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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임마누엘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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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임마누엘 (마 1:18-25)

(마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1. 성탄 전야에 뻬놓을 수 없는 것은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한 드라마입니다. 금년 우리 교회 성탄 전야에 성탄 드라마 대신에 성탄 노래극을 공연해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바쁜 아이들의 학교생활로 인해 성극 연습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과거 아이들의 성탄극은 서툴고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순수함 속에 많은 감동을 주어왔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성탄 전야는 현대화의 요란함과 럭셔리함에 묻혀 그 진한 감동이 덜한 느낌입니다. 성탄 드라마에서,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등장인물들은 천사들, 왕들, 목자들,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요셉, 당나귀와 양들입니다. 이들 등장인물들 중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우리는 나귀를 이끄는 요셉, 여관집 문을 두드리는 요셉, 혹은 구유 가까이에서 조용히 무릎 끓고 있는 요셉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 요셉은 ‘말하는 역할’이 전혀 없고 단지 ‘무대 배경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성탄 캐롤에서 우리는 아기 예수를 찬양하고 마리아와 목자들과 동방박사들까지도 찬양하지만 요셉을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태는 그러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계속해서 그가 어떻게 율법을 어겼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결혼풍습은 오늘 우리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약혼 후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혼한 상태에서 결혼하기까지는 함께 생활하거나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상상해보세요. 요셉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에 대한 요셉의 배신감과 분노를 상상해보셨습니까? 율법은 마리아와 같은 경우에 대해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약혼한 몸으로 임신하게 된 마리아는 간음죄라는 죄명으로 파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으로 요셉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음에 심각한 상처와 고통가운데 몸부림칠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은 간음죄에 대한 율법의 정의(正義)가 얼마나 가혹하며 때로는 적절치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마태는 분명히 요셉을 ‘의로운 사람’(a righteous man)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정의는 모든 사실들은 분명하게 공개되어야만 하고 범죄는 반드시 처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얼마든지 마리아를 원하지 않는다면 공개석상에서 마리아의 임신을 밝히고 파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의(義)는 전혀 새롭고 다른 종류의 의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한 사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약혼녀가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니라.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니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니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니라.”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의는 어떠한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 ‘의’입니다. 마리아가 새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랑으로 당해야 하는 의입니다. 누군가의 죄에 대한 그 결말이 어떠한 가를 이해하고 함께 고통해야 하는 의입니다.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함께 고통해야 하는 의를 가지도록 했습니까? 이같은 요셉의 정의는 어떠 종류의 의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인류의 죽음과 파멸을 대신하시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의로운 요셉은 천사의 수태 고지를 받아들였지만 또한 마리아의 믿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마리아는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하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26-33) 며 수태하게 될 것을 전했습니다. 마리아가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에 무서워하며 ‘저는 처녀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천사가 ‘성령님이 네 위에 내려오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거룩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 알려졌으나 그처럼 늙은 나이에도 임신한 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고 말합니다. 

약혼했지만 정식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하게 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약혼자 요셉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불륜으로 의심할 것입니다. 신명기 법전에서 이미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면 둘 다 돌로 쳐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결혼한 여자가 결혼 후 처녀가 아니었음이 판명될 때도 돌로 쳐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신 22:23) 그러므로 약혼한 몸, 처녀의 몸으로 수태하게 된다는 고지는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렵고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마리아가 ‘저는 주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파혼당할 것은 물론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온갖 비난(非難)과 더불어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맡기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었음에도 임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면서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고 했을 때, 그 말씀이 결정적으로 수태고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렘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떠한 대가를 치루게 되더라도 기꺼이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이러한 믿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믿을 수 없는 믿음의 행동으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의 정당성은 입증되었습니다. 의에 대한 가공할 상황이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했습니다. 

요셉은 태어난 아이를 ‘예수’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이름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그 고통을 극복하도록, 그리고 그의 의지를 이겨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천사의 고지대로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 극복과 이해와 의지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요셉의 의로움으로 파멸과 파혼의 가공할 상황의 긴장을 극복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성탄 캐롤과 성탄 카드 그림들은 사실 예수 탄생의 장소와 방법 등을 낭만적으로 볼까 두렵습니다. 아기 예수 탄생, 즉 성탄은 파멸과 파혼의 긴박함, 그리고 태어난 아기 예수에 대한 살해 음모를 뚫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탄생이며 하나님의 의의 탄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과 같이 의로운 사람이 되어 성도 여러분의 삶에 성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2. 성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째 사실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외양간은 악취가 나는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외양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 악취가 진동하는 외양간에서 가축들과 함께 지냈었습니다. 외양간 바닥은 건초더미로 거칠고 더러웠습니다. 구유는 외양간 중앙에 놓였습니다. 마리아의 진통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거기 요셉은 분주했습니다. 

요셉은 불을 지펴 물을 데웠고 마리아가 편안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은 아마 마리아 스스로가 겪어야 할 고통 앞에 자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모든 아버지들도 자신의 아이 출생을 지켜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진통은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출산을 앞 둔 여인들이 겪게 되는 고통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의사나 산파도 없이 그 어둡고 어두운 외양간에서 출산해야 했습니다. 가축들과 건초더미 가운데 아버지 경험이 전혀 없는 요셉만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순간이 왔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입니다. 마리아의 산혈(産血)이 건초 더미위에 보였습니다. 침대의 따뜻한 담요도 없이 많은 고통과 불편함 속에 마리아가 출산한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는 그 아기를 나무로 된 구유에 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 중의 왕, 만주의 주님의 탄생,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었습니다. 악취나는 외양간 말 구유, 가난한 시골 촌뜨기 처녀 마리아와 가난하고 미천한, 그러나 의로운 요셉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임마누엘’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비롭고 믿기 어려운, 그러나 매혹적인 방법으로,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로 선택하셨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선택하시는 일에 요셉 역시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를 일으키기 위해 누군가를 선택하십니다. 사람들은 아마 요셉의 아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두고 비웃거나 조롱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비웃과 조롱으로 요셉은 크나큰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기 예수의 아버지가 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그러한 축복은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기 예수의 아버지가 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고 낮고 천한 곳에 함께 하십니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삶으로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가 탄생하신 후, 요셉은 아주 간단히 아기 예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요셉은 아기 예수를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훈련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이 마리아의 아이에게 베푸는 최선의 선물이었습니다. 분명히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요셉에게 위탁하신 이유였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종류의 아버지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의 아버지가 거칠고 폭력적이며 따뜻함이나 온후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데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 분이나 ‘아버지’가 되는 일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의심할 바 없이 예수의 탄생은 요셉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아바, 아빠’(Abba, daddy)로 부르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소개하도록 영향을 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아바’(Abba)는 아버지와의 애정과 친밀함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을 ‘아바’로서 부르시는 예수의 하나님 경험은 기독교 신앙의 신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아바, 아빠’(Abba, daddy)로 소개할 수 있는, 요셉과 같은 아버지의 경험을 가진 의로운 아버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요셉과 마리아의 삶을 파멸시킬 듯한 그들의 고통과 고난으로 예수의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의 예술가 알버트 듀러의 예수 탄생 그림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그 그림에서 아기 예수 탄생하신 집은 일부가 파괴되고 부서진 모습이었습니다. 부서지고 파괴된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생명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부서진 마음, 깨어진 몸, 그리고 무너진 꿈들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헌신적인 사랑이 머무는 곳마다 아기 예수, 하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 메시지입니다. 예수께 말씀하셨습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첫 번째 성탄 이야기는 마리아와 요셉의 고통스러운 이야기, 그들 자신의 삶이 얼마나 철저히 부서졌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요셉의 헌신이 그의 믿음을 생명으로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요셉은 성탄 드라마에서 조용히, 거의 주목받지 못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귀 기울인다면, 요셉은 성탄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아바’로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통해 임마누엘의 의미를 조용하고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아기 예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는 요셉처럼 무릎을 꿇고 ‘아바 아빠’로서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2011년의 즐거운 성탄, 뜻깊은 성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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