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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주의 오심을 보는 자 (호 6:1-3, 눅 2: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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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오심을 보는 자 (호 6:1-3, 눅 2:15-20)

2011년 성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우리 모든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또 송년주일을 맞았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주일에 하나님께서 올해에 주시기로 예비하신 축복이 각 가정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올해는 유난히 큰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각 언론사들이 올해의 10대 뉴스를 거의 선정했을 무렵에 김정일의 사망 소식이 들려 전 세계가 요동쳤고,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뉴스거리가 풍성했습니다. 좋은 일들도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삼수 끝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고 다른 나라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경제가 비교적 수지가 좋았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경제영토가 넓은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K-pop’이 세계적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아마 올해의 단어를 꼽으라면  ‘K-pop’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K-pop은 세계적 명품이 되었습니다. 왜 세계인이 K-pop에 열광하는가를 아는 것은 선교에 아주 중요합니다. “왜 청소년은 아이돌에 열광하는가”라고 하는 데 대한 대답은 자아정체감, 자아 존중감 그리고 또래집단에 대한 동조 현상이라고 합니다. 
  
pop의 원조인 영국, 미국에서도 K-pop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외국 청소년들이 한국 아이돌을 보러 옵니다. 우리 아이돌이 외국에 갈 때는 공항에서부터 공연장까지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우리 가수들의 얼굴을 한 번 보려는 열망이 가득한 것을 보면 신통하기도 합니다. 이런 열망을 가진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때로는 이런 정도의 열정과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 추운날 밤 시위현장에 수천 명이 오던데 왜 교회는 오지 않을까요? 가끔 이런 모습을 보며 이 생각을 하면 목회자로서 자괴감이 듭니다. ‘더 맑고 좋은 꼴이 흐르는 교회는 왜 못 올까?’라는 생각이 들면 목사로서 회개도 합니다. 오늘 예배에 오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우리 예배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에 한 시각장애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를 원하느냐고 물었는데 그 사람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누가복음 18:41에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시각장애인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보는 것입니다. 보기만 하면 다른 모든 것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만을 구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의 기자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던 것이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면 주님께서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에 주님이 얼굴을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꼭대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힘써 올라갔고 올라가는 모세를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출애굽기 3:4에는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고 합니다. 주님을 보려는 열망을 가진 자에게 주님은 보여주십니다. 주님을 보려고 다가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동방의 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2:2에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합니다. 동방이란 페르시야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지금의 이란입니다. 지금의 이란이나 이라크이면 상당히 먼 길인데 그 먼 길을 마다않고 왕을 보려고 하는 열망으로 달려왔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를 열망했습니다. 누가복음 19:3에는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오시는 것을 알고 언제 다시 오실지,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예수님을 간절히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그의 열망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고, 구원을 선포 받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45에는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14:8에는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열망이 넘쳤습니다. 14:9에는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약에는 소리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실제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나 보고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첫 성탄에 주님의 오심을 보았던 들의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처럼 주님의 오심을 보고 경험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보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첫째, 하늘의 소리를 듣고 보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누가복음 2:15에는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라고 합니다.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맨 먼저 보았습니다. 자기들의 지혜로 알고 본 것이 아니라 천사의 지시로 알았고 순종하여 가서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하늘의 계시에 민감한 자, 순종하는 자가 지금도 주님을 만납니다. 
  
이 말을 전하고 천사가 하늘로 올라가자마자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라고 합니다. ‘이제’라는 말은 강조를 위한 접두사입니다. 긴급성을 의미하며 말씀에 대한 응답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한 것은 하늘의 소리를 순종하고, 확인하고, 행동으로 옮기려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런 긴급하고 간절한 마음이 만남의 조건입니다. 
  
누가복음 2:16에는 “빨리 가서”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려고 하는 열정과 호기심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주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 빨리 순종하는 자가 주님의 오심을 보는 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가 주님을 보는 자입니다. 주님의 복을 받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괜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2장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다음날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주저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번제단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모든 것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였을 때에 일어나 따르니라고 합니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는 말에 성경은 따르니라고 순종하였음을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이 와보라고 했을 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며 따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제자의 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소리에 민감하고 즉각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제자는 부르실 때 속히 대답하고 즉각 실천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을 가다가 하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놀라서 말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늘에서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고 다시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울은 눈이 감긴 채로 남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아라고 하는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버리는데 많은 시간이 요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즉각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하늘의 소리를 처음 들은 순간부터 하늘의 소리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가 제자들에게는 중요합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으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천로역정’ 제2부 후반에는 ‘절망거인’(Giant Despair)으로부터 구출 되는 순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낙심씨’(Mr. Despondency),  그의 딸 ‘질겁’(Much-afraid), 다른 사람들보다 더 순례길 힘들게 만든 ‘심약씨’(Mr. Feeble mind) 그리고 삼촌 ‘두려움씨’(Mr. Fearing), 지팡이 없이는 조금도 앞으로 못 가는 ‘주저씨’(Mr. Ready-to-halt)등이 등장합니다. 십자가를 향한 순례의 길에도 질겁하고, 심약하고, 두려움이 있고, 주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5심’(心)만 있으면 공부하는 것이나, 돈벌이하는 일이나, 인생 살이하는 일이나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5심이란 열심, 합심, 성심, 양심, 자존심이랍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을 찢으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봅니다. 마음으로 열심을 다하고, 마음이 하나가 되면 겁날 것이 없고,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1891년 11월 25일에 쓴 게일목사님의 선교편지가 미국 장로교회의 도서자료실에 남아 있습니다. 게일 목사님을 지원한 선교회의 엘린우드 박사님께 보낸 편지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이렇게 쓴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고급관리하면 그들의 정직에 대해 아는 대로 그렇게 정직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관습과 관행들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가족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바르게 살 수 없고, 부요하게 살 수 없습니다. 
  
호세아 6:3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아야 합니다. 대강 아는 것이 아니라 열정을 가지고 알아야 합니다. 성탄의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에게 있어서 목자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보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영광을 돌리는 자입니다. 

누가복음 2:20에는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합니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왕이 나셨습니다. 구유에 나셨습니다. 강보에 싸여 있습니다. 천사가 일러준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예수님을 보러 갔습니다. 
  영광을 돌리는 자가 주님의 오심을 봅니다. 영광을 돌리지 않고 주님을 볼 수 있습니까? 주님을 보면 저절로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주님을 보면서도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면 눈으로는 보았지만 마음으로 주님을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영광을 돌리다’는 말은 헬라어로 ‘독사조’라는 말입니다. 누가복음에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찬양으로 끝맺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말한 것이 들은 바가 실제로 본 것과 똑같음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찬양 돌려야 할 일입니다. 천사가 찬양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영광과 평화를 함께 몸에 품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영광과 평화가 함께 선포된 이 날이 성탄절입니다. 이 사건이 구원입니다. 이 일이 온 인류에게 은혜입니다. 
  
성탄은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입니다. 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존재이십니다. 그 영광이 예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그 자체가 영광이며 모든 사람에게는 평화인 것입니다. 
  
영광을 돌리는 것이 피조물의 책임이며 자세입니다. 우주 전체에서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단 두 가지 존재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는데 그것은 타락한 천사인 악마와 우리들 즉 인간입니다. 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아는 것은 인간의 온전한 삶의 자세입니다. 
  
‘영광돌리다’(glorify)는 말은 아름답게 하다(beautify)와 같은 말입니다. 아름답게 하다는 말은 보통 ‘어떤 것을 본래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다’는 뜻입니다. 아름다움을 개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영광 돌리다’는 말은 ‘확대하다’(magnify)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확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역과 하시는 일을 확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교에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학교에서 수석을 한 우수한 학생입니다. 공부를 잘 할 뿐만 아니라 탁월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영국의 전국 대회에서 금메달을 얻어 보장된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캠퍼스 집회에 참여하여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가겠노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 때문에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중국 땅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중국에서 10여 년을 섬긴 후 그의 육신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쇠약하였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투병 생활 하던 중 다시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결정이라며  만류하였습니다. 

이때 스터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날 위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받고 즉각 따르는 것이 제자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마음에 이루어지면 변화하게 되고 헌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탄은 놀라운 기적적 사건입니다. 말씀이 심령에 꽂힌 것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을 크게 확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심은 영광 돌릴 일입니다. 광야의 성막, 예루살렘의 성전이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가정, 교회, 나라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찬송이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들이 영광을 돌리고 찬송이 가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지난 번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에 수라바야에서 사역하시는 박흥신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우리교회 박은옥권사님의 동생입니다. 수라바야에는 기독교 국가로 독립한 동티모르에서 쫓겨 온 반대세력인 회교도가 이주하여 생긴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마을에 딴떼 빼라라는 80세가 되신 할머니가 있었는데 작년에 돌아가셨답니다. 그 할머니는 온갖 병으로 고생하고 만약을 다 써도 안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낫지 않던 병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되었습니다. 지금도 온갖 잡된 신을 섬기는 그 나라에서는 사도행전적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나은 것을 보고 마을 사람 3,000명이 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골수 회교지역에 기독교학교를 세웠습니다. 쓰러져 가던 학교에 지금은 학생이 넘친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에게 기적이 일어남으로 저절로 복음이 전파 되어 지금은 아주 활발하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우리 가정에 탄생하시면 지금도 사도행전적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 가정에는 영광과 찬양이 넘칩니다. 예수님 탄생하시면 삶이 변화되고, 순종의 삶을 살게 되고, 말씀의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가정과 개인의 삶이 매일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의 삶이 기적을 맛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의 입에 찬양이 가득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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