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절]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요일 4:1-6)

첨부 1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요한일서 4:1-6)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한 주간 주님이 주신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지내셨습니까?   그리고 그 평안을 누군가와 나누어보았습니까?  기쁜 성탄절 아침입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만큼은 모두가 기쁜 얼굴로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축복합니다.   

한 해 동안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 모든 분들 참 감사하며 축복합니다.  교회 식구들을 위해 섬긴 모든 일들은 곧 교회의 주인이며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 귀한 일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이웃들을 섬긴 것 역시 주의 이름으로 베푼 따뜻한 마음입니다.

남을 섬긴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꺼리고 힘들어하는 일을 대신 맡아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거기다 정신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섬김은 나를 낮춤이고 다른 사람의 아래로 내려와야 할 수 있는 일이니 사실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부담을 기꺼이 담당할 때 누군가 은혜를 입게 됩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식사하실 때 앉았던 선생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동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닦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섬김이며 섬김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속된 말로 예수께서 완전히 망가지셨습니다.  그렇게 망가지지 않고 제대로 된 섬김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오늘 성탄절 아침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져 오심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 클로스나 화려한 성탄 장식이 아닙니다.   자기를 한없이 낮추시고 세상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십니다.   그의 낮아짐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소망 없이 망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를 구하시려고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심이 성탄절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외친 천사들의 합창은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한 마디로 압축하여 요약한 메시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땅은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어둡고 참혹하며 절망뿐인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죄악에 빠져 소망이 없는 죄인들의 현주소입니다.   그런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과 낮고 천한 인간 사이에 죄로 가로막혔던 담을 헐고 화해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서로 하나되게 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에게 평화라고 선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메시야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이, 그 이름의 뜻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세상에 오신 날,   아기로 탄생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기로 태어난 순간 어머니 마리아와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돌봄을 받고 보호 아래 살아야 하는 연약한 유아였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틴의 유대 땅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사람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호흡하고 같은 하늘 아래 생활하셨습니다.  배고프면 드셔야 했고 너무 피곤하여 출렁이는 나룻배 안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이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려고 사람들의 손에 붙들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분도 우리와 동일한 몸을 가진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는 분이시지만 우리와는 달리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히4:15).  육신으로는 시험도 받으시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일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이후로는 시간과 공간 제한이 없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너희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니 그는 진리의 영이며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있는 하나님의 영이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말에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요16: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육신으로 함께 하며 제자들을 중심으로 일하시던 제한된 방식이 아니라 영으로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려고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전에는 한 공간과 같은 시간에 있는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던 주님이 지금은 성령으로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시고 보호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은 성령과 교감하며 주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립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란 무엇입니까?    돈이 넉넉할 때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건강할 때 느끼는 자신감입니다.   원하는대로 진학하고 취업이 잘 되며 부모와 자녀들이 탈없이 지낼 때 얻는 안정감입니다.  그런 평안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누리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지하고 힘이 되었던 그런 것들이 사라지면 평안도 함께 사라집니다.  혹시라도 사라지면 어쩌나 불안하여 그것 지키느라 맘을 놓을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 평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은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이 없고 부족해도 내 속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함으로 얻는 기쁨이며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화해로부터 오는 안정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몇 일 전에 큰 바람이 불었지요.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면 우리 집 뒷뜰의 키 큰 미류나무들이 금방이라도 넘어져 집을 덮칠 듯 휘청거립니다.  폭풍이 부는 바닷가의 파도소리처럼 온 세상을 쓸어갈 듯 우르렁거리지만 집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있으면 딴 세상처럼 조용합니다.  그런데 창문 하나라도 열려 바람이 들어오면 안방 창문 틈새로 공기가 빠져나가며 휘파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립니다.   납량특집 귀신울음처럼 듣기 거북하고 심난하여 열린 문을 재빨리 닫아야 합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라는 바람이 아무리 몰아쳐도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집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내 마음의 열린 틈으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면 나를 심난하게 만들지만 문을 닫으면 평안을 회복합니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여러분의 평안을 지켜주고 있습니까?   주님이 나의 방패와 산성이 되어주시고 성령의 돌보심이 나를 평안하게 합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지키시는 보호자와 상담자가 되시며 위로자가 되십니까?    그분을 문 밖에 두고 계십니까 아니면 지금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십니까?   아기로 탄생하신 예수께서 이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내놓으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영지주의자라고 불리우는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학적인 이론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육체는 부정하고 썩어질 물질에 불과하며 영혼은 우주의 근원인 절대자와 교류하는 한 차원 높은 정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했습니다.  예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라는 껍질을 잠시 입었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육체를 벗어던지고 하늘로 돌아간 분이라 주장했습니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일 뿐 세월이 흐르면 낡아지고 썩어 없어질 물질이니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불완전한 물질을 입고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진짜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잠시 빌려 쓰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하늘로 돌아가버렸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라는 기발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죽음과 부활도 부정하였고 하늘로 올리운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의 소망도 부정하였습니다. 

육체를 임시적이고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였기에 극단적인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극단적인 쾌락주의자들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은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였습니다.   대신 고차원적 신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영적인 능력으로 신과 교류하면서 어느 순간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절대자인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구원이라 여겼습니다.  스스로 신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를 대신하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런 사상을 퍼뜨렸던 사람들이 벌써 활동하였습니다.   요한은 이런 사람들을 거짓말하는 자 혹은 적그리스도(요일2:22)라 불렀습니다.   기독교 초기에 이런 류의 사람들이 복음을 어지럽혔으며 그런 철학적 사고방식은 오늘날도 이름만 바꾸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깊은 명상이나 고도의 정신적 훈련같은 노력으로 신적인 능력을 가질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판할 때 어떤 종교를 따르든지 나름대로 구원의 길이 있는데 왜 기독교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고집하는가?  다른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무시하고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독선과 아집이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종교들도 사람이 선하게 살고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며 살라는 좋은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할 도리이며 기본적 진리이지 그것이 곧 구원이나 신의 자리에 이르는 길은 아닙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죄를 물리치고 완벽한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믿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자신하고 또 되려는 교만함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그럴 능력이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구태여 사람으로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말씀처럼 세상에 속한 영들과 하나님께 속한 영들을 구분하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사람으로 탄생하신 그 사건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고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부인합니다.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도무지 믿어지지 않음은 아직 그 은혜를 체험하지 못함입니다.  아직 믿어지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우리에게 그 은혜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믿어지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질 때 격려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탄절이 되면 세계 곳곳에서 평화와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선포됩니다만 그 평화와 사랑은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주이심을 시인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 평화와 사랑조차 세상이 주는 것처럼 말합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성탄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죽임당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탄생하신 주님의 희생을 기억합시다.   자기를 낮추시고 죄인을 위해 생명을 주신 사랑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은 영지주의자들도 하는 일입니다.   제자와 사도들의 삶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인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가?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의 바로 다음 7절과 8절에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 삼으시려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 사랑을 모르면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랑을 압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이 나의 낮아짐이 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며, 그분의 섬김이 나의 섬김이 되게 합시다.  참 사랑은 마음이나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참 사랑은 나를 낮추어 다른 사람의 자리로 내려앉는 행동입니다.  그것이 섬김이며 나눔입니다.  마음을 넓게 열어봅시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던 자리에서 형제와 이웃을 향한 자리로 옮겨 낮은 자리로 기꺼이 내려갑시다.  성탄절 아침에 사람으로 오신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우리 가운데 이 사랑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말씀 속에 지내며 새해를 소망 중에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