가차 없이 꺼버립니다. 이것이 적자생존의 원칙, 경제의 기본원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인생들을 꺾지 않으시고 싸매어 치료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천국의 복음으로 싸매고, 성령으로 싸매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 꺼져가는 심지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긍휼과 사랑의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볼 때에 베드로는 혈기와 감정이 풍부하여 힘든 사람이었고, 마태는 이기심으로 냄새가 나던 사람이었습니다. 도마는 사사건건 의심이 많아 힘을 빼는 자였습니다. 약점만 보고 이들을 꺾어 버렸다면 아무도 남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을 싸매어 치료하시며 키우셨습니다. 그랬을 때 이들은 모두 변화되어 위대한 생명 구원역사를 섬긴 인생들의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특별히 과거에 사람들에게 철저히 버림을 받았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메시아이십니다"라고 증거한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언제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까? 20b절에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최후의 심판 때까지"입니다. 이 때까지 인내하면서 소망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확신을 갖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에 "이방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 인생들을 꺾지 않고 싸매어 치료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왜 그렇게 상했냐?""왜 그렇게 연약하냐?"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싸매고 치료하십니다. 우리들도 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서 모든 상한 곳과 냄새나는 죄악들을 깨끗이 치료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본받아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투거나 들레지 말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상한 갈대 같은 사람에게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람을 베푸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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