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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유를 준비하셨습니까?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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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를 준비하셨습니까? (눅 2:1-7)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맞는 12월에 들어섰습니다. 요즘 사회 분위기가 침울해서 그런지 길거리 풍경이 예년 같지 않습니다. 매년 12월이 되기가 무섭게 거리마다 추리 장식이나 캐럴 송으로 온통 요란스러운데, 금년에는 좀 가라앉은 느낌입니다. 차라리 요란한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성도들마저 썰렁한 분위기에 묻혀 성탄절을 덤덤하게 보낼까 조금은 염려가 됩니다. 

사실 성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입니다. 요1:18절의 말씀처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드을 수 있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좀 더 하나님을 잘 알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창조자가 직접 지구상의 피조물 가운데 한부분인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찾아오신 것이 성탄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6절, 7절을 보시면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이 땅에 메시야가 나셨는데 기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구유에 나셨다”는 것입니다. 호적 하러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온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있습니까?' 하고 이곳 저곳 찾아 다니면서 빈 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배가 불렀고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빈 방이 있기를 원했겠습니까? 하지만 빈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찬 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이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헌 천을 깔고 그 다음에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끓여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여기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마구간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한국의 소를 키우는 마구간과 유대 나라의 양들을 키우는 마구간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정말 냄새는 고약합니다. 양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배설한 그 오물들이 풍기는 악취가 가득하고 천장에는 거미줄이 여기 저기 매달려 있으며 쥐들이 들락거리는, 고약하고 어두침침한 그 마구간을 하나님께서 자기가 출생할 장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엎드려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고, 거기에 눕는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의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더럽고 추악한 곳입니다. 오만 가지 기생충들이 기어 다니는 곳입니다. 그곳에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빈방 하나를 구하기 위해 외치며 다니는 그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우리 인간이 도대체 누구길래 저 구유에까지 당신의 자리를 펴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한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삼기 위해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우리는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1.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베들레헴에는 호적하라는 아구스도의 명령에 따라 호적하기 위해서 고향을 찾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여관에는 방마다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새해 첫날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겠다고 동해안이나 남해안을 찾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동해안에는 여름 휴가철 이상으로 연말연시가 되면 숙박시설마다 초만원을 이루곤 합니다. 유명한 숙박 시설은 오래 전에 예약이 다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작은 여관 같은 곳에는 아예 예약을 할 수 없습니다. 당일에 오는 사람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방을 빌려주기 위해서 여관 주인들이 아예 예약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일 대통령이 새해맞이를 하기 위해서 그곳에 찾아간다면, 그래도 대통령을 위해서 내어드릴 방 하나가 없을까? 대통령이 오신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이 예약한 것을 취소하고서라도 대통령을 위해 방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호텔 주인들마다 서로 자기 호텔에 모시려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 베들레헴에는 만왕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맞을 여관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만왕의 왕이 오셨는데, 그분을 맞을 방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기 여관방 주인은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이 자기 집에서 태어나셨는데도 그분께 경배하지 못하고 왜 만나지 못했습니까?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마굿간 주인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천군천사의 찬양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경배하고 예물을 드립니다. 베들레헴 주변에서 양치기 하던 목자들도 찾아와서 경배를 드리고 갑니다. 

그런데 왜 유독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굿간 주인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겠습니까? 아마 예수님은 그 마굿간에 며칠 동안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와 산모를 데리고 바로 먼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이나 자기 집에 구세주가 누워 계시는데도, 그리고 여러 사람이 메시야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들락거렸는데도 마굿간 주인은 메시야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분께 경배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적으로 무지해서 그런 겁니다. 오직 땅의 것에만 메달리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 마굿간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말세에 나타날 일곱 교회 모습을 보여주면서 항상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3장에서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하십니다. 세상에 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을 모르실리 없는 주님께서 왜 하필이면?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당신이 하시는 말씀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깊이 깨닫고 세기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읽어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리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순종해야 할 자리에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겸손해야할 자리에서 낮아지려는 대신 내 욕심을 채우려는 무서운 자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성탄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의 숫자는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행한 성탄의 자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6개월 먼저 왔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어머니,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아주 평범한, 무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자식이 없어서 외롭게 살다가 이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구를 이끌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 옆으로 밀쳐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데 쓰임 받은 요셉이라는 사람과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10대 후반이거나 아니면 20대 초반의 아주 젊은 나이의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평생 목공소를 경영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여러 마을 가운데서도 그 이름이 끼이지 못하는 아주 후진 곳입니다. 따라서 별 볼일 없는 데서 태어나 그저 한 생 살다가 가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목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 당시에 목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천민 중에 하나였습니다. 남의 양떼들을 밤새 지켜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제 이름 석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식자들이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도 바깥마당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와야 하는 천민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탄생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좋아하던 시므온이라고 하던 선지자와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를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다 초라한 사람들이요, 평생 외롭게 산 사람들입니다. 안나 같은 사람은 결혼하고 7년 만에 과부 된 후고 84년 동안 아무 혈육 없이 그저 성전에서 날마다 심부름이나 해 주고 기도나 하고 먹을 것 없으면 금식이나 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자, 이런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환영하고 기뻐했다 그 말입니다. 모두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천대받는 사람이요,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들이요, 세상에 무슨 소망이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이 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모두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통해서 목자들은 천사를 통해서, 두 노인은 성령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들 메시아가 이 땅에 태어났는데,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에 징조도 없고 계시도 없이 태어나셨겠습니까? 여기 등장한 이 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계시를 받고 그것을 순종함으로 이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축복된 신앙생활,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영적인 안목이 열려지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을 부탁합니다. 엡1:17절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우리는 영적 무지한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주님을 위해 바르게 살 수 없고 바르게 헌신할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2.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이 있을 곳이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무정함 때문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자기 일이 바쁘고 영적으로 무지하다 해도 지금 만삭이 되어 아이를 해산하려는 여인을 문밖으로 내쳐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들의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않는 이 사회야 말로 얼마나 무정한 사회입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그때는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딤후 3장에 보면 말세엔 고통 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때의 증상 가운데 하나가 ?무정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감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이야 어렵게 되든 나만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 삶의 저변에 깔려 있어요.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안전하면 되고, 남이야 춥든 말든 나만 따뜻하고 행복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내 위주로만 삽니다. 이런 마음에 어떻게 예수님이 오실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예전보다도 경제적인 풍요가 있습니다. 또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가는 삶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내면을 보면 황폐화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누리고 있지만, 마음의 빈곤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랑이 점점 메말라져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고 저지르고 맙니다.  

얼마 전에 우리에게 들려온 안타까운 소식이 그런 우리네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고등학교 3학년 아이가 자기 엄마를 부엌칼로 목을 찔러 죽였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시신을 안방에 놔둔 채 8개월을 살았습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문틈에 본드를 바르기도 했고, 심지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그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기까지 했습니다. 이 아이는 공부를 잘 했습니다. 전국에서 4천등 안에 드는 아이입니다. 학교에서는 1-2등 하는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전교 1등이 아니라 전국 1등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심지어는 아들의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고 굶기거나 잠을 자지 못하게 했고, 때로는 골프채와 야구방망이로 아들을 구타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의 슬픈 단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들의 인격이나 삶보다도 성적이 더 중요하고, 아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 하는 것보다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되어버렸습니다. 또 엄마의 잔소리와 공부하라는 성화를 참아내지 못하고 엄마를 부엌칼로 살해하고도 8개월 동안이나 집안에 방치한 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는 아이, 엄마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양심의 소리조차 외면찬 채 친구들을 불러들여 라면을 끓여먹는 비정상적인 인격을 가지고 사는 아이들, 이런 세상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인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돈과 성공이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보십시오. 조금만 이 가련한 여행객 부부, 아이를 낳으려는 이 절박한 모습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얼마든지 따뜻한 방에서 해산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들의 무관심이 그들의 메마름이 결국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유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이 무정함이 2000년 전에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죄와 허물로 죽은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이 성탄은 엄청난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정작 구원의 대상인 인간들은 철저하게 d수의 탄생을 외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간이라도 자리를 펴시면서 까지 이 땅에 오신 이 성탄의 깊은 의미를 안다면, 이 아침!! 우리 역시 우리 마음의 구유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성탄의 깊은 뜻을 깨닫는 1) 영적인 깨달음과 2)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다시한번 알아가야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한파 때문에 이 추위와 함께 떨고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white X-mas니 money X-mas니 해서 좋아하지만 추위에 얼어붙은 날씨에 노숙하는 이웃들에게, 전례 없이 도움의 손길이 끊겨있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가족들이 맞이하는 성탄은 매우 상대적인 허탈감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그때는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번 성탄절은 이웃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연약하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고 나의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일을 생각하며 예수 위해 나의 메마름 때문에, 나의 무정함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 보고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사랑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동성 교회는 성탄을 맞이 할 때마다 지역 주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의 쌀 나눔을 통해 이웃을 섬겼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눈물이 나도록 감사한 것은 우리 성도들의 헌신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넉넉하지도 못한데 자기들이 쓸 것, 누릴 것을 절약을 해서 이웃 사랑에 동참을 하는 모습을 보곤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용인의 장애인 마을에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우들을 돌아보았고, 또 서오능 쪽에 이대 메이퀸 출신의 사모님이 장애인을 자기 호적에 올려 사는 곳에 김장을 해주던 일들, 그리고 태안반도가 기름으로 뒤덮혔을 때, 고통 하는 어민들을 위해서 기름 유출이 일어나자마자 누구 할 것 없이 태안에 내려가서 작은 사랑의 헌금과 드렸고 또 현장에 가서 기름에 쩔은 바위 하나하나를 붙잡고 쌔까맞게 찌든 죽음의 해변가에서 하루 종일 기름을 벗겨내느라 씨름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동대문 쪽방에 가서 노숙자들과 함께 식사도하고 그들에게 겨울을 날수 있도록 쌀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지금 나라가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 사실이지만, 그 여파가 우리의 일상의 삶에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그 작은 일 마져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도 우리 주변에 구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 함께 실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도 마음의 구유를 준비하여 우리의 섬김과 사랑이 이번 성탄절에도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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