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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에 의지하여 (눅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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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의지하여 (눅 5:1-6)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한 말입니다. 당시 학문이 교권에 의해서 제약을 받아 진보하지 못하고 한 곳에 정체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참된 지식을 얻어야 함을 강조한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지적인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식, 참된 지식을 얻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과 지혜는 다릅니다.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는 지식에다가 경험이라는 요소가 가미될 때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많은 지식에 풍부한 경험이 합해진다면 지혜는 배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교육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공부기계라고 말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합니다. 기성세대라고 말하는 어른들 때보다도 더 많이 공부하고 지식을 많이 쌓습니다. 또 ‘정보의 바다’라고 말하는 인터넷 등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공유합니다. 

요즘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우리 기성세대가 갖지 못한 지식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많이 배웠지만 경험이 적기 때문에 배운 그것을 지혜로 활용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반대로 어른들은 배운 것은 많지 않을지라도 경험이 많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이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지혜로운 삶을 사는데 경험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IT분야에서는 어른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핸드폰을 사용하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히게 잘 합니다. 우리 시대에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에게 박사학위를 줘도 될 만큼 잘합니다. 어느 한두 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 아이들이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핸드폰을 사서 사용하려면 매뉴얼을 보고 며칠 동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공부를 해도 모르는 게 대부분입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매뉴얼을 보고 공부하지 않습니다. 기계를 몇 번 만지작거리면 그냥 갖고 놉니다. 그리고 그 핸드폰 속에 있는 다양한 기능들을 활용합니다. 

우리는 좋은 핸드폰을 사서 갖고 다니지만, 사실은 그 핸드폰에 있는 기능 가운데 1%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이들이 핸드폰을 그렇게 잘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바로 경험입니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것저것 해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지식을 깨달아가고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과 지혜를 터득해 갑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합니다. 내게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삶의 철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경험입니다. 지식에 경험이 플러스 될 때 지혜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얻고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경험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99년 가전업계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된 한국전력공사 사장인 김쌍수 씨는 그의 책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문장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단어 하나를 더 넣어야 한다. ‘아는 것을 실천해야 힘이다.’” 
  
그렇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뭔가를 얻을 수 없습니다. 때론 노력하지 않고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금새 사라지고 맙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곧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뭔가를 행함으로 귀한 것을 얻는다는 게 인류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하더라도, 그리고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어부입니다. 물고기 잡는데 전문가입니다. 그는 평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았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살고 있는 고기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경험도 풍부했습니다. 평생 거기에서 고기를 잡았으니 고기잡이의 경험이야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의 고기잡이는 주로 밤에 이루어집니다. 그날 밤도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열정적인 베드로의 성격으로 보건대, 그가 그날 밤 고기를 잡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겠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결과는 빈손이었습니다. 아마 평생 그런 날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많은 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그 종류는 20여 종에 이르고 개체 수 역시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는 풍요의 호수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베드로는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동이 터오자 더 이상 고기잡이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호수가로 나와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정리해놔야 오늘 밤에 다시 고기잡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습니다. 지난밤에 고기를 좀 잡았다면 이렇게까지 심란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많이 잡을 때도 있고 적게 잡을 때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몸은 아주 피곤합니다. 고기를 많이 잡았다면 몸은 피곤할지라도 마음은 기뻐서 피곤한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잡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몸은 더욱 피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물을 정리하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예수님께서 거기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거닐고 계시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냥 호숫가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들자 호숫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네 배를 좀 빌리자’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기꺼이 자신의 배를 예수님께 내어드렸습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게 하신 후에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순간 베드로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니 황당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요 목수로 자란 분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일이라면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은 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전문가는 자신입니다. 
  
더구나 지난 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 구석구석을 다 훑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마다 다 그물을 내려 보았습니다. 깊은 곳이라고 어찌 그물을 내려 보지 않았겠습니까? 깊은 곳이건, 얕은 곳이건 그물을 내려 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또 지금은 고기잡이를 할 때가 아닙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갈릴리 호수에서의 고기잡이는 주로 밤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낮입니다. 고기를 잡을 적절한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지금 막 그물 씻는 일을 마쳤습니다. 이미 오늘 고기잡이를 접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제 그물 정리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 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겠다고 다시 그물을 내리면 또 그물을 씻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또 갈릴리 호숫가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렸다가 한 마리도 못 잡는다면 모인 그 많은 사람들로부터 창피를 당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지금 그물을 내리는 것은 헛수고를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기잡이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고기잡이를 해야 할 때도 아닌 지금 지나간 밤에도 수없이 그물을 내려 보았던 그곳에 다시금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그물을 내렸다가 고기를 잡지 못한다면, 그물을 씻는 수고를 다시 해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피곤에 지쳐있는 상황에서 다시 그물을 내린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물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깊은 데로 노를 저어갔습니다. 예수님을 태운 채 깊은 데로 가서는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두 배에 가득 채웠더니 두 배 모두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을까요? 분명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뢰할 만한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에 비추어볼 때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갔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게 만들었습니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 그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리기에 앞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지난 밤 헛수고한 베드로로 하여금 다시 그물을 내리게 만든 것은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그 말씀만으로 그물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기잡이에 비전문가인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만든 다른 뭔가가 있었습니다. 지난밤의 헛수고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헛수고할지 모른 상황에서 다시금 도전할 수게 만든 다른 뭔가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그물을 내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시 갈릴리 호수가로 가 보십시다. 지난밤의 헛수고에 몸과 마음이 지쳐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베드로의 배를 빌어 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베드로는 호숫가에서 그물을 정리하면서 모여든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귀에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예수님이 다른 랍비들하고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이나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다 느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태복음 7:28-29) 
  
베드로도 분명 그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 이분은 보통 분이 아니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신의 배를 빌려 타자고 말씀하시자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에 태우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호숫가에서 약간 배를 띄워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그 배 위에서 호숫가를 향하여 무리들에게 더욱 큰 소리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때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자신의 배에 태우고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베드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물론 예수님이 타고 계신 자신의 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거기 갈릴리 호숫가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배에서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물 손질하는 것도 이미 끝났습니다. 고기잡이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태우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예수님의 말씀 속으로 깊이 빨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예수님의 말씀은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느끼고 있었는데,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제 육지로 가자’라고 말씀하실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 말씀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고 능력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는 이미 말씀으로 충만했습니다. 자신의 배를 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 가까이에서 누구보다도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하면 뭔가 새로운 세상이 오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어쩌면 손해볼 지 모릅니다. 지난밤에 수없이 그물을 내려 보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헛수고가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미 말씀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했더니 두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으로 산다고 하지만,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때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말씀이 지금 내 상황과 너무나도 다를 수 있습니다. 상황적으로도 맞지 않고, 경험적으로 봐도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대로 했다가는 헛수고만 하고,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고, 내 경험으로 볼 때 전혀 불가능하고, 상황적으로 볼 때 앞뒤가 맞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것을 초월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경험이나 상황에 맞추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기적을 창조해가며 역사합니다. 그게 말씀의 능력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증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상황에 얽매여 상황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진리는 상황 속에서 역사하는 것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을 초월해 역사하는 말씀이고, 불가능 속에서 가능의 창조하는 기적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늘의 능력을 경험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말씀을 많이 담아두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말씀에 우리 마음과 삶의 자리를 비워놓아야 합니다. 말씀이 역사하도록 말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으로 충만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말씀을 가까이에서 가장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랬기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이 불가능해보이고,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말씀은 분명 기적을 창조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말씀에 순종하여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너무 메말라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 8:11)  

여러분, 우리의 삶을 메마르게 하는 것은 마실 물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어려운 것은 먹을 양식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하나님의 말씀을 품지 못해 메말라버린 마음 때문에 우리의 삶에 하늘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량이 없습니다.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감동과 기쁨으로 역사하지 못하는 것은 말씀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듭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말씀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신 보혜사 성령이 계심에도 우리가 불안하고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우리 안에 말씀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말씀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1985년 5월 15일,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학위수여식에 한 낮선 동양인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나이 50이 된 전재경이라는 분입니다. 그가 특별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된 것은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충남 부여에서 목수였던 아버지의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7살이 되던 해 당시 유행하던 안질을 앓다가 그만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그에게 고통과 불행의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 맹아학교에 입학한 그는 좌절과 고통을 견뎌내며 공부에 정진하여 건국대 역사지리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게 됩니다. 

그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조국 땅에서 공부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낯선 미국까지 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장학금까지 받으며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복잡하기로 유명한 뉴욕에서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맹인전용도서관을 찾아가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공부한 것이 무려 20년이나 되었고, 결국 50세가 되던 해에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장애물이 너무 많아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가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된데는 신앙으로 그를 격려했던 아내의 도움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의 말씀이 그를 그 자리에 서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에베소서 2:10절의 말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신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이런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었기에 그는 그 어떤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그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말슴이 그의 삶을 기적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말씀은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말씀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능력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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