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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접 (요 1:11-14, 요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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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 (요 1:11-14, 요 3:16-17) 

안찬호 선교사님이라고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부근에 마사이 족에게 오랫동안 선교하신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쓰신 들어쓰심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소개됩니다. 처음으로 이분이 마사이족을 선교하려고 그 지역을 갔습니다. 그리고 추장을 처음만나 인사하는데 처음만난 사람인데 인사를 했더니 이 추장이 다가와서 다짜고짜로 선교사님 얼굴에 침을 뱉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아무리 선교사지만 당황하고 마음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무식해도 처음만난 사람한테 침을 뱉는 법이 어디있나. 자기도 실컷모아 가래침을 추장의 얼굴에 뱉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제 선교는 끝났다 이런 관계가 됐는데 선교가 되겠나 끝난거죠. 

그런데 침을 뱉는 순간 추장이 다가와서 자기를 와락 끌어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볼을 비비고 그렇게 반가워 하더라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마사이족들은 아주 오래된 지인을 만나거나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입니다. 그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눈물만 흘려도 이분들은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물을 흘린다는 것은 축복을 의미한다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어려운 문화를 잘 이해해서 많은 선교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인사방식이 다른 것 같습니다. 부족마다 다르고 특별히 고양이와 개는 인사방법이 다릅니다. 개는 기쁘면 꼬리를 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기쁘면 꼬리를 내립니다. 고양이가 꼬리를 들고 흔들면 고양이는 화를 내는 것입니다. 고양이와 개는 싸울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도 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방식은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방식입니다. 성탄이라는 것은 거룩한 탄생인데 누가 이 땅에 오셨는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성탄입니다. 성탄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탄을 다른말로 인카네이션, 다른말로 성육신, 혹은 화육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로고스이신 영이신 말씀이신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이 성탄이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놀라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 우리가 성경 66권을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이 성경전체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자마다 멸망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는다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사건은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이라는 말은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기까지 더더욱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정도로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셨다 그것이 바로 이처럼 사랑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너무나 크고 위대해서 그래서 에베소서 3장 18절에 사도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 사랑은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4차원적인 인간의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교회 게시판을 지나가다 보니까 거기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나를 얼만큼 사랑하십니까. 하는 질문에 ? 마크를 붙여 놨습니다. 그 밑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는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을 그려놨습니다.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표현의 최고가 이만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팔을 벌리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을 열어주셨다. 

최고의 사랑은 생명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가 죽을 자리에 내가 대신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저도 많이 회개했습니다. 아내를 대신해서 죽을 수 있을까. 바늘에 찔리것도 못하겠습니다. 부인대신 주사맞으라면 도망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진정한 사랑은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미국에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북군에서 병사들을 차출을 하는데 어느 시골마을에 병사들을 차출하게 되었습니다. 몇 명을 뽑아야 하는데 할 수 없이 징병관이 추첨을 했습니다. 뽑게 되어서 어떤 청년이 뽑혔는데 결혼도 했고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젊은이입니다. 만약 이 젊은이가 없으면 이 집은 생계가 어렵습니다. 너무 안타까워 하니까 결혼을 하지 않는 친구가 이보게 자네대신 내가 전쟁에 나가면 안되겠나. 그 징병관에게 사정을 했더니 그 징병관이 허락을 했습니다. 이 친구가 대신 전쟁에 나갔습니다. 고향에 남은 친구는 자기대신 나간친구를 위해 매일 기도합니다. 그리고 전쟁터에 어려운일이 있을때마다 그 친구가 부상당하지는 않았을까 늘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큰 전투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전사자 명단을 봤더니 자기대신 나간 친구가 전사자 명단에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가슴이 내려 앉습니다. 무너지는 듯한 가슴을 끌어안고 그는 전쟁터에 가서 그 친구의 시신을 수습해서 자기 고향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가족 공동묘지에 그 친구를 잘 안장합니다. 그리고 비석을 세웁니다. 비석에 그렇게 썼습니다. 그는 나를 위해 죽었다. 

내 대신 죽는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분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에 앞서 희생당하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달려야 될 십자가에 내가 죽어야 될 죄에 죄값의 자리에 주님이 내 대신 거기에 달리신 것입니다. 

오늘 이 놀라운 사실을 요한복음 3장 14절 15절에 기록해 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말씀은 민수기 21장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가다가 너무너무 불평거리가 많았습니다. 불평하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그러다보니까 하나님의 인내도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백성을 징계하시는데 불뱀을 보내셔서 불평하던 사람들을 불뱀이 물게 했습니다. 

불뱀에 물리니까 다 시름시름 앓다가 다 죽어가는 것입니다. 수만명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앞에 나가서 이 백성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네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 끝에 매달아라. 그러면 그 뱀을 백성들이 쳐다보는자마다 치료가 되고 살아날 것이다. 놀라운 방법이였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였습니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끝에 매달아 놨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백성들을 향해서 저 놋뱀을 바라보십시오. 저 장대끝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살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가운데 놋뱀을 바라보고 그들이 신기하게 치료되기 시작했습니다. 다 치료 받았는데 그것도 말안듣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살지 못했습니다. 그 장대 끝에 매달린 놋뱀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놋뱀을 바라보는자가 치유받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죄로인한 내 모든 죄가 용서받고 내 영혼이 건짐받고 거듭날것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분이 내 인생을 구원할 줄 알고 내 구원의 주로 알고 그를 의지하고 그를 기대하고 그를 염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니까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그를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길은 간단한 것입니다. 거기에 학벌이 필요없고 물질이 필요없습니다. 권세가 필요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고 치유받았듯이 우리 영혼이 치유받는 길은 영혼이 사는 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의지할 때 우리는 구원의 길로 나갈 줄 믿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다 믿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다른말로 성경적으로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 12절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2절에 뭐라고 합니까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접이라는 말고 믿음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곧 영접입니다. 

국어사전에 영접이라는 말을 찾아보니까 손님을 자기집에 모셔들이고 대접하는게 영접입니다. 제가 교인들가정에 좋은일도 있고 나쁜일도 있고 어려운일도 있고 심방을 가면 저를 집밖에 두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집에 있으시면 얼른나오셔서 목사님 추운데 심방을 오셨네요 하면서 빨리들어오세요 하면서 물이나 커피한잔 대접하십니다. 그게 바로 영접입니다. 그러나 만약 집밖에 세워놓고 거부한다면 그건 영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했다. 이게 성경에서 발견하는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자기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땅에 주인이시고 왕이신 그분이 오셨는데 자기백성이 그분을 거절하고 거부했습니다. 그 얘기는 바꿔말하면 제가 오늘 예배끝나고 집에 갔더니 우리 집사람하고 아들들하고 짝짝꿍해가지고 문을 안열어 줍니다. 당신은 이제 남편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족을 거부하고 남편이 아내를 거부하고 아내가 남편을 거부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때로는 자식이 부모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왕되신 그분을 거부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버림받았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날, 아무도 그를 위해 방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육신적인 어머니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호적을 하러 갔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명절이어서 방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 6절에 보면 거기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곳이 없음이러라. 권력자나 돈 많은 사람이 갔으면 여관에 방하나쯤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는 방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을 위해서 아무도 방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왕의 왕이신 그분은 말구유, 말 먹이통, 소똥냄새나고 말똥냄새나는 그 마굿간 말 먹이통에 강보, 천에 싸여서 뉘였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따뜻한 방에서 아기를 낳고 산모가 몸조리하지 말구유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영접받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헤롯대왕은 메시야의 탄생소식을 듣고 자기자리를 빼앗길까봐 그는 베들레헴 지역에 2살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그 예수님을 안고 애굽까지 가서 피신해 있었습니다. 피신했다가 다시 안정되어 갈릴리 나사렛에 와서 생활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장하시면서 공생애 3년을 보내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하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니까 예수님이 거라사지방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자유케하고 귀신떼들을 돼지떼에게 넣었더니 돼지떼들에게 들어가서 수천마리가 죽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당신 우리동네를 떠나라고, 영접받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 고향을 찾아갔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빈정대면서 저기 마리아의 아들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고 하면서 저 형제가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그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은 고향에 머물수 없이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신 유명한 말씀이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을 수 없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동네로 지나가려 하셨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자기 제자인 가롯유다에게 배척당하셨습니다. 거절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에게 결국은 영접당하지 못하고 그 백성이 예수님을 로마 병정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그 얘기는 바꿔말하면 우리의 왕을 우리의 주인을 못박으라는 것입니다. 그 무지한 사람들의 외침속에서 예수님은 영접받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죽은자 가운데에서 사흘만에 일으키셔서 영원한 부활의 구주가 되게 하신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섭리입니다. 인간들은 그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주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님을 영접할 성탄의 준비가 되고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구유를 비워놓으셨습니까. 내 마음속에 미움과 증오를 다 털어내셨습니까. 그리고 깨끗한 방에 주님을 모셔야지 않을까요. 하다못해 담임목사가 대 심방을 간다하면 교인들이 청소안하던 분들도 3일전부터 닦고 어떤분들은 도배도 새로해놓고 그렇던데말입니다. 

어떤분은 탁자에 꽃도 한송이 놓고, 목마를까봐 물도 한 컵 놓고, 그렇게 정성을 다해 심방을 받고 담임목사를 기다리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데 여러분의 마음의 구유를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주님을 믿고 모셔드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의 신분이 바뀌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믿고 영접해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죄의 종, 마귀의 종이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앞에 나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자녀들이 특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저는 우리 애들을 보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애들이 한번도 아침에 제가 출근하는데 아빠 정말 미안해요 저를 초등학교까지 졸업시켜주시고 중학교까지 학교도 보내주시고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켜주시고 책을 사야하는데 만원만 주실 수 있는지요. 이런 아들을 본적이 없습니다. 대학까지 졸업해도 아빠 돈줘요. 맡겨놨냐? 아빠가 낳았으니 책임지셔야죠. 자식들은 얼마나 뻔뻔한지 모릅니다. 무슨 맡겨놓은 것을 달라하듯이. 더구나 결혼한다고 해보십시오. 아빠에게 아무런 피해 안드리고 조용히 벌어서. 이런 아들을 봤습니까. 아빠 결혼하면 집도 필요한데 어떻게 할거에요? 집까지 달라합니다. 그게 뻔뻔스러운 자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나가서 당당하게 우리의 하나님앞에 요구할 수 있는게 자녀의 특권입니다. 이 자녀의 특권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영접하느냐 이 땅에 주님이 오셨을 때 주님을 영접했던 자들이 있습니다. 동박박사들, 동방에서부터 와서 어린 아기 예수앞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내어놓고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리고 들에서 밤새워 양치던 목동들이 천사들이 와서 이야기합니다.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구주가 나셨다 목동들이 그 말을 듣고 달려가서 말구유에 가서 아기 예수를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비엔나에 로렌스라는 유명한 박사가 있습니다. 이분이 시키고에 있는 백만장자의 딸을 수술을 했는데 무혈수술 피를 흘리지 않고 수술을 해서 성공적으로 죽을뻔한 딸을 살려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토픽뉴스가 되었습니다. 로렌스박사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렌스박사에게 수술받기를 원하지만 그 많은 사람 수술을 다 할 수없습니다. 

어느날 미국에 의학협회 세미나가 있어서 로렌스박사가 참석을 했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혼자 수행원들도 다 떼어놓고 혼자 야외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쉬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마침 장마비가 쏟아져서 옷을 다 적시게 되었습니다. 갈수도 없고 해서 어느집 처마밑에서 거기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밤이 되니까 추워지고 덜덜 떨리는데 견딜수가 없어서 염치불구하고 농가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추워서 못견디겠는데 몇시간 머물다 비가 멈추면 돌아가면 안되겠습니까. 그랬더니 안에서 험상궂게 생긴 여인하나가 나왔습니다. 얼굴이 어둡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매몰차게 우리집에는 지금 너무 복잡한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른데에 가서 알아보십시오. 귀찮게 하지 마세요. 하고 문을 탕닫았습니다. 로렌스박사는 어쩔수 없이 그 밤에 추위에 떨다가 새벽녘에야 비가 멈춰서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조간 신문을 받아 본 농가의 여인은 기절초풍할뻔 했습니다. 자기딸이 지금 중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이 딸을 살릴 수 있는 길은 피흘리않고 수술할 수 있는 로렌스박사에게 수술받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렌스박사를 얼마나 만나기를 사모했고 얼마나 그를 염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로렌스박사의 얼굴이 조간신문에 나와있는데 어젯밤에 와서 덜덜 떨다가 간 그 사람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사모하던 그 사람이 자기 집앞에서 밤새도록 떨다가 돌아갔는데 자기는 그걸 모르고 매몰차게 냉정하게 그를 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접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너무나 황급해서 그에게 편지를 보내고 면회요청을 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가 아무리 집안이 복잡하기로서니 딸이 아무리 병으로 죽어가기로서니 지나가던 나그네에게 따뜻한 사랑을 한번더 베풀었다면 그 가정에 어떤일이 있었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도 우리는 이런 저런 핑계로 인해서 마음을 닫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모셔들일만한 마음의 공간이 준비되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위한 열린 마음이 없습니다. 미움과 증오를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준비가 안된 겁니다. 성탄준비가 하나도 안된 것입니다. 트리 장식되었다고 성탄준비가 된게 아닙니다. 

윌리엄 홀맨헌트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세상의 빛이라는 성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넝쿨이 우거진 집 앞에서 대문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손에는 등불이 있습니다. 머리에는 밝은 광채가 비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심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집앞에는 잡초가 무성합니다. 한번도 사람이 다녀본적 없는 문이 열려지지 않는 문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문을 노크하고 있는데 그 문은 자세히 보면 밖에 고리가 없습니다. 밖에서는 열수 없는 문입니다. 오직 안에서만 열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말씀처럼 오늘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성탄의 계절에 우리를 향해 노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내 마음에 모셔들일 때 주님은 나와 동거하시고 동행하시는 축복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성탄에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 뿐만아니라 우리의 이웃을 향해서도 마음문을 열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자로 오셔서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나눕니다. 양은 구원받을 사람들이고 염소는 멸망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양들 구원받을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이하에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니까 양떼들이 그럽니다. 우리가 언제 마실것을 드렸고 입을것을 드렸고 주님을 영접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장 작은자, 외롭고 고독한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그러셨습니다. 물론 지나가는 행인들, 걸인들이 다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우리의 소외된 이웃들을 마치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사랑을 나누고 그들을 향해서 마음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성탄에 다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마음의 구유를 활짝 여시고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이 부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소외되고 고독하고 외로운 우리의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내 마음속에 영접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이 우리 삶속에서 드러나고 또 실천되어지고 평화의 성탄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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