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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주님 때문에 충만하게 채워진 것들 (눅 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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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믿음의 고백을 하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이 넘칩니다. 예수님 때문에 승리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풍성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평안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건강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의 선언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대로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현관의 자물쇠에는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그 비밀 번호를 누르면 문이 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축복을 내 것으로 만드는 비밀이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원리를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들의 모든 것이 믿음의 원리를 따라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고, 믿음으로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언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 관심이 많으시고 우리의 말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민 14:28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이 넘칩니다. 예수님 때문에 승리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풍성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평안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건강합니다.”라고 믿음의 선언을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말대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MBC에서 병 안에 든 밥을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한쪽 병에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등의 좋은 말을 계속 해주고 한쪽 병에는 “미워, 저주해, 싫어”등 저주스러운 말을 계속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두 병을 비교해 보니 축복의 말을 들은 병에 있는 밥은 좋은 곰팡이가 피었고 누룽지 냄새 같이 좋은 냄새가 났습니다. 반면에 저주의 말을 들은 병에 있는 밥은 까맣게 보기 흉한 곰팡이가 피었고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자꾸 칭찬하고 축복하고 격려하면 건강해지고 생기가 넘치고 행복해 집니다. 반대로 자꾸 욕하고 저주하고 책망하면 약하고 병들고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자신에게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이 넘칩니다. 예수님 때문에 승리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풍성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평안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건강합니다.”라고 선언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말대로 됩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언을 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온갖 좋은 것들을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온갖 좋은 것을 풍성하게 준비해 두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이 준비해 두신 것을 선언하지 않고 마귀가 준비해둔 악하고 더럽고 추하고 약한 것들을 고백한다면 주님이 섭섭해 하실 것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들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본문은 그곳에서 성경을 읽으시고 앉으셔서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주님이 읽으신 내용은 성경 이사야 61장에 나오는 자신의 사역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님은 그 내용을 읽으신 후에 책을 덮으시고 앉으셔서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주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응한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응하였다는 말은 히브리어 ‘플레로오’ 인데 그 뜻은 ‘채우다,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이사야 61장에 예언된 그 말씀이 주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충만하게 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응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18,1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오늘 설교는 본문에 나온 주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응하여진 축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은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제가 복음을 깨닫고 이 말씀을 보면서 약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오셔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믿는 자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셔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왜 그 복음을 요약하시는 말씀에서 가장 먼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러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뭡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부요함 아닙니까? 가난한 자에게는 부자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영혼의 구원을 먼저 말씀하시지 않고 경제적인 회복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주님이 먼저 영혼구원을 말씀하셨어야 정상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당황한 것입니다. 저는 영혼이 먼저라고 생각했고 주님의 복음은 영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난한 자가 부자 되는 것을 먼저 말씀하셨으니 제가 당황을 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는 말씀은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부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가난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에덴은 낙원입니다.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 낙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부요하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지만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고 가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 창 2:17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하와를 찾아와서 유혹합니다. “하와, 그거 먹어도 괜찮아. 그거 먹으면 너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거야. 그래서 하나님께서 못 먹게 하는 거야” 하와가 마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바라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결국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그 실과를 아담에게도 줍니다. 아담은 바보 같이 하와가 준 그 열매를 먹고 하와와 함께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 영적인 죽음이 찾아오게 되고 육체의 죽음도 찾아오게 되었고, 환경적인 저주도 찾아와서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 창 3:17-19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사람이 범죄 하여 하나님을 떠나니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땅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은 땅이 되느냐 좋지 않은 땅이 되느냐가 결정 됩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온 세상으로 흩어진 후에 황폐하게 되었었습니다. 그 땅에 나무가 1000그루 정도 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회복시켜 주시면서 그 땅은 점점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1906-1990년 사이에 유대인들이 회복되면서 그 땅에 2억5천6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삼림이 울창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니 그 땅도 저주를 받더니 유대인들이 회복되어 돌아오니 그들이 사는 땅도 회복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복이 임하고 저주가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에 사람 하나 잘 들어오면 그 집안이 살고, 사람 하나 잘못 들어오면 그 집안이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사람이 잘 들어오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에 아합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아내를 잘못 만나서 망한 사람입니다. 아합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세벨은 열렬한 바알 숭배자였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을 움직여서 온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땅이 저주를 받아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말이 3년 6개월이지 그게 어마어마한 저주인 것입니다. 몇 달만 비가 오지 않아도 온 초목이 마르는데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합왕 당시에 이스라엘의 고통, 이스라엘의 가난의 원인은 우상인데 그 우상숭배를 하게 만든 사람이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세벨이라는 한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가난의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 룻기에 보면 나오미라는 저주 받은 할머니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을 때 모압으로 이민을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완전히 망해서 알거지가 되어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망했던 그 집이 룻이라는 며느리 한 사람 때문에 복을 받고 유명한 집이 됩니다. 그 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자자손손 유다를 통치하는 왕족의 가문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그 가문에 출생하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룻이라는 복된 여인 한 사람 때문에 망했던 가문이 흥하게 되고 영광스러운 가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면 주의 공로로 인하여 영적으로 부요하게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환경적인 축복, 물질적인 축복도 오는 것입니다.
   
성경 고후 8:9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난한 목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부요하신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과 환경을 바꿔버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보배로운 말씀인 고후 8:9을 가슴에 품어서 자신의 사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을 가난에서 해방시켜 풍성한 인생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 “복음이 들어가면 나라가 바뀐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에 들어가면 그 나라가 부요해 지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개인이나 가정에도 적용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믿는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믿는 가정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이 말씀의 실제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고 가슴에 품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의 환경이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주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나는 포로 된 일이 없는데...” 라고 말할 것입니다. 무엇에 포로 되었다는 말입니까? 죄에 포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죄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죄에 포로 된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도 죄의 포로가 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포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의 몸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이며 죄의 포로인 것입니다. 돼지 뱃속에서 태어나면 돼지고, 사람 뱃속에서 태어나면 사람인 것처럼 죄인인 어머니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니 죄인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자기를 믿는 자들의 죄를 청산하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성경 골 1:13, 14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름의 뜻대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는 여러분의 어깨 위에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있든지 둘 중의 한 곳에 있어야 된다.” 만약 우리가 죄를 예수님 어깨 위에 맡기면 우리는 죄용서 받고 의인이 되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죄를 우리가 짊어지고 있으면 그 죄 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지옥 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인데 나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은 주님의 어깨 위로 옮겨질 것이고 우리는 그 순간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하고 편리한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해도 믿는 순간 우리 안의 죄가 주님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삭제하기 위해서 우리는 컴퓨터의 원리를 몰라도 됩니다. 컴퓨터에 관한 지식이 별로 없어도 우리가 삭제할 문서를 지정하고 삭제 버튼을 누르면 컴퓨터가 알아서 지정된 파일을 삭제 시켜 버립니다. 죄로부터의 해방도 이와 같습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지 어떻게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셨고 그 분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의 고백만 있다면 우리의 죄는 주님의 공로로 자동 삭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의 포로가 된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3. 주님은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십니다. 
   
주님은 오셔서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한번은 주님이 길을 가시다가 소경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주님은 육신의 눈만 뜨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눈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영적인 세계를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도 부정하고 하나님도 부정하고 천국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부정했던 영적인 것들이 다 믿어집니다.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확실해 집니다.
   
제가 중학교 때 교회 다니는 동네 친구 두 명이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두 친구는 열을 올리면서 토론을 하는데 옆에서 제가 보니까 둘 다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데 제 생각에는 미치지 않고는 그런 것들이 믿어질 수 없더군요. 모세가 지팡이를 내미니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는데 하늘에서 만나라는 양식이 내려서 굶어죽는 사람이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기만 했는데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바다 위를 걸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승천하셨고,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데 어느 것 하나 제가 믿음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딱 미친놈들이더라고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제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령이 제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전에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제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영안이 열린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은 순간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6월 13일까지는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기도를 하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불같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고나니 주님이 믿어지고 주님만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진리도 다 믿어지더라고요.
   
사람이 영적인 눈이 열리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영적인 눈이 닫혔을 때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죽이고 감옥에 가두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보니 자기가 하던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핍박했던 기독교가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인 눈이 열린 후부터는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나니 사도 바울이 변한 것입니다.
   
한 죄수가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0년간이나 교도소 생활을 했습니다. 40년을 교도소에 생활하면서 워낙 성격이 포악한데다가 말썽을 일으켜서 간수들의 채찍에 수없이 얻어맞고 독방에 들어가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강한 훈련과 교육도 받았지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아도 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출소를 했는데 갈 곳이 없어서 기독교 계통에서 운영하는 수용소에서 하룻밤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전도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에게 복음을 듣고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는 즉시로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그렇게 모진 매를 맞아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그가 눈물을 펑펑 흘렸던 것입니다. 그가 안수 받는 순간에 성령이 임하셨고 성령이 임하시니 그에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기니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 것이고, 영적인 눈이 열리니 ‘하늘나라가 있구나. 하나님이 계시구나. 영혼이 있구나. 천국과 지옥이 있구나.’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완전히 180도로 변화되어서 그때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18년 동안 교회에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놀라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당신이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그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4백 번 가죽채찍을 맞고, 40년의 교도소 생활을 해도 변화되지 않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불과 1분 만에 새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분 만에 변화되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지금 이 곳에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우리와 함께 게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열고 성령님을 모셔드리면 성령님은 그 사람을 변화시키신 것처럼 여러분도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빛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둡던 마음이 밝아지고 어둡던 영적인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 고후 4:6에서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주님은 눈먼 자를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4. 주님은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여러분 가위 눌린 경험이 있습니까? 가위눌리면 꼼짝할 수 없습니다. 입도 벌리지 못합니다. 꼭 죽을 것 같지만 거기서 벗어나기가 너무 힘듭니다.
   
마귀에게 눌리면 가위눌린 증상하고 비슷합니다. 마귀가 마음을 누르면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육신을 누르면 육신에 병이 생깁니다. 환경을 누르면 환경에 문제가 생기고, 관계를 누르면 관게에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기가 너무 힘듭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마귀는 처음에 우리를 따라 다닌다고 합니다. 따라다니다가 안 쫓아내면 붙어 다니고, 붙어 다니다가 안 쫓아내면 그 다음에는 올라탄답니다. 올라타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억압합니다.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에게 눌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마귀가 있기는 어디 있느냐”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서 보면 마귀가 사람을 누릅니다. 마귀에게 눌리면 영적으로 답답해지고 마귀가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닙니다.
   
전기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기의 힘으로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영적인 세력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력은 두 가지입니다. 선한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이 사람을 움직이면 선하고 아름다운 생각과 말을 하게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맺고 인생이 행복해 집니다. 악한 영인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마귀에게 눌려서 마귀가 끄는 대로 끌려 다니면 인생이 악하고 더러운 열매를 맺게 되고 인생이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많은 사람들을 누름으로 이 세상을 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도둑질, 거짓말, 음란, 방탕함, 미움, 이간질, 오해, 부정적인 것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늘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좋은 것을 주십니다. 희망, 행복, 감사, 선함, 아름다움, 사랑, 기쁨 등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으로 충만하면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들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귀는 우리들에게 나쁜 것들을 줍니다. 미움, 분노, 시기, 질투, 음란, 불의, 추악, 불안, 우울, 절망 등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도 받아드리지 마십시오. 많은 경우 마귀가 스트레스를 통해서 육체에 질병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를 병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배후에도 마귀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롯을 시험에 빠뜨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뜨렸던 것도 마귀의 짓입니다.
   
마귀의 눌림으로부터 자유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면 마귀의 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행 10:38에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감사한 것은 예수님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셨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마귀의 눌림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성경 눅 10:19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여기서 뱀과 전갈과 원수는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는 믿음의 선언을 통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21살에 군대에 갔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에 군대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상병을 달자마자 28살 먹은 이등병이 들어왔습니다. 그 이등병은 축구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 출신이고 대학원을 나와서 중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다가 군대에 왔습니다. 힘도 좋고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등병은 제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국가로부터 그 이등병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이등병을 다스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제가 입을 벌려 말하기만 하면 그 이등병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도 이와 비슷합니다.
   
마귀가 나를 누르면 입을 열어서 대적하면 됩니다. 마귀가 주는 것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면 그것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그냥 두면 마귀에게 눌리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생각과 언어를 바꾸고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가라. 내 마음에서 떠나가라.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명령하면서 대적하십시오. 성경 약 4:7에 보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또 마귀가 주는 것들을 대적하고 여러분의 마음에서 그런 것들을 제거하면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건강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환경적인 축복도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주님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응한 것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채워진 것 네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주님은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십니다.
   2. 주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3. 주님은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십니다.
   4. 주님은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말씀을 믿으시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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