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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에 이끌리는 세대 (눅 1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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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이끌리는 세대 (눅 13:18-21)

목적에 이끌리는 삶, 또 목적이 이끌리는 교회라는 문구는 릭 워런 목사가 개발해서 대중화시킨 것입니다. 정말로 이상적인 삶은 목적에 이끌리는 삶이고 정말로 이상적인 교회는 목적에 이끌리는 교회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는 목적에 이끌리는 사회라고 말할 수 없고 그 대신 두려움에 이끌리는 사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무엇에 이끌리기는 이끌리는데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목적에 이끌리는 게 아니고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두려움에 이끌려서 삽니다. 

자녀교육 문제에 있어서 가장 현저하게 이것이 나타납니다. 부모가 자식을 닦달하는 이유는 무엇을 만들이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안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지가 안 되게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고 낙오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에 비교해서 뒤지는 것, 낙오되는 것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이 부모들의 심리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취업난도 아니고 88만원 세대도 아닙니다. 두려움입니다. 낙오자가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인생의 어려움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경제신문에 며칠에 걸쳐서 국내 기업인 · 문학인 · 지도자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대화하는 내용의 기사를 주의 깊게 읽어보았는데 이분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라! 인생을 부딪쳐라!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라! 동기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가 좀 어렵다 하더라도 한국전쟁 직후보다 어렵겠습니까. 보릿고개를 겪을 때보다 어렵겠습니까. 오일 쇼크 때보다 어렵겠습니까.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때도 많았는데 그것을 우리는 극복해 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정도의 어려움을 가지고 두려워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은 젊은 계층뿐만이 아니고 인구 전체가 마찬가지에요. 우리 인구의 40가 계층 상승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여론 조사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잘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얘기인데 소위 부익부 빈익빈, 빈부격차, 계급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상민 간의 건널 수 없는 격차가 있던 시대였습니다. 남자와 여자 간에 건널 수 없는 격차가 있는 시대였습니다. 거기에 비교하면 우리는 엄청나게 바뀐 것입니다.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 이런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일단 용이 되보고 그 말을 해보라고 하세요. 용이 될 만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제가 듣겠는데 용이 될 것도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용이 될 만한 사람은 어디든지 찾기 어렵습니다. 개천에만 없는 게 아니고 다른 데에도 없습니다. 이건 용이 될 만한 인물도 아니면서 불평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거기에만 그치는 게 아닙니다. 젊은 미혼 여성 사이의 고요한 두려움을 저는 감지합니다. ‘이러다 시집 못하는 거 아닐까?’ 나이가 한 살 씩 먹을수록 그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집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입니다. 인구의 절반이 남자라는 사실. 오히려 남자가 더 많습니다. 눈에 차는 남자가 없을 수는 있지만 남자가 없는 게 아닙니다. 조금만 눈을 낮추면 쎄고 쎈 게 남자입니다. 강남의 커피숍에 앉아서 남자가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남자가 있는 울산이라든가 포항이라든가 거제도라든가 이런 데를 가면 거기는 여자가 없다고 야단이에요. 

사람이 두려워하는 한은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의 눈동자를 보세요. 정함이 없습니다. 불안정합니다. 두려워하는 짐승과 비슷합니다. 두려워하는 짐승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사냥을 하는 사자를 보면 멀리 쳐다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디로 달릴지를 생각합니다. 사자는 처음부터 달리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사자가 뛸 수 있는 시간이 40초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0초 안에 승부를 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힘을 배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한 목적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한은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을 접할 때 왜 스스로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자신의 신앙의 가능성과 능력에 대하여 좀 더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할까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왜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의 가능성에 대하여, 결과에 대하여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신앙으로 사는 비결을 저는 두 가지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장기투자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장기투자. 원래 제대로 된 투자는 장기적인 것입니다. 단기 투자는 투자가 아니고 투기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량주를 사서 한 삼십 년 동안 묻어두면 돈을 못 벌 사람이 없습니다. 우량주라면. 부동산을 사서 한 삼십 년 동안 갖고 있으면 돈을 못 벌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기다리지 못합니다. 단타를 합니다. 그래서 일주일 사두었다가 오르지 않으면 팝니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입니다. 

장기투자의 원리는 돈뿐만이 아니고 모든 일에 적용됩니다. 포도주. 오래될수록 값나가는 게 포도주가 아닙니까. 신앙도 장기적인 것입니다. 신앙도 장기적으로 내다봐야 됩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당장 변하는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저희 교회가 십일 년이 됐는데 십일 년 동안 과연 성도들이 얼마나 변했을까. 그건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십일 년은 짧은 기간입니다. 한 삼십년, 오십년, 백년, 오백년을 내다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천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이천년이 됐는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놀라운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지요. 그러니까 단기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예수를 믿어서, 우리 집이 교회를 다녀서 당장 무엇이 달라졌느냐? 당장 보면 달라진 것을 보기가 어렵지만 그것을 좀 더 장기적으로 오십년, 백년, 천년, 이천년을 보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교하시고 누룩에 비교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왜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승천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만일 예수께서 장기적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면 떠나가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맡기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오래 살아서 모든 것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삼년 반만 목회하시고 떠나가셨어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기독교가 이처럼 부흥할 수 있었던 비결이 제자들의 능력에 있습니까? 제자들의 인격에 있습니까? 그들의 헌신에 있습니까? 아니에요. 제자들이 어떠한 사람이었던 간에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일뿐. 제자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사람이에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에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특별했기 때문에 교회가, 기독교가 이처럼 부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는 누룩과 같고 겨자씨와 같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땅에 심기면, 그것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면 그 사람이 어떠하든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야만인이든 문명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말씀이 사람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은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두고두고 보면 그것이 나무가 자라나듯이,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듯이 전체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고 계셨고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일찍 떠나가신 것은 예수님의 실패가 아니요, 예수님의 실수가 아니요, 예정된 것이요,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이요, 계획하신 것이요, 알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이건 엄청난 영향력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는 압니다. 인간의 정신과 문명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가라지도 있지만 그렇지만 기독교가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목사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저는 그렇게 장기적으로 내다볼 여유가 없고, 저는 당장 임대료를 내야 되고, 당장 우리 아이 결혼 시켜야 되고, 우리 아이 대학 보내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고 당장 급한 일이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예배 끝나고 나가시면 떡이라도 드셔야 되고 커피라도 마셔야 되는 것 다 압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다만 우리는 굳이 신앙과 관계된 것이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교육,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백년을 내다보고 교육한다는 얘기입니다.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또 결혼, 인간이 장기적으로 내다보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뭣 하러 결혼합니까. 그냥 동거하고 살지. 그러나 가정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가문에 대하여 장기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장기적인 믿음이 있지 않다면 결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친구도 장기투자입니다. 당장 놀기 위한 친구가 아니고 앞으로 살면서 두고두고 서로 벗이 되고 도움이 되라고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장기적인 해법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결코 하지 않을 일들도 있습니다. 그 하나가 빚을 지는 것입니다. 지금 빚을 지는 것은 장기적으로 내가 갚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장기적으로 돈을 갚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빚을 지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지요.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도 장기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지 지금 오염시키고 내일은 난 모른다, 그건 미련한 사람이지요. 

이처럼 신앙에 관계되지 않은 일일지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는 것처럼 신앙도 그런 것입니다. 신앙은 지금 당장 좋은 것을, 그것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만약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원한다면 신앙처럼 불편한 게 없습니다. 차라리 신앙 없이 내 뜻대로 세상 즐거운 대로 사는 게 낫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것은 적어도 내세를 내다보기 때문이요, 영생을 믿기 때문이요, 그것뿐만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고 내 말을 따르는 자는 천대까지 복을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단기적으로 유익을 준 것보다는 장기적으로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만들어지고 그 혈통을 좇아 메시야가 태어나고 그리고 메시야를 통하여 온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까지 내다봤어요. 하나님이 하늘의 별을 보여주신 목적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의 믿음으로 그 믿음이 두고두고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아브라함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수천 년 전 중동의 이름 없는 어떤 아저씨의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유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이 믿음으로 당대에 열매를 거둔 것뿐만 아니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이 되고 그의 혈통이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혈통을 좇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믿음의 효과를 당장 결과로만 판단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멀리 내다보아야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당장 혜택이 있나? 이건 소인배나 하는 이야기이고 예수는 내가 믿지만 혜택은 자식이 받는다, 후손이 받는다, 남들이 받는다, 이런 식의 넓은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깡패를 만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구원은 네가 받았다.’ 이 말은 ‘내가 만일 예수님을 안 믿었으면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게 믿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믿지만 혜택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받게 돼 있어요.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지만 그 혜택은 앞으로 두고두고 오게 돼 있습니다. 이게 믿음의 능력이에요. 

그리고 신앙으로 사는 또 하나의 비유는 줄을 잘 서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대해서 이런 말하기를 좋아하지요. ‘당신들은 줄을 잘 서서 잘 살고 우리는 줄을 못 서서 못산다.’ 누가 줄을 잘 못서라고 했습니까. 그때는 그게 옳은 줄 알았겠지요.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제라도 북한이 줄을 다시 서지 못하는지 저는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줄을 선다는 말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마치 누구를 의존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지만 우리가 만일 부자에게 줄을 선다든가 권력자에게 줄을 댄다든가 심지어 어느 특정교회에 줄을 댄다든가 그건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줄을 대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줄을 서서 일찍 주님을 따르고 일찍 주님을 알고 주님에게 충성하고 나와 내 집은 주님을 섬기겠노라 일찍 믿음의 삶을 선포하는 것, 그건 정말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그가 멕시코 만에서 새우 잡이로 돈을 벌어서 어느 과일회사에 투자했다고 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에게는 그게 과일회사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회사 로고가 사과였기 때문에. 애플 회사였어요. 그게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80년대는 아직 애플이 작은 회사였는데 그 주식을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되시지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줄을 대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작게 시작해서 점점 좋아집니다. 멀리 봐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바라봤던 것처럼 우리는 멀리 내다보고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됩니다. 할렐루야! 

믿음대로 됩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소극적으로 갖고 있지 말고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게 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위하여 역사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 때 그 믿음의 위력을 경험할 것이고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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