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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에서 배우기(1) : 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 (왕상 1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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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서 배우기1(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

열왕기상12:25-33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왕은 총 42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통일왕국 3명 분열왕국에서 남쪽 유다 왕 20명 북쪽 이스라엘 왕 19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에 가장 실패한 왕은 누구일까요? 가장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 인물은 누구일까요? 가장 악한 지도자로 기록된 왕은 누구일까요?

오늘 나오는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입니다. 모세와 대립되는 바로나, 다윗에 대비되는 사울과 같이 성경에 위대한 지도자에 반대되는 악한 지도자들이 등장하는데 이 모든 악한 지도자들도 여로보암 왕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여로보암은 악한 왕의 표준이 된 왕으로 나옵니다. 잘못된 왕을 평가할 때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은 악한 왕정을 한마디로 “여로보암의 길”, “여로보암의 죄”라는 짧은 대명사로 표현합니다. 오늘 “실패에서 배우기” 첫 번째 말씀으로 여로보암의 실패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길 원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이야기나 역사가 아니라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인생에 실패한 지나간 한 왕의 역사이지만 이 말씀을 읽는 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와 사명을 이루는 방법, 실수할 때 대처 방법으로 나누어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삶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반역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여로보암 전의 왕은 솔로몬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혜의 왕으로 일천번제를 드리며 정치를 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견고해지자 타락하였습니다. 단적으로 성경은 솔로몬의 타락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6절부터 8절까지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사였습니다. 정략적인 결혼을 하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근본적으로 예배에 실패한 것입니다.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 신을 섬겼고 암몬의 가증한 몰록 신을 섬겼습니다. 산당을 짓고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렸습니다. 두 번이나 하나님이 경고하였지만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나라를 빼앗아 신하에게 준다고 경고하였는데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실력이나 지식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군사력이나 외화가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실패한 직접적인 원인은 우상 숭배라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 솔로몬이 우상 숭배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렘 9:24) 하나님의 법도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 14:17). 솔로몬은 왜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의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가치를 버렸을까요?

솔로몬은 집권 40년 동안 토목건축 사업을 벌였습니다. 국민의 과도한 조세부담과 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전국을 요새화하였습니다. 병사 1만2천 명과 전차 1천4백대로 특전사를 만들어서 전국의 요새에 배치하였습니다. 다윗 때 없었던 군벌 계급이 생겼습니다. 정적을 철저히 제거해 버렸습니다. 막강한 부를 이룬 나라를 경영하는데 하나님 중심 사상은 낡은 가치관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이념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교해서 교역량을 늘려야 하는데 다른 나라의 신앙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용어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상대적 가치과 다원적 가치관 종교 다원주의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선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와 정략결혼을 합니다. 이방 여인 가운데 정실이 700명, 소실이 300명이나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빼앗긴 여인들을 통해서 그들이 섬기는 우상 사상이 솔로몬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과 출세라면 아무 우상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일등을 지향하고, 거대함을 지향하고, 화려함을 지향하고, 드러냄을 지향하고, 안정과 권력을 지향하는데 필요하다면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경고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품에서 자란 여로보암을 택하였습니다. 솔로몬이 밀로성을 건축할 때 이 청년을 지도자로 발탁하였습니다. 11장 28절을 보십시오. 큰 용사였습니다. 부지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들판에서 두 사람만 있는데 아히야 선지자가 여로보암 앞에서 옷을 벗는 것입니다.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왕 또는 선지자의 의복은 왕국과 왕권을 상징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히야의 행동은 여로보암이 열지파의 왕이 된다는 왕권수여의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11장 33절을 보십시오. 무엇입니까? 솔로몬이 예배를 잘 못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37절 3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되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솔로몬의 귀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결국 애굽으로 망명을 갑니다. 결국 솔로몬이 죽자 백성들은 그의 아들 르호보암을 거부하고 애굽에 망명한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열왕기 상 12장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로보암은 혈통적으로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아 왕이 된 것입니다. 망명자입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적국에 투항한 사람입니다. 배신자입니다. 여로보암이 잘 나서가 아니라 전 정권 솔로몬에게 민심이 이반되었기 때문에 왕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지위에 오르고 어떤 역할을 감당하게 될 때 꼭 내가 잘나서만 되는 것입니다. 상황적 변수에 따라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잘못된 예배를 회복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법도인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깃드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에덴의 복이 넘치는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는 두 마리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것을 벧엘과 단에 세워놓고 예배드리게 하였습니다. 우상 숭배의 근거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금송아지는 그가 애굽에 있을 때 아피스와 므네비스를 통해 배웠을 것입니다. 물론 우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송아지로 형상화시킨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은 곧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여로보암의 의도대로 단에까지 가서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입니다(30절).

그러나 여호와의 신상인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은 출 20:3; 34:17; 레 19:4; 신5:8에서 명한 우상숭배 금지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출 20:23; 신4:15-18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의 신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십계명 제 2계명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습니다(신 12:5-7)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이미 11장 36절에서 여로보암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나의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예배의 대상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리와 쾌락을 위한 이용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것입니다. 의식 있는 레위인이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을 반대하여 남쪽 유다로 가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세 시대 때 성직 매매와 같은 것입니다. 성직의 타락입니다.

세 번째는 절기를 임의대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본래 7월 15일에 장막절을 지켰는데 8월 15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북쪽 지방의 추수 때가 남쪽 지방보다 한 달 늦기 때문에 이를 의도적으로 바꾼 것입니다. 편리주의를 택한 것입니다. 오늘날 말하면 예배 대상과 예배 주관자와 예배 장소, 예배 시간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면죄부 주기 위해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역입니다. 개혁이 아니라 개악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반역으로 갚으면 안 됩니다. 아담의 실패가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반역으로 갚아 인류에게 원죄가 들어왔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자신의 도구로 삼아 자신이 왕이 되려하고 자신이 최고가 되려고 합니다. 여로보암은 일개 백성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의 종교정책은 제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의 집은 물론이거니와 북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 되는 중대한 범죄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책임 있는 지위에 있을수록 반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지식이 있으면 지식이 있을수록, 권력과 명예와 물질이 주어지면 그것으로 반역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이것들이 방해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어진 은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반역하는 요소로 사용되면 안 됩니다.


2. 사명을 이루는 방법에서 우리는 나의 마음을 판단 기준으로 삼지 말고 여호와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 여로보암이 이런 일을 하였겠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마음에 스스로 이릅니다. 자기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삼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마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택하여 세운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고자 올라가면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단과 벧엘에서 예배를 드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세울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11장 38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길을 걷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견고한 집을 세워주신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자신은 여호와께 취한 바 된 왕임과 다윗과 같이 행할 때에 견고한 집이 세워지며 이스라엘을 소유할 수 있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똑똑히 들은 사람입니다(11:37-38). 그리고 르호보암에게 속한 십 팔만이라는 대군이 자신을 치러 예루살렘에 모였다가 “싸우러 올라가지 말라”는 여호와의 말씀 때문에 그들이 다시 돌아갔음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12:20-24). 그렇다면 여로보암은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따라 다윗과 같이 나라를 다스려서 자신과 나라를 향한 여호와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 23:19)”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님 안에서 승리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도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기도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영원한 천국 있다고 하셨으며 있는 것입니다. 재림하신다고 약속하셨으면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마음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두려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두려움입니다. 이 긍정적인 두려움은 우리의 삶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긍정적인 두려움은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 줍니다.

둘째는 부정적인 두려움입니다. 문제는 부정적인 두려움입니다. 이 부정적인 두려움은 네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첫째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두려움이란 괴물은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잠재력을 쓸 기회를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나폴레옹 힐은 "공포는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하고, 모든 상상을 파괴하며, 모든 자신감을 꺾어 버리고, 모든 열성을 지워버리며, 모든 의욕을 없애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과 불행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직 심리학 박사인 앨런 다운스는 [리더여, 두려움을 극복하라]라는 책에서 인생 성공의 핵심이 바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능을 개발하는데 가장 커다란 적이 바로 공포 즉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그 재능의 극대화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재능의 숨통을 죄고 있는 공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비난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피해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셋째는 우리의 행복을 방해합니다. 두려움은 대인 공포증, 광장공포증, 고소공포증, 질환공포증, 죽음공포증 등과 같은 심각한 만성 공포증 환자가 되어 버립니다. 워즈워드는 "두려움은 수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힌다." 라고 했습니다. 세네카라는 사람은「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행복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넷째는 우리의 성공을 방해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린다 새퍼딘은 "두려움이 나를 망친다."라는 책에서 두려움은 사람을 수동적이고 소심하게 하고, 늘 경계심을 품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자신이 없게 만들고, 매사에 비판적이게 하여 자신을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맡은 사람들은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이 두려움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거대한 골리앗 앞에 다윗이 두려움에 질렸다면 골리앗을 무너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두려워했다면 어떻게 나아가 사명을 이루었겠습니까? 홍해 앞에 두려웠다면 어떻게 지팡이를 내 밀었겠습니까? 여호수아 여리고 성에서 두려웠다면 어떻게 성을 돌 수 있었겠습니까? 말씀 붙들어야 합니다.

학문적으로 연구를 하였습니다. 영국 런던 대 정신의학연구소의 로버트 플로민 교수팀의 연구에 의하면, 지능지수(IQ)보다 '자신감'이 학업 성취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7~10세 쌍둥이 3,700여 쌍을 대상으로 영어· 수학· 과학 성적과 IQ,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자신감) 등을 조사한 결과, IQ는 높지만 자신감이 없는 소극적인 아이보다는 IQ가 낮더라도 매사에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아이가 결국 공부도 더 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감은 성공의 토대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25절을 보십시오. 두려우니까 세겜 성을 건축합니다. 부누엘 성을 건축합니다. 군사 요충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의 노역으로 고통 받으면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는데 그 일을 또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타협하고 제사를 바꾸어 버립니다.

사명 앞에 서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이사야를 통하여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마음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명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3. 실수할 때 우리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 때 회개하여 새롭게 일어서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13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경고를 여로보암에게 전하기 위하여 벧엘에 파견된 여호와의 전령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신앙인을 통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목회자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등 신실한 신앙인을 통해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의 금송아지 단을 향해 ‘요시야’가 산당 제사장을 단위에 사를 것을 외칩니다(2절). 그리고 그가 외친 여호와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조’로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질 것을 말합니다(3절).

그 때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명령하며 손을 펴자 그 손이 말라서 다시 거두지 못하는 ‘징계’가 내려집니다. 그리고 단이 갈라져 재가 단에서 쏟아지는 예조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4-5절). 이러한 예조 앞에서 여로보암 왕은 자신의 손이 다시 회복되도록 ‘하나님의 사람’에게 은혜의 기도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를 받아들여 기도하자 왕의 손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6절). 이때 여로보암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습니다. 벧엘의 금송아지 숭배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경고를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의 삶을 통하여 경고합니다(7-10절)

기적을 체험한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신과 함께 집에 들어가 몸을 쉬고 예물을 받을 것을 제안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8, 9절을 보십시오. 모두 거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을 경고하는 것 외에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장소에서의 그 어떤 활동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벧엘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고 벧엘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때 왕은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의 징계를 통해 여로보암도 징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11-32절)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져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십니다(19절). 여로보암이 잘 못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로보암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지키지 않고 범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3장 33절을 보십시오.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일반 백성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아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솔로몬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어떤 징계를 받습니까? 14장 1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병들었습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하고 얼마나 교만한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강퍅한 바로도 자기 자식이 죽을 때는 돌이켰습니다. 다윗도 자기 자식의 죽음 앞에 철저히 금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아히야가 나이 들어 눈이 어두워지니까 오히려 속이려고 합니다(왕상14:1-5) 여로보암은 결국 육신의 눈이 어두운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장님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속지 않으십니다(6-9절)

아히야는 육신의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여호와께서 변장한 자가 누구인지

알게 하십니다(6절). 그리고 그에게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지적하게 하십니다(7-9절). 그의 죄목은 자신을 위하여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만들었던 것이며, 우상을 만든 것이었습니다(9절).

하나님은 여로보암을 세운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최후의 경고를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아히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증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14장 9절, 10절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여로보암의 비극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가 죽습니다(17) 자신도 죽습니다. 여로보암의 집에 속한 사내들이 모두 죽는 것입니다(10절). 특히 이들은 여호와께 선한 뜻을 품었던 아비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들짐승의 밥이 되어서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13절).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 중에 묘실에 들어갈 자는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 밖에 없습니다(13절). 그렇게 유지하길 원했던 정권은 끝이 나고 결국 첫 출발부터 이스라엘도 버려지게 된다는 심판을 선고받습니다(16절). 이어 왕이 된 아들 나답은 바아사에 의해 모반을 당하고 모든 집안사람들이 멸절을 당하게 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합니다(15:25-31). 한 사람 때문에 개인과 가정 나아가 나라가 망해버리는 비극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이스라엘 역사에 뿌리 깊게 내려 이스라엘의 역사를 비극적 결말로 치닫게 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범죄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로보암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정작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눈속임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못이 있을 때는

고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지정의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 43:25)”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우리는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반역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을 이루는 방법에 있어 나의 마음을 판단 기준으로 삼지 말고 여호와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실수할 때 대처 방법에서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 때 회개하여 새롭게 일어서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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