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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며 사명 감당 합시다 (막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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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며 사명 감당 합시다 (막 1:3)

(막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미국의 힘은 잘 닦인 고속도로(High Way)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조상들은 모진 고난과 역경을 무릅쓰고 여기저기에 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에 그들이 편한 삶을 살기 위 해서 고속도로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편한 삶을 살고 싶었다면 그들은 고속도로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이 편한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서, 후손들이 100년 이상을 사용할 수 있는 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미국의 후손들이 그 열매를 따먹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전국적으로 뻥뻥 뚫린 고속도로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미국을 부러워하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국의 고속도로라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지도자들은 미국 전체를 힘줄처럼 연결하고 있는 고속도로처럼 중국 전역을 철도와 도로로 연결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다합니다. 

지금 전국 곳곳에 닦아 놓은 도로와 터널과 다리가 머지않은 장래에 후손들에게 많은 혜택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길 가는 사람은 무섭지 않지만, 길 닦는 사람은 무섭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길 닦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공장을 세우면 곧바로 제품이 생산되는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만, 길을 닦으면 곧바로 제품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당장 열매도 보이지 않습니다. 열매가 즉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길 닦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길을 닦는 사람이 많을수록 미래가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인 1885년에 한국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얼마든지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얼마든지 미국 안에서 편하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길을 가지 않고, 아무런 길도 닦여지지 않은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한국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새문안교회 개척하고,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여 한국 땅에 기독교 정신을 뿌리 깊게 심었습니다. 그는 길 가는 사람이 아니라, 길 닦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선생님 같은 분도 길을 닦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선생은 민족교육이 나라가 살 길임을 확신하고 평안도 강서에 ‘점진 학교’를 세워 후배들을 교육시키고 지도자들을 양성했습니다. 그는 세 번씩이나 미국에 가서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편한 길을 가지 않고 길 닦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61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흥사단과 상해임시정부 활동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민족혼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늘 기도했습니다. 도산 안창호선생도 길을 닦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영화학그룹은 한국의 유명한 대기업도 아닌데 그 삼영화학 그룹의 이종환회장님이 3,000억원이라는 거금으로 ‘재단법인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을 만들고, 그 장학재단에서 매년 국내외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종환회장님은 힘없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갈 길‘을 열어주고 ’살 길‘을 만들어주는 분이십니다. 이종환회장님도 침례 요한처럼 편한 길을 가려고 하기 보다는, 길을 닦는 일에 앞장서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언더우드와 도산 안창호선생과 이종환회장님과 같이 ‘길 닦는 사람’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길을 손쉽게 가려는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힘이 들고 고달파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길 닦는 사람’을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여행을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준비를 잘 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에 온 외국인을 안내해서 여기 저기 다녔는데 자기보다 다 많이 알더랍니다. '여기가 덕수궁입니다' 하니까 '아, 이 덕수궁은 몇 년에 세워졌고 여기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고…' 줄줄 나오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했더니 한국에 여행오기로 결정한 때부터 한국에 대한 책도 사보고 비디오도 보고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열심히 준비했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비행기 타고 떠나는 것을 여행의 시작으로 잡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준비하기 시작하는 것을 여행을 시작으로 잡는 습관이 있습니다. 일상생활도 이런데 신앙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오래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할 때, 잠자리에 들기 전의 기도를 준비하는 내용을 넣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밤 자기 전에도 이렇게 기도할 텐데 그 때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하지 않게, 너무 허탈하지 않게, 회개의 기도가 너무 많지 않게 오늘 하루 경건하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수십 년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 그 교단의 총회장이 되셨다고 합니다.

자기 전에 기도할 때 내일을 준비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내일은 오늘 실수한 것이 반복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내일은 좀 더 짠맛을 내는 소금, 좀 더 밝은 빛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일이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일찍 내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그랬습니다. 저녁을 하루의 출발로 잡았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시간계산법입니다. 내일 새벽기도 나갈 마음을 먹고 성경과 찬송가 챙기고 일찍 자면 마음속에서는 이미 새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는데 이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동이 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운동은 세례요한의 준비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입니다. 이천 년 전의 세례 요한은 복음운동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이었지만 우리는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세례 요한들입니다.

마가는 마태나 누가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기사를 기록하지 않고 곧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을 도입하여 복음서를 시작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하여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주의 사자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세례 요한의 고백은 오늘날 주의 재림을 예비하는 모든 성도들도 동일하게 고백해야 할 내용입니다. 
'준비'라는 말이 2절에도 나옵니다.

(막 1:2)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이 말씀은 말라기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이 말씀은 여호와의 사자인 메시아의 강림과 심판에 대해 예언해 주고 있는데 상반절은 길을 예비할 사자로서 세례자 요한에 관한 기사입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나의 천사, 나의 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마지막 예언자로서,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름을 가진 말라기가, 같은 여호와의 사자인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심오한 의미를 신학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만큼 예언의 진실성과 하나님의 사려 깊은 배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의 개인적 사명 의식이 투철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자(말라크)는 천사로도 번역되는데 '명을 받아 소식을 전하는 이'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인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바 여기서 내 앞서 길을 예비하시게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 앞서 와서 주님의 길을 닦는 다는 뜻입니다.

3절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광야 길을 예비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또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께서 오실 때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요한은 세례자이면서 동시에 '준비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사람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라‘의 원래 뜻은 임금이 행차하는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왕의 행차는 얼마나 거창하고 까다롭습니까? 미리 미리 사전 점검 다 해야 합니다.
대통령 행사에는 경호팀이 벌써 한달 전부터 점검합니다. 하수도까지 뒤지고 빌딩 옥상문은 다 점검하고 사람들도 다 비표주고 조사합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함이 어떠합니까?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오실 길에 장애물을 모두 거두어내라는 뜻입니다.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시키란 뜻입니다.
이 일을 위해 세례 요한이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막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예수님이 오셨으니 메시야가 오셨으니 그를 만나려거든 영접하려거든 회개하라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을 만나려거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십시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세례 요한이 가르친 예수님 만나는 길은 아주 분명합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가르친 회개란 무엇일까요?
  
아주 행동적입니다. 구체적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 시대에 매우 종교적이고 또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보고 호되게 책망합니다. 

(마 3:7-8)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헛된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렸습니다. 그들의 자존심, 독선적인 생각, 왜곡된 편견이 예수님을 만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자기 의를 믿는 사람,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자기 생각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하는 독선적 사로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 요한의 가르침은 매우 도덕적이었습니다.

무리들에게 말합니다.
(눅 3: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눅 3: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에게 말합니다.
(눅 3: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눅 3: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에게 말합니다.
(눅 3: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모든 인간은 재물과 권력의 범주에서 벗어나기가 정말 힘듭니다. 재물과 권력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우상입니다. 이 우상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세례요한의 가르침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찬송가 94)
얼마나 귀한 찬송입니까! 어떻게 우리 주님 사랑과 이 세상의 재물 사랑을 맞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요즘 같이 물질만능주의, 권력제일주의, 세상 쾌락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더욱 귀한 찬송입니다.
어느 검사를 지낸 분이 그랬답니다. 재물과 권력의 맛을 몰라서 그러지요. 재물과 권력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일 것입니다. 확실히 재물과 권력의 힘이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세례 요한은 외침니다. 재물의 우상, 권력의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결단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함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백번 수천번 아기 예수로 이 땅에 태어나신다 해도 그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구원도 없습니다. 은혜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가 되시기 바람니다. 기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이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날에 천국에서 우리가 다시 뵈올 수가 없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성탄은 우리 인생에 예수님을 만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어떤 신학생의 간증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많은 두려움과 뭔지 모를 죄책감이 있었는데,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또 성령 체험까지 했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웠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이 없고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을 할 때 말더듬는 습관까지 생겼습니다. 그의 죄책감과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뭔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고는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왜 그런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C.C.C.에서 개최한 내적 치유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자신이 왜, 무엇을, 두려워하고 왜 불편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원인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놀랍게도 어떤 장면을 생각나게 해 주심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놀고 있었는데, 멀리서 아버지가 오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가 본 아버지의 모습은 더럽고 허름한 옷에 마치 거지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제발 아버지가 오시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 때 그는 속으로 ‘저 사람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야’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장면이 생각나는 순간에 그는 ‘아 내 마음 속에 항상 가지고 있던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사단이 그것을 빌미로 그의 마음에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어 넣어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부인하고 부끄러워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또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또 깨달아진 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왜 우리 집은 그렇게도 가난해야 했나요?”라고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지겹도록 가난한 그 세월, 가난하지만 않았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하고 다니지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런 감정으로 세미나가 끝나 버리면 이제 어떻게 마음을 추슬러야 하나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강의 시간에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주제로 강의를 듣는데, 주님께서 그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좋은 옷을 입지 못했단다. 나도 그렇게 가난했어.” 그의 상한 마음속에 들린즌 주님의 이 말씀 한 마디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해 있던 원망과 분노를 사그라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이신 주님도 그렇게 가난하게 사셨다면…,”하고 생각을 하니까,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던 마음과 가난했던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마음이 사라지더랍니다.

마음에 두려움과 죄책감이 사라지고 난 후에, 그는 신학교를 그만 두고 그의 적성을 따라서 다른 전문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전보다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만남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합니다. 생선 같은 만남, 꽃과 같은 만남, 손수건 같은 만남이라 합니다. 생선 같은 만남이란 만지기만 하면 비린내가 나는 만남을 말합니다. 만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부패한 냄새를 풍깁니다. 꽃과 같은 만남은 만나면 향기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금세 시드는 만남을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풀은 쉬 마르고 꽃은 10일을 넘지 못합니다. 꽃과 같은 사랑은 풋사랑입니다. 손수건 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며 언제나 함께 하는 만남을 말합니다. 부부나 목자와 성도의 만남은 손수건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날 주님께서도 손수건으로 우리 눈물을 닦아 주신다 하셨습니다. 이 만남을 준비하며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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