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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요한의 예수 증언 (요 20: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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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예수 증언 (요 20:30-31)
  

오늘은 대림절 넷째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약속대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했지만 정작 오셨을 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오심을 알아야 할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지만 그들은 타락했고 세속화되어서 뇌물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예수께서 왔으나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 자신도 불행하고 백성들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해서 그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오신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요한이 그렇게 오신 예수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공관복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비슷한 간점에서 기록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요한복음을 넣어서 4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이 4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를 소개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의 성공을 주로 다루었고 마가복음은 예수의 고난을, 누가복음은 예수의 사람됨 즉 인자됨을, 요한복음은 예수의 영광을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그 중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요한이 기록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야고보와 형제였고 베드로 형제와 함께 어부생활을 하다가 함께 부름 받은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12명이었는데 다 순교하고 요한만 유독 천수를 다 누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요한도 순교하기 위해서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는데 기름 가마의 뜨거운 열 때문에 그 몸이 튕겨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석방되어 에베소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도요한이 후에 요한계시록과 요한 1,2,3서,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된 이유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며 예수를 믿어 그 이름으로 힘입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

마태는 마태복음 서두에서 예수님의 족보부터 먼저 소개합니다. 그리고 헤롯궁전을 말하고 동방박사를 소개하고 예수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시원하게 “예수는 왕이다”라고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빌려 타고 가셨는데 그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불렀다고 소개(마 21:5)합니다. 또 누가는 19장 38절에서 예수님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소리 질렀다고 기록합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런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와 나다나엘의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는 왕이시다”(요 1:49)라고 나타내며 본문을 시작합니다. 

거기서 나다나엘은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요한이 강조한 주제입니다. 이는 오병이어 사건을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가 공동으로 다루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사람들의 반응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이 “이 사람은 진실로 세상에 오시는 그 선지자이시다”(6:14)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그 선지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시리라고 예언되었던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실제로 왕으로 삼으려 했다고(15절)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4복음서에 공히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만 다른 복음서 보다 예수를 강하게 왕으로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2장 13절에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15절에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요한은 예수를 왕으로 분명하게 칭했습니다. 

또 재판정에서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붙잡혀 갔을 때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마 27:11, 막 15:2, 눅 23:2-3)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라”(37절)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18:39, 19:14,15). 그런데 묘한 것은 빌라도가 예수를 왕이라고 부르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가 왕임을 부인하고 “우리에게는 가이사만 왕이라”(15절)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거부하고 로마황제를 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쓰려고 하니까 대제사장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달라고 탄원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의 주문을 거절합니다. 요한은 이 대목을 놓치지 않고 “이방인인 빌라도 입을 통해 예수가 왕 되심을 증거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그 신앙의 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만일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거나 침묵하거나 우물쭈물하면 때로 사탄이 입을 여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을 보면 예수님이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거다라’ 땅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서 배가 뒤집힐 지경에 처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후 ‘거다라’ 지방에 도착 했을 때 귀신들린 자가 찾아오더니 “하나님의 아들이여”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제자들이 말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떨고 있을 때 귀신들린 사람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소리 지른 것입니다. 신앙이나 신학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루뭉수리하고 애매모호하며 불확실한 것은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사람이 나타나 제자들이 해야 할 고백을 대신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장로시취를 하는데 “예수님이 누구냐”고 묻자 지체 없이 “4대 성인 중 한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고백이 그러니까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도 분명하고 명쾌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왕이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다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어중 띤 고백입니다. 그에 반해 요한은 “예수는 왕이시다”라고 확신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분명한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영광 

공관복음서는 미래에 나타날 예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처음부터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1장 14절과 17장 24절을 보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 영광은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가지셨던 영광이라고 소개하고(17:5)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2:11, 11:4)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영광을 보고 예수를 믿었습니다(2:11, 12:42). 그 모습을 보고도 예수를 믿지 못함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5:44, 12:43). 또한 예수님의 공생애가 반쯤 지났을 때 헬라인 몇 명이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12:2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획기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건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28절). 

그리고 가룟유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13:

31)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인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야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는데 그 배반자가 가룟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신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므로 영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난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때가 왔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이 당신을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다 마침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4절). 우리들이 신앙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태는 성공에 초점을 두었고 마가는 예수의 고난에 초점을, 누가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에, 요한은 예수의 영광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었고 영광의 주님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영원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가 밤늦게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도리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니고데모는 그 시대 지도자인 산헤드린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 지도자가 어느 날 밤 호젓이 예수를 찾아와서 거듭남의 도리에 대해 묻습니다. 이는 아주 획기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삶에 대해서 관심 갖기는 쉽지만 영생에 대해 관심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를 멀찍이에서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강조하신 영생에 대해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고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거듭남이나 중생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그것이 나중에는 예수 믿음과 영생 얻음으로 결합된다는 것을 설명(15-16절)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생이나 중생은 예수를 믿는 믿음과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천국은 예수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시작되지만 동시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현재에 영생을 소유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심을 받아 완전한 영생에 들어간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서는 천국과 재림을 강조하는데 특히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뚜렷하게 증거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3:16)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육신의 출생과 전혀 다른 영적출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출생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출생하지만 영적출생은 하나님에게서 위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출생한다(1:13, 3:3,5,6,7)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리고(1:12)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3:3,5)합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구별된 사람들이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15:19).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제가 영생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3:16)이고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영생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6:40)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생명수이고 생명의 떡입니다. 또한 길이고 진리이시며 생명 되십니다. 그래서 그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6:35)고 말씀합니다. 예수 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고 목마른 자가 해갈되며 미래에는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몇 가지 천국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주신 천국은 에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천국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주신 천국은 영생입니다. 이 영생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 주신 천국이 죽어서 누리는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영생한 자 그리고 거듭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이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서 최고의 복은 이 천국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명성황후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 부인과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어느 날 명성황후가 미국이 어떤 나라냐고 묻자 언더우드 부인이 “미국은 땅이 커서 한 땅에 사계절이 다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작은 나라에서 살던 명성왕후는 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때 언더우드 부인이 “그 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눈물도 없고 탄식도 괴롭히는 나라도 죽음도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라고 말하자 명성황후가 충격을 받고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나도 그 나라에 가고 싶구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천국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이 영생과 부활과 천국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을 그것 때문에 보내신 것이라고 그 점을 증거 합니다. 사람은 영생과 천국 그리고 부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이기 때문에 아무나 알고 깨닫는 일이 아닙니다. 트리나 파울러스라는 사람이 쓴 “나비와 꽃들의 희망”이라는 책에는 나비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비가 되기 직전의 애벌레들이 하늘을 향해 서로를 짓밟으며 탑을 쌓아 올라갑니다. 모두가 높이 올라가야 나비가 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감은 채 앞의 벌레들을 밀치고 올라가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줄무늬 애벌레가 탑에서 내려오는 노란 색 애벌레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나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렵게 탑을 올라가지 않아도 기다리면 아름다운 나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줄무늬 애벌레가 순간 귀가 열리며 새로운 길,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줄무늬 애벌레는 올라가던 탑을 다시 내려옵니다. 이것이 인생의 대전환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나비성을 소중히 품고 살아가면 언젠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 영원성과 부활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하고 부활하기 위해서 저 높은 곳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신비를 아는 사람만이 다시 내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만일 부활이 없고 천국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고 천국이 없다면 굳이 예수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빡빡하게 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이렇게 매주일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주님만이 이 영원성, 부활성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영생의 주인이 우리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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