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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주가 주신 기쁨, 평안 (빌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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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주신 기쁨, 평안 (빌 1:4-21)
    
빌레몬서는 한 장으로 된 짧은 바울의 편지입니다.  신약의 끝부분 디도서와 히브리서 사이에 살짝 끼여있는 이 편지는 바울의 다른 편지들보다 소홀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들이 대부분 기독교의 교리나 삶의 원리 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다소 무겁고 딱딱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나이 많은 삼촌이 아들처럼 아끼는 조카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느낌이 듭니다.  나이 어린 조카에게 중요한 부탁을 하면서 어른의 체면도 지키고 삼촌의 요청을 들어줄 조카의 얼굴도 충분히 세워줍니다.  편지를 받는 조카 입장에서 감히 어른의 당부를 거절할 수 없지만 부탁을 들어주는 편에서 기분이 좋고 꼭 도와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편지를 너무 잘 썼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쁨을 주는 이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따르고 본 받아야 할 사랑과 용서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예수를 믿으려면 이렇게 믿어야 하고 예수 믿고 삶이 변화되었다면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도전을 줍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중요 인물인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빌레몬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받은 인물입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빌레몬은 사람들에게 평안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바울도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의 섬김을 통해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 칭찬합니다. 기쁨과 평안을 나눠주는 사람 빌레몬에게 바울은 한 사람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전에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친 오네시모라는 노예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훔쳐 도망친 종을 주인에게 돌려보내며 이 사람을 사랑으로 영접하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믿음으로 낳은 아들을 위해 간절히 당부한다. 오네시모는 이제 네가 전에 알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전에는 너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나와 너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오네시모가 나에게는 꼭 필요한 심복이다.  내 곁에 두고 너를 대신하여 나와 함께 복음을 전할 일군으로 삼고 싶지만 먼저 너의 승락을 받는 것이 옳은 줄 알아 돌려보낸다. 오네시모를 종으로 여기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주길 바란다.  

오네시모가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데 주인된 너에게는 더욱 그리할 줄 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안다면 나를 영접하듯 이 사람을 영접하고 혹시 너에게 불의를 했거나 빚진 것이 있다면 내가 대신 갚을 것이니 나에게 청구하길 바란다. 형제여!  내가 주 안에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해주길 바란다.   나는 네가 순종하리라 믿고 이 편지를 쓰지만 내가 부탁한 말보다 더 잘 할 것이라 또한 믿는다.’  이것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편지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사람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며 사랑과 용서를 구합니다. 나이 많은 바울이 어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 명령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억지로 하는 것이 될 것이니 네 마음에 우러나오는 진실한 사랑으로 나의 부탁을 꼭 들어달라 간곡히 당부합니다.  이제 결정권은 빌레몬에게 던져졌습니다. 빌레몬의 신앙과 성정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평안한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빌레몬이 너그러운 그리스도인이지만 어찌 감정이 없는 사람이겠습니까?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하여 아무 소식도 없는 오네시모에 대해 서운하고 괘씸하며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울의 편지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떤 식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였을지 그의 인간성과 신실한 신앙을 토대로 긍정적인 결말을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이런 상상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바울이 보낸 또 다른 편지 골로새서 4장9절을 보면, 오네시모는 두기고라는 사람과 함께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는 일군으로 나옵니다. 오네시모는 더 이상 무익한 종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일하고 있다는 말이니 용서가 실천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편지에 등장하는 바울과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용서와 화해의 진리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세 사람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빌레몬도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과 강렬한 빛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변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어설프게 배워 모양만 내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변화된 삶을 살라고 명합니다.   진정한 회개 또는 회심은 삶의 전환으로 증명됩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만난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인의 집에서 재물을 훔쳐 달아난 것은 물론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 얼마나 쓸모없고 헛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감옥에서 낳은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 상영된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영화의 스토리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주인공 여자의 주변에 등장하는 기독교인들의 행동이 영화를 보는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영화를 만든 사람은 기독교인의 윤리의식과 회개라는 신앙적 결단을 그런 식으로 비판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 상당히 불쾌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갖도록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기분이 많이 안좋지만 거기에 한국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반성할 기회를 주는 메시지도 담겨있습니다.  

웅변학원 원장이 학원생을 유괴하여 돈을 요구하다 아이를 살해한 죄로 감옥에 갔습니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슬픔에 빠져 살고 있을 때 동네 이웃 교인들의 전도를 받아 교회를 출석하며 구역식구들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배웁니다.  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기 위해 엄마가 꽃다발을 들고 살인범을 면회하러 갔습니다.  물론 그 여인으로서는 대단한 결단을 하고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면회실 창구 너머로 보이는 유괴 살인범은 평안한 웃음으로 아이의 엄마를 만납니다.  그리고 이 엄마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자기는 하나님께 다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합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해주려고 큰 결심을 하고 갔던 이 엄마는 그순간 분노를 못이겨 정신이 팽 돌아버리고 맙니다. 내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무슨 용서를 받았다는 말인가? 나는 아직 용서를 못했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얼굴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누구길래 나의 동의도 없이 저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는가?  눈 앞에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원수의 얼굴과 그 입에서 나오는 가증스런 평안을 보며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하였습니다. 회개했다는 뻔뻔한 살인범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교회에서 배운 사랑과 용서라는 것이 부질없는 위선과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얼굴이 화끈거려왔습니다. 분노로 가슴치는 아이 엄마를 보며 미안하고 부끄러웠고 뻔뻔한 살인범을 끌어내어 한대 패주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저런 식으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다 확신하며 사람들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있을까? 나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누군가 있는데 어찌 그 사람의 고통은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기쁨으로 할렐루야 찬송하며 천사처럼 말할 수 있는가?   죽은 아이의 엄마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은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뻔뻔한 사기행위일 뿐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만 아니라 내가 저지른 일로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에게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당사자에게 용서를 받고 받지 못하는 것은 다음 문제입니다.   그리고 책임을 져야합니다.  유괴와 살인죄로 감옥에서 형을 산다고 피해자 가족의 아픔이 치료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없는 죄고백으로 상한 심령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용기가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영화에 나오는 웅변학원 원장, 예수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 받았다고 말하는 그 사람은 그런 과정을 생략했고 하나님과 자기 관계만 해결하면 끝이라고 믿고 자기 혼자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과연 그 평안이 진실한 것일까요?   

주님을 만나기 전 오네시모는 주인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 모양으로 종노릇을 하고 있는가? 신세타령이나 하고 피해의식과 불평으로 세상을 비관하다 주인의 재산을 도적질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언젠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위해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자유는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도망자의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달랠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 무슨 기쁜 일이 있었겠습니까?   어렵게 로마까지 도망왔지만 떳떳하게 얼굴과 이름을 드러낼 수 없는 막장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옥에 갇힌 바울을 만났습니다.   죄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사람보다 자유를 누리며 기쁨과 평안하게 지내는 이상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저 사람 속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평안과 기쁨으로 살고 있을까 궁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었을 때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바울 안에 기쁨과 평안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믿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하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더라도 두렵지 않고 외롭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 다음 그가 보여준 행동은 무엇입니까?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 아버지와 고향을 그리워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 죄를 고백하듯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돌아가 옛날의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받을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를 들고 옛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오네시모는 이런 점에서 진정한 회개자입니다. 하나님께 죄사함의 은혜를 받고 죄와 죄책감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을 때 나 때문에 상처를 받은 주인을 생각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용서를 구해야 된다고 생각하였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예수 믿고 변했다면 이런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삶의 전환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의 이중성과 가식적인 행동을 신랄하게 고발하였습니다.  신앙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뻔뻔하게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조롱합니다.   그러고도 너희들이 의로운 척 고상한 척 예배당에 모여‘주여, 주여’ 외치며 살고 있느냐?   너희들이 말하는 회개와 죄사함이란 것이 고작 그런 것이냐?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비꼼입니다.

회개는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라 인생을 바꾸는 결단입니다.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형식적인 회개와 눈물을 보인 것을 회개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죄의 형벌을 처절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갚으셨는데 기독교인은 예수 이름 의지하여 말 한마디로 고백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이라 여기고 나는 그 사랑을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그렇게 확신하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 여깁니다.  참으로 그렇습니까? 그렇게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또 다른 죄를 대수롭지 않게 저지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예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값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까?   사람 스스로 자기 죄에서 구원할 수 없고 스스로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떤 선한 사람과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도 완전한 용서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어두움 뿐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소망과 빛으로 오셨습니다.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죄책감의 짐을 벗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은 아무런 댓가를 치루지 않고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받으셨고,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를 온 몸으로 받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어찌 거저 되어진 용서와 화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들을 대신 죽음에 넘겨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헐값으로 취급하지 맙시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값을 치르지만 그분은 죄없는 분으로서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값없이 용서하셨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값을 모두 치르셨기 때문에 내가 또 다시 같은 방식으로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내 대신 이 형벌을 받으셨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그 희생에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내 삶의 주관자로 인정하며 그분이 명하신 삶을 살고자 힘쓰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값을 치르신 것처럼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오네시모를 대신하여 내가 빚을 갚을테니 용서하고 사랑으로 영접하라 당부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 예수님을 본받는 모습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편지를 들고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도망한 노예는 주인의 처분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도둑질과 도망의 죄에 대한 형벌을 어떤 식으로 받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입니다.  너무 두려워 마음을 바꿔 도중에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믿었고 오네시모는 바울의 편지와 주인의 용서를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용서와 화해가 없는 세상에 이런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쓸모없는 한 사람의 인생을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뒤바꾸는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으로 오십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구하려 빌레몬에게 강청하듯 예수께서 나를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죄에게 종노릇 하던 나를 대신하여 빚을 갚으셨고 형제와 친구가 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을 나눠주시고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능력의 주님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내 인생에 잠간 머물다 떠나는 분으로 여기지 맙시다.   가끔 필요할 때만 도움을 주고 외로울 때 친구가 되는 분으로 여기지 맙시다.   그분이 나의 삶 전체를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주인이 되게 합시다.  그분이 오시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삶이 변화됩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자신의 구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변화되어야 마땅합니다.  왜?  변화의 능력이신 그분이 그 사람 속으로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며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인간성이 좋아지거나 예수 믿는 집안에서 출생하면 자연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고 천한 세상,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그분이 내 마음과 나의 삶 속으로 들어오셔야 내 인생이 변합니다.   그분을 지식으로 알고 존경하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오직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들의 인생은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변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두려워 변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주인삼아 새로운 인생을 살게되면 이제껏 누리던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아쉬움이 발목을 붙잡습니다. 내가 과연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자신 없음이 나를 변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아직 내가 주인이 되어 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내 주인이 되어 나로 하여금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변화의 능력은 바로 그때 시작됩니다.   내 안에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과 기쁨이 나를 통해 이웃에게 흘러갑니다.  여러분에게 이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까?     
        
오늘 읽은 짧은 편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천적인 결단을 촉구합니다.  당신이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사랑과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까?  답안은 스스로 작성하여 채점관이신 하나님 앞에 제출해야 합니다.   이 편지는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당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기쁨과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인가?  그 기쁨과 평안을 다른 이들과 기꺼이 나누고 있는가?    성탄절을 앞두고 나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한 주간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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