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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낳고 낳았더니 희망! (마 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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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고 낳았더니 희망! (마 1:11-17)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저녁 9시 뉴스에 나올 소식 말입니다. 

설악산의 흔들바위를 아시죠? 흔들리기는 하지만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흔들바위 말이죠! 소식에 의하면 일본의 스모 선수 세 명이 힘을 자랑하느라고 흔들바위를 굴려서 골짜기로 떨어드렸답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난 천하장사 출신인 이만기씨와 강호동씨가 골짜기로 떨어진 흔들바위를 들어서 다시 제 자리에 올려놓았답니다. 그래서 흔들바위가 제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다른 소식에 의하면, 일본의 스모 선수들이 흔들바위를 흔들어서 골짜기로 떨어뜨릴 때에 이런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뻥이야!”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 보아야 합니다. 이야기의 목적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면 웃으면 됩니다. 심각하지 않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들으면 심각해집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이야기라면 올은 이야기인지 그른 이야기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보를 전하는 이야기라면 사실인지 아닌지를 먼저 파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은 그 말씀의 목적을 파악하고 어떻게 순종하여야 할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족보는 엄청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 하나에도 많으면 수 백 수 천 가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에 관련된 내용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나 이 족보에서 다윗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많으나 이야기하려는 목적은 간단합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는 결론의 통하여 내용을 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첫째 시대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였습니다. 여기에서 결론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야기는 다말과 라합과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기록함으로 그 바탕이 진흙 밭이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진흙에서 피어난 한 송이의 백합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대는 다윗으로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로 그 결론은 바벨론 포로입니다. 성적으로, 지적으로, 심적으로, 공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하여 포로로 잡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악의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험악한 세상에서 피어나셨습니다. 이제 세 번째 시대는 바벨론 포로에서 예수님의 탄생까지로 결론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악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바벨론 포로와 포로에서 회복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1절 말씀입니다.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남의 나라로 포로가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성적으로 타락하여 남의 아내에게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지적으로 타락하여 더욱 어리석어졌습니다. 심적으로 타락하여 교만하였습니다. 공적으로 타락하여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하여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포로로 잡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의 첫 번째 의미는 

I. 징계로 정화하심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징계하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깨우치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징계 받고 고통스러워서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고 다시 받아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를 반드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역대하 36장 17절 말씀입니다.

(대하 36:19)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 그들의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들의 모든 귀한 그릇들을 부수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성전을 아끼어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어 외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습니다.(대하 36:15-16)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들을 바벨론 왕의 손에 다 넘기셨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칼로 청년들을 죽였습니다. 노인을 죽였습니다.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으로 선택된, 솔로몬의 성전에서 이런 살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성전인데 그 성전에서 힘없는 연약한 자들이 죽었습니다. 성전이 의지할 곳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성전의 모든 크고 작은 그릇들과 각양 보물들도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불살라졌습니다. 사람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은 영원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키지 않은 범죄에 대한 심판이요 징계였습니다. 그리고 그 징계는 철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라도, 영원히 그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성전이라도 더러워지면 버리십니다. 한 때, 놀랍게 쓰임 받던 교회라도 더러워지면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 2천년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중세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한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버린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징계하심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여 정결한 사람,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음으로, 12절 말씀입니다.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비록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지만 그들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그 끝이 타락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절망 속에도 그 끝이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징계 속에도 또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II. 안식을 준비하심입니다.

성경은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역대하 36장 21절 말씀입니다.

(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여기에서 성경은 바벨론 포로를 안식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바벨론 포로는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는 기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는 심판의 때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심판 받는 자리에 영원히 버려두지 않고 회복되는 분명한 소망을 보게 하셨습니다. 황무한 토지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며 새로운 경작을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정화되고 정결케 되어 새로운 시대인 메시아를 대망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을 아십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던 요셉입니다. 그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그가 그의 형들보다 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미움을 받아 노예가 된 것도 억울한데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갇혔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런데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물론 요셉에게 감옥은 결코 즐거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창 40:14). 그러나 그는 그를 도와주어야 할 사람의 도움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만 이 년을 감옥에서 더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은 정말로 그의 인생을 허비한 기간이었습니까? 요셉은 나이 삼십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창41:46). 이처럼 고속승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에게 감옥 생활은 애굽의 문물을 익혀 총리의 직무라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감옥은 고통스러웠으나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징계의 기간이 늘 유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고난의 결과가 모두 아름답게 보상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하여서도 우리를 새롭게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포로 기간을 통하여 사람을 징계하셨지만 그 땅을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징계라고 느끼는 그 일을 통하여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새로운 일을 발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 13절 말씀입니다.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바벨론 포로는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인간 다윗의 혈통을 받는 왕의 계보는 끝이 났습니다. 다윗의 왕국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간은 무려 7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70년이 이르러 스룹바벨이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솔로몬의 성전 또는 제1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스룹바벨이 포로에서 돌아와 지은 성전을 스룹바벨의 성전 또는 제2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의 의미는 허물어진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버리시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70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III. 교회를 세우려 하심입니다.

바벨론 포로기간은 철저한 징계의 기간이었습니다. 징계 중에서 가장 큰 충격은 솔로몬 성전의 파괴였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성전까지 무너지게 하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자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히 버리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지만 영원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역대하 36장 23절 전반절말씀입니다.

(대하 36:23a)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우리는 여기에서 바벨론 포로기간 70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70년이란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기간입니까?

유대인들은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고, 세 차례에 걸쳐서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계산이 복잡해집니다. 어느 때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기간이 들쑥날쑥합니다. 주전 605년 1차 포로에서 538년 1차 귀환을 계산하면 67년입니다. 67년은 대략 70년이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70년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전파괴(586BC)에서 성전재건(516BC)까지의 기간이 정확히 70년입니다. 스룹바벨은 포로에서 돌아와 바로 성전을 다시 짓은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방해를 받아 오랫동안 성전 건축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무너진 해로부터 70년이 되는 해에 드디어 성전은 재건되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왕이 두 눈이 뽑혀 포로로 잡혀가는 정치적인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재건된 성전은 첫 번째 성전에 비하여 초라하였습니다. 영광스러운 재건이 아니라 초라한 재건이었습니다. 과연 눈에 보이는 성전이 무너지고 눈에 보이는 또 다른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두 번째 성전은 헤롯이 지은 세 번째 성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헤롯의 성전은 예수님께서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결국 70년 로마군에 의하여 무너지고 지금까지 다시 세워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성전이 무너지고 예수님 자신의 몸인 교회가 세워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 포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일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는 일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허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 예수님을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솔로몬의 성전을 대신하여 이 땅에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은 예수님의 몸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들이 교회를 우습게 여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한 해가 가기 전에 가장 먼저 회개하여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교회를 욕되게 하였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슴을 치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성전을 바벨론 군대의 발에 짓밟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참고 참으시던 하나님이 마침내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보다도 더 두려운 일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현대 교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건물의 크기와 화려함으로 자신들의 교세를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미 일부 교회들은 인간의 공동체 모임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무너지게도 하시지만 다시 세우시기도 하십니다. 다시 세우기도 하지만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들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16절 말씀입니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드디어 결론에 도착하였습니다.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족보가 좀 이상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태어났는데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족보로는 분명히 다윗에게서 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법적인 족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혈통 상 요셉과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계산이 아닌 하나님의 계산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요셉의 족보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상을 통하여 보이지 않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 보이지 않은 천국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은 단순히 성전을 재건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땅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을 세우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은 궁극적으로 


IV. 천국을 바라보게 하심입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하고도 사람의 지혜로 헤아리기 어려운 결론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늘을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면 나라를 되찾으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포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진정한 나라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려 의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 말씀입니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의 나라는 분명히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이 영원한 나라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이 땅에서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이 땅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벨론 포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면서도 새로운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포로기는 안식이며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솔로몬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있다고 여겨질지라도 하나님께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희망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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