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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처녀 잉태 (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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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잉태 (마 1:23)


성탄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이전에 전했던 성탄 말씀들을 다시 읽어보곤 합니다.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가장 마음이 따뜻해지는 부분은 성탄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입니다. 섭리의 손길에 관해서는 이전 성탄 설교들을 다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동정녀 탄생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1:18)에 관한 기사에서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요셉에게 전했던 말을 기록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입니다. 이를 통해 천사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사 7:14). “처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 자체는 단지 ‘젊은 여인’을 뜻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장 34절에 마리아는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남자와의 성적 경험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종합하면 성경은 예수님께서 ‘동정녀’ 잉태를 통해 탄생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동정녀 탄생은 양측면으로부터 공격을 당해왔습니다. 한 측면의 대표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 사상을 가진 영지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신이 악한 육체를 취했다는 주장을 거부하기 위해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했고 동정녀 탄생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도가 활동하고 있던 시절에도 활발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사도인 요한은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고 했고, 반대로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 1:7)고 경고했습니다.

사도 요한의 때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믿는 일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비록 영지주의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고 있을지라도 그분의 육체성을 부인하는 일 즉 ‘인성’을 손상시키는 자는 적그리스도이며,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구원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마리아를 높이기 위해서 그녀의 처녀성을 강조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음은 믿으면서 마리아의 동정녀성만 부인하면 어떨까요? 바로 이러한 현상이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또 다른 측면의 공격이었습니다. 

2세기에 반기독교 철학자였던 켈수스(Celsus, 약 177-약 180)는 마리아가 ‘판데라’(Pandera)라는 군병과 간통해서 사생아를 낳았다는 대단히 불경한 이야기를 꾸며냈습니다. ‘동정녀’ 탄생이 부인되었을 때, 예수님의 인성이 모독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 곧 그분의 ‘신성’이 즉각적으로 부인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오리겐(Origen, 약 185–약 254)의 󰡔켈수스 논박󰡕(Contra Celsum) 1권 28장에서 켈수스의 꾸며낸 이야기가 깨끗하게 반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이 이야기는 적그리스도적인 인물들에 의해 계속 인용되곤 합니다. 예수님도 결국은 인간일 뿐이었으니 그분을 도덕적 모델로 삼을지언정 경배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순종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되지요.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 1884-1976)은 동정녀 탄생이 헬라 전설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고서는 예수님을 영웅처럼 높이기 위해서 그분의 출생을 각색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람을 신화했으니 이를 비신화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동정녀 탄생은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한 사상 역시 사람이 잘 노력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이론으로 연결되어 평범한 인간의 단계를 넘어서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성도는 이처럼 호시탐탐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무너뜨리려는 적그리스도적인 양방향 공격으로부터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지요.

처녀가 동정을 유지한 상태로는 잉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상생활에서는 합리적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만 출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특별한 방식의 출생이 예수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은 흙에서 출생하였고, 하와는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출생하였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창조주께서 예수님을 특별한 방법으로 출생케 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다보니 생명의 시작도 유전자 수준에서 다루게 되는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창조된 수정란이 마리아의 태에 착상했을 수도 있겠고, 성령님의 능력이 마리아의 난자를 일순간 수정란으로 변화시켰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 신앙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사건 속에서 그분의 온전한 인성을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선언 속에서 그분의 온전한 신성을 동시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인간을 대속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되셨기에 인간이 겪는 모든 시험들을 겪으셨고 마침내 죽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신성으로는 고난을 겪을 수도 죽을 수도 없으니까요. 동시에 단지 한 여인의 아들만이 아닌 하나님이셨기에 창세로부터 재림 때까지 구원받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대속하고도 남을 가치를 가지신 것이고, 구원할 능력 또한 가지신 것입니다.

신성으로만 존재하시던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성탄의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신성이 한 아기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늘에 성자의 자리는 비어있고 성부와 성령께서만 계셨던 것은 아니지요. 성자께서 육신을 취하여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그분의 신성으로는 여전히 온 세상에 충만하셨습니다. 다만 인성은 인간의 육체성이 가진 연약성과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유대 지역 안에서 일정 기간 동안만 사역하실 수 있었고, 육체의 피곤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요 4:6; 11:35). 또한 인성으로는 모르시는 것도 있었고(마 24:36), 부활하신 후에야 인성까지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취하실 수 있으셨지요(마 28:20). 

성탄의 사건 속에서 많은 의미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성자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겠지요. 저는 여태껏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풍족해서 도움 주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움 받는 다는 것은 그만큼 약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라는 자존심 때문인지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자께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 있을 수조차 없는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그분께서 스스로 전적으로 부족한 모습이 되셨고, 스스로 가장 약한 자가 되셨습니다.

성탄에서의 낮아지심은 자기 인격 도야를 위해 스스로 겸비해지는 일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 주님의 낮아지심은 자신의 인격 향상에 목적이 있지 않고,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부활이후 예수님의 높아지심 역시 구속을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부족한 모습이 되기도 하셨고, 전능하신 모습이 되기도 하셨던 것이지요. 성도 는 살아가면서 낮은 자리에 처할 때가 있고 높은 자리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낮아짐을 추구할 때가 있는가 하면 높아짐을 추구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 마음의 목적이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인지, 생명을 구원하려 함인지, 초기의 마음과 변함없는지 등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탄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염려들을 합니다. ‘염려에 사로잡힌다’라는 표현이 참 적절한데, 믿음으로 살다가도 어떤 문제에 관하여 염려하기 시작하면 한동안 꼼짝 없이 염려에 갇혀서 시간을 보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한계를 가진 인간이 전혀 염려 하지 않고 이 땅의 삶을 살아낼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뭔가 가능성이 있어야 하나님도 믿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 때문에 생긴 염려라면 동정녀 탄생의 사건을 잘 묵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초합리적으로 역사하기도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가 그분께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합니까? 하나님께서 합리적인 가능성이 있어야만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가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예수님 당시에도 많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그 비밀은 인간의 지성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인간의 감성이 느낄 수도 없는 것이었고, 인간의 의지로도 파악할 수 없는 신비였으니까요. 오직 계시 받은 소수만이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믿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의 지성과 능력으로도 깨달을 수 없던 그것, 마음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비밀을 성도는 알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고전 2:10)라는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서로 여러 종류의 성탄 선물을 주고받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을 통해 이 땅에 오셨고, 그래서 이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신 그분이 우리 생애에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존재로 기쁨과 찬양이 넘치는 성탄이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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