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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마음을 품으라 (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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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을 품으라  (빌 2:1-11)
  

들어가는 말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에 의하면 18세 이상 세례교인들은 당회원이 되어 교회의 전반적인 사안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당회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내년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괴짜 심리학’이란 책에 재미있는 설문조사의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이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약 52%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하여 물었더니 60%로 클린턴 보다 조금 높았습니다.
설문조사에서 2위를 차지한 사람은 인도의 캘커타에서 구제활동을 했던 테레사 수녀로 79%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87%의 지지를 받고 1등이 된 인물이 있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설문 대상자였던 ‘나’ 자신이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요, 자기 보호적이고, 자기 우선적입니다. 

본문의 빌립보교회는 사도행전 16장 11절 이하에 나타난 대로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가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들어갔는데 안식일에 예배할 회당이 없어 조용한 강가로 나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유대의 풍습에 따라 사는 유대인들이 강가에 나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자주장사를 하는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기 집을 열어 예배 처소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넉넉했던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교회가 출발했던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빌립보교회는 한마디로 ‘여성 주도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라는 한 여성으로 시작된 교회인 만큼 아마도 여자의 영향력이 컸던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여자의 영향력이 큰 교회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다른 교회는 ‘또 갇혔나 보다.’ 생각하고 기도만 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성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자 ‘얼마나 춥고 배고플까’, ‘얼마나 불편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헌금을 모으고, 에바브라 디도를 보내 겨우내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여성적인 빌립보교회의 장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단점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의 결정적 약점, 바로 질투입니다. 
빌립보교회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사를 경쟁적으로 하고, 질투하다 보니 그만 교회가 화목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마음에 걱정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2만개의 부속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2만개가 모여서 하나의 자동차가 됩니다. 
자동차 한 대가 제대로 되려면 그 부속품 하나하나가 전부 제구실을 하여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말썽을 부리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타이어는 타이어대로, 핸들은 핸들대로, 머플러는 머플러대로 중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빼놓고 달릴 수 없습니다. 
2만 개의 부속이 똑같이 협력을 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우들이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화목하고, 신앙생활하기가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화목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화목을 위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은 다양한 인간적인 성품을 지녔지만 바울은 그 성품 중에서 ‘겸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겸비’, 또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라고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한 모습을 ‘사람 되심’으로 보여줍니다.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삼위일체적으로 고백하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고, 종이 되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을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역사 안에 오셨다, 우리 인간과 대화적 관계를 이루셨다, 혹은 인간의 문화의 옷을 입고 오셨다고 하는데, 설명 방법이 다를 뿐 실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인도에 간 선교사가 힌두교 승려를 전도하기 위해 가깝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데 선교사가 실수로 개미굴을 밟았습니다. 
이것을 본 힌두교 승려는 매우 놀란 얼굴로 압사당한 개미들을 염려하면서 선교사를 힐책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살생을 범했으니 어찌하겠소?” 
선교사는 어떻게 해야 개미한테 사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승려는 “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어 개미한테 직접 사과하시오.” 했습니다. 

그들은 윤회설을 믿으므로 사람이 개미가 되고, 개미가 소가 되고, 소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선교사가 번득 깨달음이 와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했답니다. 
인간이 개미와 이야기하려면 개미가 되어야 하듯, 하나님이 사람과 이야기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면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사람의 형체를 입지 않고는 절대로 사람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었다’,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얘기를 좀 더 심화시켜보겠습니다.
선교사 다미안 신부 이야기 아십니까? 
벨지움의 트레머루에서 태어난 성 다미안 신부는 브렌느-러-꽁트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860년에 예수와 마리아 성심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에 입회하여 다미안이란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하와이 몰로카이의 북쪽 칼라와오(Kalawao)에 나환자 수용소가 있었습니다.
나환자촌에 모여든 환자가 700여 명. 
그들에게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이 등을 돌린 이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것을 자청한 사람은 바로 33세의 청년, 데미안(Joseph Damien de Veuster) 신부였습니다.
그는 많은 구호물자를 가지고 섬을 방문하여 여러 해 동안 그들을 돌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아요. 
'당신은 성한 사람이라' 이거지요. 
'성한 사람이 어떻게 나환자들의 비애, 외로움, 고통, 눈물을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끝까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자 다미안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에게 문둥병을 주십시오.” 

그는 문둥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리고 다시 문둥병자들을 찾아가니 그제야 마음 문을 열어 주더랍니다. 
결국은 돕는 사람 자신도 문둥병 환자가 되고야 저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람 되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압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의 배신이 얼마나 쓰라린지 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심으로 죽음 앞에서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는지 아십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의 의미입니다.

2. 교만이 있으면 분열이 생깁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역사를 보아도, 인간은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절)”라고 말하며 교만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8절)”
교만한 곳에는 분열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에도 자꾸 자기만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왠지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가 되는 비결입니다.

바울 사도가 밀레도 해변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목회를 회고하면서 제일 먼저 지적한 것도 겸손입니다.
행20:19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곧 모든 겸손(with great humility)"
겸손이란 ‘자기 죽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자기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일상 속에서 자기 죽음을 선언하십시오.
속상할 때도 ‘나는 죽은 사람이야. 죽은 사람에게 속이 어디 있어?’라고 자기 죽음을 선언하십시오.
손해 본다고 생각될 때도 ‘나는 죽은 사람이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이해타산 해?’ 라고 자기 죽음을 선언하십시오.
자존심이 상할 때도 ‘나는 죽은 사람이야. 죽은 사람에게 자존심이 있는 것 봤어?’라고 자기 죽음을 선언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목사든, 전도사든, 장로든, 지역장이든, 속회 인도자이든, 속장이든, 교사든, 성가대장이든, 선교회 회장이든, 모름지기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첫 번째 자질은 겸손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의사로서 한평생을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 정도 되면 어깨 한번 으쓱 할 만한데도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말끝마다 ‘나는 성질이 못되어서 복 받을 만하지 못한데 이만큼 복을 받고 사는 것은 우리 집사람 때문입니다. 우리 집사람의 성품이 좋고 덕이 높아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가 봐요.'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부인이 얼마나 좋겠어요? 
얼마나 값진 이야기입니까? 
‘나는 복 받을 만하지 못한데 아내 때문에 내가 복 받아 살고, 나는 시원찮은 사람인데 내 남편 때문에 이런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부화목의 비결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 때 그 가정이 얼마나 화목하겠습나까? 
겸손은 화목을 이룹니다.

3. 하나님은 그런 겸비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하셨습니까?

그런 낮은 채로 두셨습니까? 
아니지요.
9-10절을 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계 7:9-10절에 나오는 천상교회의 장면이 나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큰소리를 외쳐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라고 합니다.

나가는 말

안도연이 쓴 ‘어둠이 되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대가 한 밤 내/ 초롱초롱 별이 되고 싶다면/ 나는 밤새도록/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대의 등 뒤에서/ 어둠이 되어 주겠습니다.”
참 좋은 시이지요?

그 뜻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빛나십시오. 
나는 그 빛이 더욱 찬란하도록 어둠이 되겠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당신은 높아지십시오. 
나는 당신이 더 높아지도록 낮고 천한 자리에 내려가겠습니다.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면 나는 어떤 일을 당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이 흥한다면 나는 망해도 괜찮습니다.
당신을 알리는 것, 당신이 이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우리 교회 임원들의 마음이 이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임원들이 가져야할 첫 번째 덕목은 겸손입니다.
그 결과 ‘지극히 높이시는’ 하나님의 높이심을 삶에서 체험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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