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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다른 길을 간 사람들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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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을 간 사람들 (마 2:1-12)


오늘 1절 말씀에 헤롯 왕이 등장합니다. 헤롯 왕가와 예수님은 악연의 관계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먼저 헤롯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이 사람은 매우 정치적이고 잔인하고 처세에 밝은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충성해서 출세한 사람입니다. 유대 나라 역사를 보면 헤롯 왕가가 끼친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말하면 친일파가 되어서 출세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로마 반대 세력이 일어났을 때 결정적 진압을 한 공로가 있어서 갈릴리 지역에 총독으로 임명이 되었다가 나중에 유대나라 왕으로 승진한 사람입니다. 

B.C 37년에서 A.D 70년까지 약 100년 동안 아버지와 아들들이 왕을 지낸 왕조가 됩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 아버지 헤롯의 나이가 70세였습니다. 예수님 출생 후 3년에서 4년 정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후에 그의 아들 아켈라오와 안티바스와 빌립 세 아들이 나라를 삼등분해서 한 지역씩 맡아 정치한 분봉 왕을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헤롯 때 태어나셔서 아들 헤롯 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의 잔인성은 성경에 자세합니다. 

오늘 말씀에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물은 말 한마디가 큰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질문을 할 때 차라리 “메시야가 어디서 나셨습니까?”라고 물었더라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이렇게 물은 것이 헤롯 왕의 신경과민 반응을 일으킵니다. 옛날의 왕들은 누구나 똑같은 예민성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 왕권을 넘보는 놈이 없나 하는 것이 제일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역사에 보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아들도 있습니다. 

형이나 동생이 처형당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윗 왕도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하마터면 아들에게 죽을 뻔 했습니다. 우리 역사에 고려, 조선 역사 천년 항상 그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네팔에 선교 때문에 갔을 때 온 국민이 술렁술렁하고 어떤 사람이 왕가에 8명을 다 총으로 쏴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가까운 친족이 왕위에 올랐는데 결국 그 사람이 죽인 거였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왕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노쇠하셨습니다.”입니다. 

그 소리는 물러나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아주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동방박사들은 왕한테 와서 왕이 될 사람이 나셨다고 하니까, 더군다나 구체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자기가 왕인데 또 왕 될 사람이 태어나셨다 하니까 신경이 아주 예민해 졌습니다. 가득이나 살인적 광기를 가지고 있는 헤롯에게 심장을 찌르는 충격파를 던졌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가장 참혹스러운 살인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베들레헴 중심에서 그 근방의 모든 사내아이들은 2살 이하 다 죽이라 해서 다 죽였습니다. 
그가 죽고 그 아들이 또 왕이 되었는데 안티바스 이 사람도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왕이라는 사람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살아서 세례 요한이 지적을 했더니 세례 요한을 지금 감옥에 가둔 상태입니다. 헤롯의 생일날은 국경일입니다. 국가 공로자들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살로메의 춤을 보고 흥분하지 않습니까? 헤로디아는 헤롯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자기 딸 살로메를 로마의 춤 유학을 보냈다가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생일날 춤을 추게 했는데 이 헤롯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관능미가 넘치는 춤을 보고 완전 흥분을 해서 소원을 물었습니다. “네 소원을 말하라. 뭐든지 들어주겠노라. 나라의 절반까지도 네게 주겠노라.” 

그런데 결국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서 내게 주소서.” 그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왕의 생일잔치에 그렇게 큰 국가 인물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행하다니 누가 보아도 헤롯 가문의 피는 살인적 잔인성이 흐르는 마귀 계열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도 그 헤롯의 재판으로 빌라도에게 넘겨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 로마 사람인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 석방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헤롯 정부에서 죽이라 하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에게 출생 장소를 정확히 알려준 사람들은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 미가서 5장 2절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가보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과 붙어 있습니다. 산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됩니다. 궁금해서라도 가보면 될 텐데 아무도 가보지 아니하고 오직 아기 예수를 축하한 사람은 베들레헴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밖에 없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아기 예수 탄생에 관계된 사람들의 모습을 대강절에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생명적 위험 부담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이 동방박사들은 그 동방이 도대체 어디인가? 페르시아입니다. 성경에는 파사라고 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 땅입니다. 이란에 가면 성경의 인물들 무덤이 많이 있습니다. 에스더, 모르드개도 다 거기 묻혔습니다. 베들레헴에 관광지로 예수님 출생하신 출생 장소에 커다란 예배당을 하나 지어놨는데, 옛날 페르시아 군대들이 유대 땅 점령할 때 닥치는 대로 다 불살랐습니다. 

베들레헴 예수님 출생하신 장소로 진격했을 때 그 기념교회도 불질러버리려고 불을 들었을 때 베들레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보시오! 이 건물은 절대 여러분들이 상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이 건물은 메시야가 탄생하셨을 때 바로 당신네 나라 박사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경배 드린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것은 유대 나라 유적지가 아니라 페르시아 당신네 나라 유적지입니다. 그래도 불 지르겠습니까?” 그래서 보존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수도권에서 유적지까지 거리를 계산해 보십시오. 비행기 여행 거리입니다. 차를 타고 가기도 힘든 사막입니다. 

사막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낙타를 탔는데 낙타의 걸음걸이는 빠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이 박사들은 생명을 걸고 찾아온 것입니다. 알타반 박사의 이야기를 우리는 전설같이 다 들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찾는데 33년 걸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다가 숨이 차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찾아오신 동방박사들의 성탄 축하 행사였습니다. 이들이 드린 이 예물의 본질성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황금은 왕권 상징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닌 만왕의 왕이 되시고 하늘나라 왕권 상징입니다. 

세 개 모든 나라의 문화가 있습니다. 왕관은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절대 권위자로서 영원히 변함없다.” 그런 뜻으로 왕관을 썼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리라.” 그런데 이 왕권에 대해서 생긴 오해가 열두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야 사역의 이 왕권을 유대 나라 왕권으로 생각했습니다. 헤롯도 그렇게 생각해서 죄 없는 어린 아기들만 죽여 버리는 역사의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이 황금은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왕권 상징에 대한 신앙 고백적 예물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유향은 제사 용품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됩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영적 권위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자생 능력으로 죄를 사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해야만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는 제사장들이 그 역할을 감당해서 짐승이 대신 인간의 죄를 위해서 희생됨으로 말미암아 죄를 속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 했고, 대속죄인이 되면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하나님과 중보기도를 해서 온 백성이 지은 죄를 그날에 다 속죄해서 속죄 선언을 하는 제사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때 향을 피워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린 이 유향은 그러한 예수님의 대제사장권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그 다음 몰약은 선지자, 예언자 상징입니다. 몰약이라고 하는 물질은 일종의 방부제 역할입니다. 썩는 물건에 대한 예방입니다. 이 선지자와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심령의 상함을 방지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몰약을 받으신 것은 선지자와 예언자가 되시는 상징입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 경배라고 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까지 와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 하나가 발생합니다. 헤롯 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헤롯은 아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 알려주는 조건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에게 알리면 아기 예수는 즉시 살해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헤롯을 거역하는 일이 쉽게 생각되는지 모르지만 그때 상황은 생명적 위험을 감수해야 됩니다. 헤롯 대왕이 누군데 감히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낙타를 타고 천천히 이동을 해야 되는 낯선 외국인들은 금방 노출됩니다. 헤롯의 군대가 그것을 못 찾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과 같이 사건 일으키고 자동차로 한 시간에 200리 밖을 도망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헤롯 대왕을 거역할 수 있었을까요? 이들은 이때 생명을 건 것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우리가 목표하는 아기 예수 경배는 이제 그 목적을 성취했으니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리고 헤롯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자기들의 갈 길을 갔습니다. 우리 기독교 진리 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오는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어느 때인가는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찬송을 부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가오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를 만나는 자는 처음부터 생명 위험적 각오를 가지고 따르는 것임을 예수의 탄생 과정에서부터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절대적 협조자들 사역이 있었는데 마리아와 요셉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의사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예수 탄생 협조자들이 됩니다. 이러한 선택을 불이익적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위험이 찾아오는 선택입니다. 나사렛 동네에 가면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동네는 이웃집입니다. 그러니까 동네 이웃집 처녀 총각이 결혼 약속을 하고 지금 준비 상태에 있습니다. 아마 그들을 그냥 두었다면,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결혼해서 행복하게 소시민으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의사 결정이 전혀 아닌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생명적 위험을 그들이 감수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구약 성경이나 신약 성경에 나타난 유대인의 율법적 성윤리를 알고 계십니다. 창세기 38장에 보십시오. 다말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혼자 되어 살고 있는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그 시아버지가 들었을 때 당장 하는 말 “끌어다 불살라 버리라.” 수없이 많은 여인들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성윤리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십시오. 간음하던 여인 끌어다가 돌로 쳐 죽이라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러한 성윤리적 상황에서 마리아가 처녀 출산을 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불살라 죽여야 합니다. 임신 발견 즉시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자신의 그 순결성에 대한 항변을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마리아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는 여인들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다행이도 이슬람교가 많이 전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녀를 살해하는 일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이슬람 전통 국가에서는 그런 일이 지금도 끝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연애를 하다가 혼전 동침이 발견되면 자기 딸을 아버지가 무참하게 죽여 버립니다. 이것을 명예살인이라고 합니다. 신문에 난 것을 보십시오. 파키스탄에서는 1년에 1,200명의 처녀들이 아버지에 의해서 살해되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해마다 있는 일입니다. 어느 나라나 수백 명씩 있습니다. 보통 아버지나 오빠, 같은 친족들이 죽여 버립니다. 

자기 가족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결혼 전 정혼한 상태에서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 보호함으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 요셉도 마리아도 지금 생명적 위험에서 예수 탄생을 협조하고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된 일을 위해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렇게 생명적 위험을 각오해야 되었던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이런 성경들이 기록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는 열두 명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의사 결정이 아닙니다.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베드로, 안드레, 요한을 보고 너희들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이 불러주셔서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를 보고 너도 나를 따르라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따라서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사람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순교 당해 죽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기독교를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한쪽에서는 항상 피 흘림의 역사가 계속 됩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대가를 놀랍도록 누리는 그런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죄 없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그 결과 우리들에게 놀라운 혜택이 생겼습니다. 온 세계 누구나 예수만 믿으면 영생이 주어지는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 그로 인하여 생겼지 않습니까? 예수님 제자들의 순교의 피는 기독교회의 기초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정착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단 말입니다. 

거룩한 희생이 되었지 않습니까? 청교도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후손들은 엄청난 후광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누군가는 피 흘려야 누군가 그 혜택을 받는 상대적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말 축복하시는 사람은 누군가? 혜택자보다도 피 흘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 기준적인 것으로 평가를 한다면 매우 불쌍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희생되고 피 흘리는 사람이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비중이 큰 산상 보훈을 보십시오. 마지막 부분에 뭐라고 합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다 이렇게 살았느니라. 오히려 피 흘림과 핍박의 자리가 더 큰 하나님의 복자라. 그래서 기독교는 패러독스 진리다.” “핍박 받고 죽는데 그게 어떻게 복이 되느냐?” “복이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영적 자부심이 있습니다. 

어떠한 박해나 불이익이 와도 그 박해나 불이익을 하나님의 상급으로 받아들입니다. 요셉은 불쌍한 사람이었는가? 마리아는 불쌍했는가? 페르시아의 지식인 동방박사들이 무엇 때문에 생명을 걸고 거기까지 왔다가 인생을 어렵게 만들었는가? “그게 복이다. 순교가 다 복이다. 아기 예수를 만나는 한 가지 소박한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까지, 이란에서 이스라엘까지 그 멀고도 먼 사막의 길을 이동수단으로 그 느린 낙타를 타고 얼마나 많이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달성했지 않습니까? 생명을 무릅쓰고 헤롯의 명령을 거역한 채 “이제는 됐어! 천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헤롯의 명령은 거역이다.” 다른 길을 선택해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슨 뜻이 있습니까? 예수를 만난 자는 그 시간부터 다른 가치관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위험스러운 일이 있다 하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왔다는 이 기록들은 가장 큰 위엄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보편주의입니다. 유대 나라에도 박사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유대 나라에 더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 가득한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 멀고도 먼 페르시아의 동방박사들을 거기까지 오게 하셨습니까? 메시야는 유대인만을 위한 탄생이 아니라는 구원 사역의 보편주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니까 하나님은 애굽으로 피신시키셨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죽이려 하고 애굽은 살려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메시야 탄생은 애굽인에게 구원의 빛이 됨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요나서를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지 않습니까? 그래서 12만 명의 니느웨 시민이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하나님 구원의 보편주의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유대니즘에 사로잡히고 내셔널리즘, 국수주의가 가득해서 “구원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뿐이다.” 이것을 다 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게 뭡니까? “내가 전한 이 복음의 역사는 구원의 보편주의다. 온 세계 누구나 다 똑같이 구원을 받는 길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루살렘뿐이 아니고 유대와 사마리아, 저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빛은 보편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의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우리 한국 사람도 이렇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시작을 동방박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강절이라서 아기 예수 탄생을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라크 전쟁 때 미국에서는 온 나라 전체가 노란색 리본을 다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집에도 대문에 노란 리본을 달고, 은행이고 마켓이고 할 것 없이 정부 기관이나 사설 단체나 다 리본을 달고 교회도 십자가에 노란 리본을 달고 사람들도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출근을 하고 온 나라가 다 노란색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빙고라고 하는 청년이 죄를 짓고 뉴욕 감옥에 갇혔습니다. 집에서는 부인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이 끊기고 편지가 안 오는 겁니다. 

아무리 보내도 아내에게서 편지가 끊겼습니다. 그래서 빙고는 마음의 결정을 하고 ‘아! 마음이 변한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이렇게 죄를 짓고 감옥에 있으니 나를 기다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제 몇 년이 지나고 석방이 가까웠을 때 그는 마지막 편지 한통을 자기 아내에게 보냈습니다. 『내가 이제 몇 월 며칟날 석방이 되어서 집으로 갑니다. 만약 당신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준다면 마당에 있는 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시오. 

그 리본이 달려있으면 당신이 나를 용서한 것으로 알고 문을 노크할 것이오. 만약 달려있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앞에서 돌아서서 내 갈 길을 외로이 가겠소.』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졸이면서 석방되는 날 자기 집 앞을 도달했을 때 자기가 도달한 마당에 있는 그 나무에 노란 리본이 100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아주 행복하게 살게 된 역사가 있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서 “이라크 시민들의 자유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몸을 바치러 간 미군의 아들들이여!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무사히 돌아오라.” 노란 리본을 모두 다 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반짝이는데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여! 우리 집에도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오시고 이 나라에도 찾아오시고 어디에나 예수 그리스도여! 오시옵소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강절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 하나님 아버지! 지금은 주님을 기다리는 성탄의 불빛으로 세상을 밝혔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교회에도, 사회에도, 나라에도, 인류 전체, 지구 전체 주님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기다림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성에서 빛이 나게 하시고 모두가 주님을 맞아들임으로 평화를 이루게 하여주시옵소서. 가정마다 교회마다 나라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성탄의 불빛이 비추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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