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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가장 귀한 예물 (마 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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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귀한 예물 
    
 
옛날에 미국 석탄 광부들이 지하 탄광에 들어갈 때는 카나리아 새를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카나리아는 예민한 호흡기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유독한 환경을 광부들 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카나리아가 기침을 하고 숨 막혀 하기 시작하는 것은 광부들에게 탄광의 공기가 오염되어 곧 위험 수준에 도달하니 빨리 탄광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분명한 신호가 되었습니다. 

지하 탄광에서 광부들에게 탄광의 공기가 얼마나 오염되었음을 카나리아가 알려 준다면 우리 사회에서 위기에 대한 경고를 알려 주는 카나리아는 누구일까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약자들이 말하는 행복이 사회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이 말하는 행복이 그 사회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두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사회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때 그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다 행복을 느끼며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만든 사회의 최고 시스템으로 평가 받고 있는 자본주의는 부의 극대화라는 본연의 의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빈부격차라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지구촌이 세계화가 되면서 그 빈부격차의 부작용이 극에 달해 곳곳에서 경고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신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영국에서 폭력과 약탈이 난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온 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에서는 젊은이들이 금융가와 자본주의의 부작용인 빈부격차에 대한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1%의 사람이 99%를 지배하는 사회구조가 불공정하다는 것입니다. 부와 빈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져 있으니 이것은 공정한 사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대로 된 분배가 없는 부를 중심으로 치우친 성장은 카나리아가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면서 탄광이 위험하다고 알리는 것처럼 사회 곳곳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결국은 위기로 몰리게 됩니다. 그 사회에 위기가 오기 전에 카나리아의 기침과 숨 가빠 하는 것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지혜가 지도자들에게는 필요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빈부의 심한 격차로 인해 사회가 어려워질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처신 중의 하나입니다.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조금이라도 배려하고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지혜의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극과 극의 갈등 구조가 나옵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족보에 실려 있습니다. 그 이름들을 살펴보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있는가 하면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베레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위대한 다윗과 솔로몬, 히스기야 등과 같은 위대한 왕이 나옵니다.

반면에 웃시야, 므낫세 왕과 같이 하나님을 거역한 포악한 왕이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다말, 라합, 롯,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마리아로 이어지는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조상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족보 안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갈등의 구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갈등들이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종의 갈등, 신분의 갈등, 성별의 갈등, 빈부의 갈등 등이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보좌에서 내려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의 가장 천한 곳인 마구간 말구유에 오신 것은 바로 이런 모든 갈등의 혼란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류와 사회가 반목하고 첨예하게 갈등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고자, 더 인정받고자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 보좌에서 내려 오셔서 이 땅의 가장 천한 마구간 말구유로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로 인해 심한 갈등과 반목에 쌓여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당신의 낮아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지하 탄광에서 오염된 공기로 인해 기침을 하며 숨쉬기 힘들어 하는 카나리아처럼 이 사회에서 외로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약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위로하시며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배고파하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몸이 병들어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섬김을 받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섬기는 자의 모습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을 버리고 이 땅의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말구유에 오셔서 인류를 섬김으로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마구간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헤롯왕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자신들의 높아짐과 기득권을 유지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난 것을 기뻐하며 말구유에 찾아와 경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방 박사와 양을 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카나리아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말하는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평화가 아닌 사랑에 의해 만들어지는 평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맞이하는 동방박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귀한 예물을 드리며 아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동방박사들입니다. 사람들은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보면 동방 박사는 원래 네 명이었다고 합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는 알타반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청옥과 루비, 진주를 가지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알타반은 다른 친구 동방박사들과 만나기 위해 열심히 가는 도중에 병든 가난한 히브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얄타반은 며칠간 그를 간호해 주고 떠나면서 아기 예수님께 드리려고 했던 루비를 그에게 주며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예물을 사용했다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알타반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헤롯왕이 죽이려고 하자 이미 애굽으로 피신을 한 후였습니다. 그때 비명소리와 갓난아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롯왕의 명령에 군사들이 갓난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순간 아이의 엄마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새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알타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남은 두 가지 예물 중에 청옥을 꺼내어 군인들에게 주며 그 아이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알타반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당신에게 바치려 했던 보석을 이 갓난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썼습니다. 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알타반은 33년간 예수님을 찾아 헤매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때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오늘 골고다에서 군인들이 예수를 사형시킨다지!’ 알타반은 깜짝 놀라 골고다 언덕으로 뛰어갔습니다. ‘내가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 내 진주를 주고서 그를 구해야지.’ 늙은 알타반은 있는 힘을 다해 성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성문 저편에서 몇 명의 장정들에게 한 소녀가 붙잡혀 끌려 오고 있었습니다. 옷은 찢겨지고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빚 때문에 종으로 끌려가는 소녀였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흐느껴 울며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알타반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진주는 저 사형 당하는 왕을 위해 써야 되지 않습니까? 이 소녀를 위해 이 진주를 쓰면 왕은 죽고 맙니다.’ 그러나 그 순간 알타반은 끌려가는 소녀의 애처로운 울부짖음을 듣고 자신의 진주를 장정들에게 내어주고 소녀를 구했습니다. 

이제 알타반은 아무런 예물도 없었습니다. ‘이제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하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갑자기 예루살렘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집들이 흔들리면서 무너져 내린 기왓장이 알타반을 덮쳤습니다. 70세를 넘긴 알타반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늙은 알타반은 죽어가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새로운 왕 메시아를 만나 경배하려고 평생을 찾아 다녔지만 그분을 만나지 못한 채 이렇게 죽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경배하려 준비한 보석들마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기도하는 그에게 ‘이미 너는 나를 보았는데 어찌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느냐? 이미 너는 나를 세 번 보았느니라. 너는 내가 베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느니라’ 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알타반은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음식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드렸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봐 드렸습니까?’ 그때 다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기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니라. 알타반! 너는 정말 훌륭한 나의 아들이다. 난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네가 작은 소자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네가 만난 불쌍한 사람들이 곧 나였느니라.’ 알타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평안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알타반의 이야기는 성탄의 진정한 의미와 성탄 예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기 예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쾌락을 중심으로 파티와 선물을 서로 주고받으며 즐깁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의 낮고 천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탄절이 되면 성탄헌금을 정성껏 모아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강서 지역 안에 심한 질병을 앓고 있지만 가난해서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치료해 주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행복한교회가 하고 있는 의미 있는 사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올해도 강서구에서 두 가정을 추천 받았습니다. 알포드증후군을 앓고 있어 그대로 두면 시력과 청각을 잃게 되는 이하은 학생과 혈액암을 앓고 있는 최경덕 학생입니다. 이들은 강서구에서 카나리아와 같이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어린 자녀들입니다. 2011년도 성탄 헌금으로 이 두 아이의 치료비를 지원하려고 합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인 알타반의 이야기를 통해 성탄 예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새기며 2011년도 성탄절을 맞아 우리 주변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는 행복한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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