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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님은 누구신가? (사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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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사 9:1-7)
 

1. 이름이 나타내는 것

한글판 브리태니커 사전은 “이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개체를 特稱하는 ‘고유명사’인 이름은 모두 9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人名 즉 사람의 이름이고, 두 번째는 동물이나 擬人化된 사물을 지칭하는 준 인명, 세 번째는 의인화되지는 않았지만 유의할 만한 이름, 地名, 단체나 회사명, ‘모나리자’나 ‘실락원’ 같은 예술 작품의 이름, ‘갤럭시’이나 ‘아이폰’처럼 상표명, 성탄절이나 중세와 같은 역사적 사건이나 중요한 시대의 이름, 그리고 民主主義나 王政主義 같은 개념, 이념, 혹은 사상의 이름 등이 그것입니다. 

그 중 첫 번째인 사람의 이름을 살펴보면요.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까지 일반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왕을 비롯한 귀족들까지도 성(姓) 없이 이름만 있었습니다. 고려 중기인 1055년 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법령이 공표되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지식층 가운데 상당수가 성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성과 이름이 漢字式으로 합쳐진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서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도 常民이나 賤民들의 이름은 한글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아이들의 이름을 순 한글로 짓는 것은 조선시대로 하면 상민이나 천민들의 이름 짓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런데요! 성경은 이 이름에 대해 대단히 관심이 많았고 또 민감했습니다. 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까요? 여러분, 아담의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이 성경원어로 “아담”입니다. 그리고 이 “아담”이라는 말은 흙이나 토지를 뜻하는 ‘아다마’라는 말과 ‘붉다’는 뜻의 ‘아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실 것을 계획하시고, 그 이름을 흙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 빛깔이 붉은 것과 관련하여 지으신 이름이 “아담”이라는 것이죠. 그 다음, 이름과 관련한 두 번째 기록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을 지으신 후 아담이 그 이름을 짓는 모습에서 입니다(창2:18,19). 

그리고 세 번째 기록은 아담이 그 부인의 이름을 짓는 것인데, 창세기 2장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아담은 자기 부인의 이름을 “여자”, 성경원어로 “잇샤”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하와와 아담이 犯罪하여 타락한 후, 아담이 부인 이름을 改名했는데, 개명해 준 이름이 “하와”입니다. 

이 “하와”의 기본적인 의미는 ‘생명’인데요. 아담이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를 범하여 타락한 인간이 장차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회복되리라는 말씀을 하실 그때(창3:15,16) 아담은 자신과 하와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으나 이제부터 이 땅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자신과 자기 아내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의 이름을 ‘모든 생명의 어미’라는 뜻으로 “하와”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름 이야기를 하니까 말씀드리는데, 제 이름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창세기 2장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물론 이 創設과 제 이름은 한자도 뜻도 다릅니다만, 그래도 성경에 제 이름이 있다는 게 어딥니까! 제 이름은 항렬이 첫 글자에 있는 경우로 “창, 호, 상”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저희 사촌 간에 “창”자 돌림을 쓰는 중에 아버지께서 한 잔 하시고 “마 ‘설’이라 케라”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이름은 대부분 그 개인적인 특성이나 혹은 그가 하는 일이나 그의 삶과는 무관하지만 성경의 이름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이름 짓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 특징은 사람의 이름은 에서처럼 그 신체적인 특징, 야곱처럼 날 때의 모습, 그리고 인격이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모나 조부모가 그 이름에 자신의 신앙이나 소망을 담는 것이며, 세 번째는 다른 이름을 별도로 짓지 않고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집안 先祖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각각의 경우를 비롯하여 성경의 이름에 관한 설명만 해도 며칠이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이렇게 이름에 관한 설명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을 살펴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이름이 많은 분이 있을까요? 종종 이름이 둘인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本名이 조금 부끄러워서 교회에서나 친구들에게 조금 예뻐 보이고 좀 있어 보이는 이름을 쓰는 분들입니다. 저희 모친의 본명이 “악이”신데, 그 이름이 부끄러우신지 교회에서는 “둘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윤악이” 권사나 “윤둘이” 권사나 거기서 거깁니다만!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 이름이 많으셨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예수님의 역할이 그만큼 많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대, 세상 모든 곳, 그리고 각기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맞는 분이 되셔야 했기에 이름이 그렇게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것일까요? 

2. 예수님의 호칭

이사야 9장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을 하면서, 심판과 아울러 “남은 자”에 대한 회복도 있다는 예언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 이후의 회복은 그 한계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예루살렘은 훼파되고 그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회복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은 진정한 회복에 대해서까지 이어집니다. 

이사야서가 말하는 진정한 회복은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구속자, 곧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이루실 회복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인류의 회복이요 온 인류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회복을 가져다 줄 메시야는 구체적으로 어떤 분인가를 소개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고, 그 중 6절 7절은 아주 특별합니다. 자, 이제 본문이 말하는 이름 하나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한 아기, 한 아들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오늘 본문이 예수님에 대해서 제일 먼저 부르는 호칭은 “한 아기 … 한 아들”입니다. 여러분, 이 호칭은 神學的으로, 그리고 敎理的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아기가 아닌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그가 한 아기로 태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저주받아 죽어가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 인생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심으로 그가 아기로 나셨다는 것,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한 아기”, “한 아들”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이름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에게 완벽한 신성과 완벽한 인성이 결합되어 있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참 신이 참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죠.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은 신약 성경 역시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마가복음 4장에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에 대해 제자들이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분명 사람인데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는 놀라움이 표현된 말입니다. 즉 사람이 분명한데도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심으로서 예수님이 神性과 人性을 함께 가지신 분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되신 하나님!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첫 번째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오직 예수님만의 이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통치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은 본문에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의미상으로 찾을 수 있는 이름입니다. 6절 중간에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여기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통치자의 보좌에 앉아 정사를 집행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통치는 미가서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신약에 와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헤롯왕에게 이야기할 때 인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6절,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찾아와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실 예수님은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들의 왕이십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정치적인 왕이 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인간이 범한 죄를 씻는 속죄 제사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새 언약의 제물로 자신을 바침으로써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의 왕이 되신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의 왕이시고,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과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현실과 삶에서도 진정한 통치자시냐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여러분은 그 예수님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고 계십니까? 

3) 기묘자(Wonderful)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의 세 번째 이름은 “기묘자”입니다. 기묘자(奇妙者)가 무슨 뜻입니까? 기이할 기(奇)와 묘할 묘(妙)가 합쳐진 단어로서 한 마디로 “놀라운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KJV는 이 부분을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Wonderful”한 분이라는 것이죠. 영어권 사람들은 놀라운 일, 혹은 신기할 것을 보았을 때 ‘원더풀’이라고 합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을 때도 ‘원더풀’합니다. 정말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할 때도 ‘원더풀’,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원더풀’합니다. 그러나 “기묘자”라는 말은 사실 “Wonderful”보다는 “Wonder”라고 번역하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기묘자”란 말의 성경원어가 ‘경이로운 일, 기이한 일, 불가사의한 것, 기적’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기이하고 묘한 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 많지요.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풍경들이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기묘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 그래서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원더풀”하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4장 22절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원더풀”하고 외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전 개역성경에는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놀랍게 여겨”, 혹 “기이히 여겨”를 영어성경은 “wonder”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은 그 어떤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놀랍고 신기한’ 분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391장 찬송을 작사한 Fanny J. Crosby 여사는 ‘A wonderful Saviour is Jesus my Lord’ ,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라고 썼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며 기묘한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든 죄인이 구원 얻을 길을 여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모두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때까지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봉사하시는 것이 기묘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의 두 눈으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묘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이 “기묘자”이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안에서 날마다 그 사랑을 맛보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모사(Counsellor)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의 네 번째 이름은 “모사(謀士)”입니다. “기묘자”도 그렇지만 “모사”도 우리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이 “모사”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꾀를 써서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 또는 ‘남을 도와 꾀를 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책사(策士)라고도 하지요. 따라서 모사 혹은 책사란 그 지혜와 경륜으로 적절한 도움을 주는 존재를 뜻합니다. 이사야 11장 2절 역시 모사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즉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고 알 수 있는 지혜와 지식으로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지혜와 지식의 광대함과 더불어, 모든 상황을 이해하시고 다룰 줄 아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에게는 어떤 문제도 풀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상황, 즉 탄생과 성장과 결혼과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대의 사람 즉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회적인 모든 부류의 사람들 즉 창기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모든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모사”가 되십니다. 이렇게 놀라운 주님께서 날마다 여러분과 동행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사”라는 말을 영어성경이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영어성경은 이 모사를 “카운슬러(counsellor)”, 즉 상담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상담자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쉽게 생각하는 상담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의 사정을 잘 들어 주고, 그에 적절한 조언을 해 주는 사람입니다. 

누구든 이렇게 자신의 사정이나 넋두리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문제까지 해결해 준다면, 그만한 상담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사”시라는 말은 여러분의 모든 사정과 형편을 다 들어 주시며,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며,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위대한 상담자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상담자이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십시오.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의지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의지해야 합니다. 모사이신 예수님, 상담자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묻고, 예수님의 조언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5)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God)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의 다섯 번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전능(Omnipotence)이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라틴어의 “전능”이라는 말은 ‘모든 것 위에 미치는 능력, 또는 모든 것 안에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즉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 능력에 한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실 전능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굶주렸으며, 때로는 피로에 지쳐서 주무셔야만 했고, 때로는 도피를 다니시기도 했고, 때로는 화를 내시기도 했고, 또 때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고, 각종 질병을 고치셨으며, 죽은 사람을 살리셨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셨으며, 장래 일을 예언하셨습니다. 즉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전능하지 않은 분으로 행동하셨고, 어떤 부분에서는 전능하신 분으로 행동하셨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전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나, 그 백성 즉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는 그 전능하심을 시용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에 전능하신 분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돌보시기에 전능하신 분입니다. 지금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 능력으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 영존하시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여섯 번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성부의 이름에나 어울릴 이 이름이 어떻게 성자 예수님의 이름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기서 “영존함”은 예수님의 신성에 근거한 이름입니다만, 여기에서의 강조는 “아버지”에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히브리식 사고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 ‘부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후원자, 보호자’ 등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그의 백성들, 더 넓게는 피조물에 대한 예수님의 父性的인 사랑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마치 아버지처럼 책임지시고 돌보시는 분이라는 말이지요. 요한복음 13장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러분, 일반적으로 부모에게 있어서 자기 자녀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합니까? 아무리 고치기 힘든 不治病으로 고생한다고 할지라도 자식을 위하여 대신 죽을 수 있는 것이 어버이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重罪를 범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여 감싸 안는 것이 부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자녀이기 때문에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아니 그보다 더, 예수님에게는 자기 사람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특별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자기 사람을 최고로 사랑하시고, 최대한으로 사랑하시고, 그리고 끝까지, 무한정으로 돌보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이름입니다. 이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7) 평강의 왕(The Prince of Peace)

이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마지막 예수님의 이름을 살펴볼 시간입니다. 그 이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그리고 3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갈등과 분열과 싸움과 전쟁을 없애신다는 말씀이며, 그 평화를 만드시는 사역의 결론으로서 즐거움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평강의 왕”이심에 대해서 저와 여러분은 지난 11월 27일, 이사야 11장 말씀을 통해 살폈습니다. 특히 그 중 6절부터 8절에 보면, 天敵關係, 즉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이를 가리키는‘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 ‘암소와 곰’, ‘젖 먹는 아이와 독사’등의 원수 관계가 사라지고 그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 되는 것이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자연과 인간이 서로 싸우고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으나 평강의 왕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 모든 갈등과 대립과 싸움이 사라지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떤 갈등도 싸움도 전쟁도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평강은 사람의 심령에도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굴복되지 않고, 항상 한결같은 평정심과 힘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평강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 시간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 속에 넘쳐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 이름은 그의 인격, 그의 사역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에 대해, 특히 그 이름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함으로서 혹시 여러분들이 그 이름의 가치를 놓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많은 이름들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인격을 나타낼 뿐 아니라,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온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이름, 온 우주에 비길 데가 없는 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여러분의 소망, 여러분의 위로, 여러분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 그대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어떤 이름이든지 붙잡고 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이름대로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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