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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크리스마스에 꿈꾸는 사람 (눅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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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꿈꾸는 사람 (눅 2:8-20)
  

정찬의 ‘빌라도의 예수’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에 보면, 빌라도가 로마 정부의 유대 총독으로 임명을 받아 가이사랴에 파견되었습니다. 
총독으로서 전임자인 그라투스와 임무교대를 합니다. 
그라투스가 로마로 가는 귀국선에 오르기 직전 빌라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유대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무언지 아시오?”
“글쎄요.”
“그것은 바로 꿈입니다.”
“꿈이라뇨?”
“유대인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꿈을 꾸고 있소. 그들의 천년왕국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소. 유대 통치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소. 사람은 체포할 수도 있고 처형할 수도 있지만, 꿈은 체포할 수도 처형할 수도 없으니 말이오.”

꿈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꿈을 가진 청년의 눈동자는 다릅니다.
꿈을 가진 사업가의 발걸음은 다릅니다.
꿈이 무섭습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듣고 썼던 말은 ‘꿈은 이루어진다.’입니다. 
그 당시의 꿈은 월드컵 4강 혹은 그 이상의 성적을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꿈은 지위, 출세, 그리고 재물 등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높은 지위에 오르면 꿈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면 꿈을 이루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과 많은 재물이 정말 우리의 꿈이 될 수 있을까요? 
좋은 자동차, 넓은 집, 박사 학위, 예쁜 아내, 경제력 있는 남편이 우리가 평생토록 꾸어야할 꿈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꿈들을 성취하고 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 꿈을 이루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꿈은 하나님께도 중요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날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까? 
그것은 그분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만백성이 그분의 자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옛말에 ‘돈 보따리를 놓고는 웃지 않아도, 아이를 바라보면서 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 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신 모습을 스바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3:17)
성탄절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첫 번 크리스마스 때 아기 예수님을 맞이한 들의 목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들의 목자들은 천사들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0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 왜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졌을까요?

들의 목자들은 누구였습니까?
혹 여러분은 목자라고 하면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풀피리를 불고 있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정경을 그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목자들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가장 비루한 집단의 대명사였습니다.
목자들은 잠시 양떼를 돌보다 밤이 되면 집으로 퇴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예 양떼와 더불어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옷은 늘 땀에 찌들었고, 몸에는 짐승냄새가 풀풀 났습니다.
슬픈 현실은 짐승들과 뒹굴다 보니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음식 먹을 때 손발을 씻는 규례를 지키라는 것은 그들에게 조롱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또 주인의 감독을 직접 받지 않다보니까 양의 손실을 처리할 때 주인과 목자 사이에 서로 오해할 소지가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목자가 게을러서 양을 죽였는지, 실수로 양을 죽였는지, 양이 병들어 죽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목자들은 거짓말쟁이로 취급받을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유대법정에서는 아예 목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들의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헤롯왕, 대제사장, 사두개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들의 목자들은 들을 수 있었을까요?

본문 8절에서 그 단서를 찾아봅니다.
8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밤은 세상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드는 시간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세상의 소리가 잦아들 때 그들의 귀도 닫습니다.
그리고 잠을 청합니다.
그러나 밤에 양을 지키는 들의 목자들은 세상의 잡다한 소리들이 잦아들 때 영혼의 귀를 엽니다. 
예루살렘 도시가 질펀한 욕망의 밤을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은 들에서 그 밤에 영혼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시편의 무수한 시들이 목자인 다윗의 영혼의 읊조림입니다. 
어떻게 다윗은 그런 고백과 찬양을 할 수 있을까요?
다윗은 목자로서 밤에 들에서 하나님과 영혼의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들의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맑은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종기 시인의 ‘대림’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금은 깨어 있을 시간, 내 두 눈과 마음을 모아 
아, 지금은 기다릴 시간, 당신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둘이 하나 되고 모두가 되는, 빛나는 희망이 열리는 시간
참 평화이신 이여, 쓰러진 자의 희망이신 이여
세상의 아픔을 다 껴안은 사랑이신 이여
오소서, 당신의 눈물로 나를 씻어주소서
당신의 빛과 선하심으로 내 영혼을 닦아 주소서” 

시인의 말대로 성탄절기는 눈과 마음을 모아서 깨어 있을 시간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눈물로 우리의 영혼의 방을 깨끗이 씻어주길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정으로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세상과 단절하고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밤이 있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님을 만났던 목자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2. 왜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서 나셨을까요?

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아기 예수님이 나신 자리를 ‘구유’라고 강조하는 말씀이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본문에는 12절 외에 아기 예수님이 누인 자리가 구유임을 여러 차례 밝히고 있습니다.
눅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6절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구유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고, 소와 나귀의 먹이가 있는 여물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구유는 음습하고, 지저분하고, 어두운 곳입니다.

왜 성경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자리는 구유였다고 강조합니까?
‘구유’라는 것은 우리가 겪는 눈물의 자리, 시린 고독의 자리, 쉼 없이 터지는 시련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보통사람들에게 그 자리는 절망, 좌절, 포기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 자리는 꿈을 꾸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리에 아기 예수님이 누워계셨기 때문입니다. 

휠체어를 탄 바이올리니스트 차인홍 교수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며, 미국의 음악대학 교수입니다.
비록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었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 유학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은 매우 가난해서 고등학교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극심한 가난으로 어머니는 그를 고아원에 맡겼고, 거기서 지내다 우연히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미국인 선교사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미친 듯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분이 연습한 장소가 어른들이 잘 아시는 연탄을 쌓아둔 연탄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연탄광은 먼지가 많은 곳입니다. 
연탄광은 지저분한 곳입니다.
연탄광은 어둡고 침침한 곳입니다.
그는 아무리 추워도 연탄광에서 매일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너무 추워서 손이 다 얼어 터지고 갈라져 피가 나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정규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정상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지금은 미국 대학의 교수로 있습니다.
차인홍 교수는 연탄광을 꿈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꿈을 실현하는 비전의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남모르는 눈물의 자리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시린 고독의 자리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쉼 없이 터지는 시련의 자리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그 자리는 포기, 절망, 좌절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 자리는 꿈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꿈을 구체화하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어제의 실패를 딛고 꿈을 실현할 축복의 자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찬송가 335장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1) 진정으로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세상과 단절하고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밤이 있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밤이 있어야 합니다.

2) 여러분의 삶에 남모르는 눈물의 자리, 시린 고독의 자리, 쉼 없이 터지는 시련의 자리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그 자리는 포기, 절망, 좌절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 자리는 꿈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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