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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님은 누구신가? (눅 1: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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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눅 1:34-38)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탄생 기사의 핵심어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여전히 절망의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네 번째 초에 불을 밝히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두움에 한 줄기 빛으로 오시는 주님, 간구하오니, 탐욕과 이기심을 물리칠 굳센 힘을 저희에게 주시어 서로 돕고 나누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 우리 눈이 밝아지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다보면 복음서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가 들려주는 성탄 이야기의 핵심어는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마태는 이사야가 예고한 ‘임마누엘’의 약속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임마누엘이라는 이 한 단어 속에 잘 집약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임마누엘’은 상투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단어를 들어도 가슴이 떨리지 않고, 삶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을 잃고 있기 때문이거나, 지금 배부르고 평안해서 굳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이요, 희망이고, 위안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에 시달려 온 사람들, 해도 달도 별도 빛을 잃어버린 것 같은 암담한 세월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의 소식은 복음 중의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발음은 ‘여호수아’입니다. 그 뜻은 ‘구원하는 자’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또한 구원하는 자입니다. 고통받는 백성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누가가 들려주는 성탄 이야기의 핵심어는 ‘기쁨’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가 한 첫 마디 말은 “기뻐하여라”입니다. 마리아가 유대 산골에 살고 있던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도 기뻐서 뛰놀았다고 합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두려워하는 목자들을 다독이면서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눅2:10)고 말합니다. 왜 예수의 탄생은 기쁜 소식입니까? 그와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그의 존재를 통해 역사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우리는 대림절에 밝히는 보라색 초의 의미를 새롭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손성현 전도사는 이정훈 목사님의 통찰에서 배웠다면서 보라색은 동양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색이라고 말했습니다.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이 섞인 색입니다. 동양에서 빨강은 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늘을 상징하고, 파랑은 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땅을 상징합니다. 대림절에 밝히는 보라색 초는 그러니까 하늘과 땅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소통시키는 분으로 오십니다. ‘소통’은 막힌 것을 뚫어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쁨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 의로운 사람 요셉

대림절이 되면 떠오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 오실 길을 닦았던 야인 세례자 요한도 떠오르고, 먼 데서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도 떠오르고, 예수를 가장 먼저 찾아온 목자들도 떠오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저는 요셉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약혼자인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마리아와 더불어 만들어 가려던 멋진 삶의 꿈이 산산 조각나고, 마리아가 순결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생각에 배신감과 아울러 분노가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픔을 안으로 삭이며 가만히 파혼하려 했습니다.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런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 의로운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향해 늘 마음을 열고 살면서 그 뜻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를 내놓는 사람입니다. 

한동안 마음이 흔들렸던 요셉은 꿈에 주님의 천사를 만난 후에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가 주변의 시선이나 사회적 관행에 민감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천사의 말을 신뢰하고는 마리아와 태중의 아이의 보호자와 양육자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저는 요셉이 한 점 의혹도 없이 천사의 말을 받아들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 말끔하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다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 판단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거룩한 결단입니다. 

이런 요셉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화가가 있습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입니다. 그의 작품에 촛불이 많이 등장한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촛불의 화가라고도 부릅니다. 저는 그의 그림 가운데 <요셉의 꿈>과 <목수 성 요셉>이라는 작품을 참 좋아합니다. <요셉의 꿈>에서 요셉은 혼곤한 잠에 빠져 있습니다. 무릎 위에 성경이 펼쳐진 것으로 보아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든 것 같습니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는 데 그 장면은 그의 혼란스럽고 무거운 마음을 잘 드러내줍니다. 화면의 왼쪽에 서있는 천사는 마치 흔들리는 요셉의 마음을 붙들어주듯이 손을 뻗어 요셉의 오른손을 잡고 있습니다. 참 많은 것을 말해주는 그림입니다.

<목수 성 요셉>에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요셉과 어린 예수가 등장합니다. 작업장에서 일 하고 있는 아버지 곁에서 예수는 촛불을 밝혀 들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눈여겨보면 화면을 밝히고 있는 빛은 촛불이 아니라 예수의 얼굴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빛은 요셉에게 반사되어 그의 주름진 얼굴과 이마, 그리고 팔과 다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화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아름다운 일치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유하고 성실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요셉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몸을 입고 오는 여정 가운데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 당찬 소녀 마리아

성탄 무렵 우리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인물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개신교도들에게 좀 홀대받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에게 드리운 가톨릭의 그림자 때문인지 개신교인들은 마리아 이야기를 좀 꺼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우리가 아주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분입니다. 그는 신앙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10대 초반에 불과했던 한 소녀가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한 복판에 섰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하기만 합니다. 

요셉과의 신혼살림을 생각하며 혼자서 얼굴을 붉히곤 했을 마리아의 삶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으로 인해 전혀 예기치 않았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너의 몸이 필요하다는 천사의 전갈을 들었을 때 마리아가 느꼈을 당혹감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내놓았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1:38) 

놀라운 고백이요 응답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이러한 결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장 46절부터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를 참조해야 합니다. 그 노래를 보면 마리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세상이 얼마나 불공정한 곳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아픔도 알고,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도 잘 압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바랐기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새로운 세상을 낳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습니다. 지나친 속단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은 여성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여성이라는 말보다는 여성성이라는 말이 적합하겠습니다.

여성학자인 뤼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 1932- )는 남성들이 여성성을 확보할 때 인류는 평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여성의 몸이 갖는 특수성에 대해 말합니다. “여성의 몸은 병이나 거부반응, 생체 조직의 죽음을 유발하지 않고 자기 안에 생명이 자라도록 관용하는 특수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유기체로서의 우리 몸은 이물질이 들어오면 온갖 면역 체계를 동원하여 그것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혈액 속에 있는 백혈구는 혈액과 조직에서 이물질을 잡아먹거나 항체를 형성하여 감염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하나 있습니다. 임신입니다. 자궁 속의 태아는 자기만의 체계를 가진 유기체이기에 이물질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몸은 그와 10개월이나 공존하는 길을 택합니다.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타자와 공존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은 그런 몸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참고) 지금 세계가 테러와 폭력으로 얼룩지고 있는 것은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편협함 때문입니다.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문화와 종교가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 기다림과 앞당기기

이러한 때 마리아는 깊은 겸손과 온유함으로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모든 장벽을 철폐하러 오시는 주님은 지금 당신의 몸이 되어줄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강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이들과 더불어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비록 힘겹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수난의 가능성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주님을 잉태하는 자궁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갖춰야 할 마음과 자세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벧후3:12-13)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막연히 맥을 놓고 기다리면 안 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기다림의 자세입니다. 무엇이 거룩함이고 경건함입니까?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주님의 거룩한 뜻에 온전히 의탁하고, 또 그 사실을 거듭 되새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삶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의 복지와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우울한 이 시대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남아있는 선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제공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기다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정의가 깃들여 있는 곳’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법적인 정의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로운 세상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지칭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세심하게 보살피는 사회입니다. 이런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애쓸 때 교회는 비로소 교회다워질 것입니다. 

유명 작가인 파울로 코엘료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마이애미 항구에서 함께 바다를 바라보던 친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것만을 기억하고 실제가 어땠는지는 잊어버리지. 영화 <십계> 기억하나?” “그럼. 모세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이 지팡이를 들자 바닷물이 쩍 갈라졌고,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넜잖아.” 그러자 친구가 말합니다. “성서에서는 그와 달라. 성서에 따르면 신이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했어.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말하라,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모세는 지팡이를 들었지. 홍해가 갈라진 건 그 다음이야. 결국, 길을 갈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길이 열리는 법이지.”(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183쪽)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시는 주님은 그의 몸이 되어 드리기로 작정한 이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비상한 용기를 기리고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차례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이 추운 겨울 우리 마음에 생명의 봄기운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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