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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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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마 2:1-12)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 이미 예수님에 대해 믿고 있었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다만 어디서 탄생하실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와서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도 동방박사와 비슷한 입장에 있습니다. 

교회를 나온다는 말은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각을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차비를 내고 자기가 수고를 해서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누가 억지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잘 모릅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예수님에 대하여 알려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물어본 것처럼 어디서 나셨느냐 또 어디 계시느냐 많은 것을 배워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잘 모르면서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얘기냐. 그것은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경험입니다. 이것은 남들에게 말한들 사람들이 그것을 깨달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동방에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별을 보고 온 게 아니고 이 동방박사 세 사람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것이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주관적인 경험일 수 있지만 본인들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결국 신앙은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을 설명하고 합리화하고 연구하고 의논하고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신앙에는 신비한 요소가 있습니다. 영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신앙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제하면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포스트모던 시대에 산다고 하더라도 신비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신비한 것이고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되는 동기는 신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이것은 사울의 일생일대의 사건입니다. 그를 사도바울로 만든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일행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울만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사울이 남들보다 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은 합리적인 사람이에요. 그는 학자요, 변론가요, 남자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경험을 할 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이런 일이 발행하고 그의 일생을 뒤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지식과 믿음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믿기 때문에 알게 됩니다. 만일 지식과 믿음이 비례한다면 신학교 교수님들 · 신학자들 · 종교학자들이 제일 믿음이 좋을 것입니다마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지식과 믿음이 비례한다면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이 제일 믿음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방박사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가서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동방박사들이 물어서, 물어서 갔습니다. 

학생이 스승보다 믿음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에 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어디서 탄생하실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동방박사들의 순례는 무위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의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답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우리의 신앙이 완성될 수가 있지 만일 적절한 답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도 신앙이 도중에 중단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질문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믿기 때문에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은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성경이 어떻게 기록됐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성경을 기록했느냐 알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있었던 것이고 늘 있는 것이지 굳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알 필요가 있느냐. 불교의 우주관과 비슷하지요.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 노출된 서구문명이 천문학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가 빅뱅에서 시작했다는 이론을 만들고 신의 입자라고 부르는 힉스를 발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기원에 대해 찾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본인들이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노출된 서구인들이 진화론을 만들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이 하나님을 배제한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하나님 없이 인간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쾌재를 부를지 모르지만 저는 늘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왜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이 하나님을 배제한다고 생각하느냐는 거예요. 왜 진화론이 하나님을 배제한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육일 만에 창조하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진화론의 순서와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가 일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마지막 날에 창조하셨다는 말은 인간이 최고의 작품이요 최대의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은 진화론의 결론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우리의 믿음까지 공유하는 것은 아니에요. 동방박사의 질문에 해답을 제공한 서기관들이 동방박사들과 같은 믿음을 공유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가서 예수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해답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옛말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한 것처럼 모든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통합니다. 진리를 찾는 모든 탐구는 예수님께로 통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마치 사랑을 찾는 모든 탐구는 하나님께로 통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사랑을 찾고 또 찾다보면 결국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처럼 사람이 진리를 찾고 또 찾으면 결국은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돼 있습니다. 

모든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통합니다. 오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것은 저의 확신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많이 알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게 아니고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섣불리 알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통한다는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제 스스로 깨달은 것입니다. 니체의 유명한 발언이 있지요. 신은 죽었다. 그는 신은 없다고 말하지 않고 신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처럼 반신앙적이고 무신론적인 발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니체가 그 발언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명분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는 시대는 끝났다 라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명분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는 시대는 끝났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기 때문에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아닌, 사람이 스스로 이유를 찾아야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건 인간이 성숙해졌다, 어른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인데 니체가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 수 없고 또 동의할지 동의하지 않을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원래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우리가 유아적이지 않고 성숙하고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내가 아이였을 때는 말하는 것이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는데 이처럼 인간을 장성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 장에 ‘내가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건 이천년 전에 사도바울이 한 말입니다. 율법에 이끌려 맹종하는 인간이 아닌, 사랑에 이끌리는 자유한 인간, 사랑에서 이유를 찾는 인간, 이것이 사도바울이 제시한 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에요. 이천년 전에 사도바울이 이와 같은 진리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그것을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실천할 준비는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고 많은 것을 깨닫고 뉘우치고 그리고 비로소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듯 말 듯 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사랑에 의해서 자기가 스스로 이유를 찾는 상보다는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하지 말라 저렇게 하지 말라라고 가르쳐 주는 것에 더 익숙하고 더 그것이 편하고 더 그런 삶이 책임을 지지 않고 또 자기가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 때문에 더 그것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가 전제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이에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루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감당할만한 책임 있는 인간은 아직 요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이천년 전에 말한 것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입으로는 은혜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적으로 삽니다. 율법적인 데에서 이유를 찾습니다. 율법적인 데에서 삶의 동기를 찾습니다.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만일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 관이 사람에게 잔소리를 하고 막대기와 채찍으로 사람을 야단치고 벌주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 관은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고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으로부터 누가 우리를 끊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하나님 관이 죽어야 바른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인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모든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통한다는 하나의 예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을 배우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식이 많아지면 신앙에 방해가 될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신앙이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께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통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하느냐. 그릇된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질문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이것이 바른 질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른 질문을 했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뇨.’ 이것이 제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생의 지름길을 찾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왜 누구는 지름길을 찾아서 직행하고 누구는 지름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며 사느냐.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알고자 하느냐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제일 중요하고 핵심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직행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1절에 ‘하나님은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이것이 저희 교회 2012년 표어인데 ‘하나님은 우리 길을 직행하게 하옵소서’ 어차피 갈 길이라면,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옳은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직행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참 반가운 신도여 다 이리 와서 베들레헴 성내에 가 봅시다. 저 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보고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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