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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어린양 (요 1: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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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린양 (요 1:29-34)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 유대 광야에 한 기인(奇人)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차림새나 삶의 양식도 특이했지만, “회개하라!”고 정열적으로 외치는 모습이 마치 유대인들이 오래 기다려 왔던 메시아(=그리스도) 같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세례 받고 그를 메시아로 떠받들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 사람 세례 요한은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왕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소임을 철저히 수행한 참 선지자였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 1:23).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요단 강변에 자기를 드러내셨을 때 요한은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향하여 바로 자신이 예고하던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감동적인 모습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그분이 비로소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심을 발견하였습니다. 

요한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이제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울려퍼지기 시작하려는 위대한 순간을 포착했던 것입니다. 그는 감격에 찬 어조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의 이 감격이 오늘 우리의 감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이스라엘의 감동이 오늘 우리 교회의 감동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의 증언 속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명칭과 사역이 매우 간략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단어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더욱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1. 구약의 완성자 예수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이 말은 요단강에 세례 받으러 나온 나사렛 청년 예수가 구약성경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장차 오리라고 예언했던 메시아라고 세례요한이 증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이래 온 세상에 가득해진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는 계속됩니다. 

30절=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예수님은 태어나기는 요한보다 늦었지만, 그는 요한보다 먼저 계신 분이십니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 로 오셨습니다.  

33절=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완성자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의 일생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삶이었습니다. 구약에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탄생,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전생애는 예언되어 있는 삶이었고, 그가 베들레헴에 나신 것은 그렇게 작정되어 있는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여타 성인과의 차이가 여기에서도 분명합니다. 공자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이 50이 돼서야 지천명(知天命)했다’ 고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50세가 되어서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석가는 인도의 왕자로서 인생의 네 가지 문제(四苦)로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6년간의 고행과 수도 끝에 드디어 해탈을 하셨다고 합니다. 두 분 모두 하늘이 주신 자신의 사명을 깨달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천명을 깨달았다거나 새로운 사명을 받아 새출발했다거나 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때가 차매’ 이땅에 오셨고, 예언된 대로 고난을 받으셨고, 하나님의 예정된 뜻을 충실하게 이루셔서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고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심지어 예언된 대로 ‘부자의 무덤’ 에 묻히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그대로 성취한 삶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우리가 바라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완성자로 오신 분이십니다. 성탄의 주님은 단순히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루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인물, 수많은 사건, 수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인명, 지명 뿐 아니라 그 무수한 인간들의 성공과 실패, 인간 사이의 갈등까지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 그리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구약에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그리스도 자체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상징은 완전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는 완전한 분이십니다. 구약의 제사는 임시적인 것이었고 인간적인 제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제사는 단번에 드린 영원한 제사였고 하나님이 하신 신적인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구약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사랑과 경외의 눈으로 성탄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2. 흠 없는 유월절 양 예수

29절=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나아오는 모습을 보고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례 요한에 의해 예수님께 붙여진 이 위대한 칭호 ‘하나님의 어린양’ 은 사도 요한의 기록들에서만 발견되며 다른 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행 8:32)과 베드로의 글(벧전 1:19)에 한번 씩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요한 사도의 기록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이 칭호를 사용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어린양에 대한 독특한 관념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어린양’(헬,암노스; 히,케베스)의 용례는 대부분 희생제물의 문맥에서 나타납니다. 이 명칭에는 다음의 의미가 포함됩니다.

1) 예수님은 어린양이 가진 특징들로 상징되는 특성을 갖습니다. 어린양은 예수님의 흠 없고 죄 없으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와 불의로부터 자유하십니다. 그분의 본성은 흠이 없습니다. 그분의 삶은 완전하십니다. 그분의 행위에는 비난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어떤 약점이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린양이 온유하고 참기를 잘하듯이 예수님은 온유하시며 오래 참으십니다. 그분의 전 생애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 줍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모욕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며 온갖 방법으로 거짓 증언을 할 때에도 그는 온유하며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원수들 앞에서 어린 양의 성품을 완벽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헤롯 앞에서, 그리고 모진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 온유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극치를 보이셨습니다.

어린양의 모든 것이 사람에게 유용하듯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살은 우리의 양식이요 주님의 피는 우리의 음료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의의 옷, 구원의 옷을 입혀주셔서 어린양 혼인잔치에 초대하십니다.

2)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십니다. 주님 오시기 1,50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의 애굽의 종살이를 벗어나 출애굽 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규례를 주셨습니다(출 12:3ff). 이 규례의 핵심은 어린양에 대한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각 가족대로 취하되 흠 없고 1년 된 수컷이어야 했습니다. 4일 전에 취해서 해질 때에 회중 가운데서 잡아 죽이되, 뼈를 꺾지 말고, 그 고기는 불에 구워먹고, 그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 죽음의 천사를 피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죽기 나흘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백성이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피를 뿌리셨고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속죄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보혈은 구속의 피로 역사하여 장차 올 진노를 피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흠 없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어린양으로 오셔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29절에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수난, 그리고 승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지고 가는’(아이로의 현재분사)의 원래 뜻은 ‘지고 간다’는 뜻도 있으나 본절에서는 ‘없이하거나 제거한다’는 의미가 더 적절합니다. ‘지고 가다’는 어휘는 없앴다기보다 단순히 감당한다는 의미가 강하여 다분히 율법적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없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아사셀 염소에게 죄를 지워서 광야로 가게 하거나 제물을 단 위에 불사른 구약의 제사들은 죄를 없이한 것이 아니라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히 10:3,4). 하지만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셨습니다(히 10:10). 

즉, 예수님의 사역은 믿는 자의 죄를 없이하시고 그들을 거룩케 하시는 구속(救贖)의 사역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구속의 사역은 다음의 세 가지 방면에 걸쳐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1) 주님은 순종과 죽음으로써 죄의 저주(咀呪, the curse of sin)를 없이하셨습니다. 

히 9:26=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온 세상은 죄의 저주로 인해 가망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어떤 소망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죄의 저주를 없애기 위해 주님께서 자원하여 죄짐을 지고 나무에 달리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 가 되셨습니다(신 21:23). 그리하여 믿는 모든 자를 하나님께로 이끄십니다. 이를 위해 그가 오셨고, 죽으셨고, 다시 사셨습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계 5:9=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 위에 임할 죄의 저주를 제거해주셨습니다.

2) 주님은 의롭게 하시는 은혜로써 죄책(罪責, the guilt of sin)을 없이하십니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구속(救贖)의 복음은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선포합니다. 그를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짐을 벗고 의롭다 하심을 입게 되며, 우리의 모든 죄는 없이함을 받습니다. 


3) 주님은 성령과 보혈로써 죄의 오염(汚染, the pollution of sin)을 없이하십니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사람의 죄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 더러운 죄를 씻을 길이 없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각 사람에게 적용시킬 때만이 우리의 숯과 같이 검은 죄는 눈같이 희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에 좀 더 민감해져야 합니다. 

“그(성령님)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성령님은 고백하지 않는 죄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적용시키지 않습니다(필립스).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 것은 회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의 회개 없이 죄를 용서하시지는 않습니다(토마스 아담스). 죄는 우리 관점에서 판단되는 것이 아라 성령님의 관점에서 판단됩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우리의 양심에 적용하셔서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하십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주님의 피에 의해 깨끗해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짐을 지고 갈보리로 올라가시던 어린양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받으신 저주는 내가 받아야 할 저주였습니다. 주님이 짊어지셨던 죄책은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님을 보내셔서 나에게 물들여진 죄의 찌꺼기들과 죄의 냄새들을 제거해주시고, 나를 거룩한 성도로 만들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의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의 피는 구속의 피입니다. 할렐루야! 


3.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 예수

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린양(호 암노스 투 데우)’ 이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 선언은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양이십니다. 

사람이 잡아서 제단에 드리던 ‘사람의 양’ 은 그 수가 무수히 많을 지라도 인간의 죄를 완전하게 씻어주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은 흠 없고 점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 아래에서 이스라엘이 무수히 많은 양을 제단에 제물로 드렸으나 이것으로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유일하신 어린 양의 등장으로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임을 바라본 세례 요한은 감격적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의 모든 유월절 양은 사람이 준비한 사람의 양이었습니다. 양을 준비하되, 눈 멀지 않고 다리 절지 않은 온전한 양을 정성껏 준비해야 했습니다. 1년 된 수양입니다. 금년 유월절에 바치는 양은 작년 유월절에 태어난 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유월절 양을 준비하기 위해서 쉬지 않는 정성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준비한 양은 아무리 정성껏 준비한다 하더라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아무리 애지중지 보살펴도 흠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00%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준비는 완벽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는 단 한번의 실패도 없이 완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속주는 완전한 어린 양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례 요한의 흥분한 얼굴 표정, 감격하여 떨리는 목소리를 보고 듣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2절=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탄생하신 날이 다가옵니다. 이제 다시는 아기 예수로 오시지 않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구름을 타고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만,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은 초림때나 재림때나 다를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가까이 온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요한이 가졌던 거룩한 감격을 우리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구약 성경의 완성자로 보았고, 유월절 어린 양으로 보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오히려 더 높은 차원에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육신의 신비로움을 묵상하고 주님의 경이로운 삶을 연구함으로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의 삶은 거룩한 삶이면서 동시에 슬픔의 삶이었습니다. 기적의 삶이면서 동시에 자기 부인(self-denial)의 삶이었습니다.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삶이면서 주님 자신은 고통의 삶을 사셨습니다.

겟세마네의 엄청난 고뇌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고통과 수욕을 묵상함으로 주님을 깊이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쓴 잔을 마시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무한한 고통과 고뇌를 담당하셨고 마침내 승리의 개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지금도 믿는 자에게 성령을 파송하고 계시는 주님을 깊이 바라봅시다.

마지막 날, 주의 날에 온 세상이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계 1:7).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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