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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예수의 탄생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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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 (눅 2:1-7)


‘마지막 잎새’ 라는 단편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국작가 O 헨리는 나이 40에 옥중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본명이 윌리엄 시드니 포터인 그는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텍사스 주 오스틴의 평범한 은행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공금횡령 혐의가 자신에게 쏠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남미로 도망친 것이 그의 운명을 뒤바꾼 계기가 됐습니다. 도피생활을 하던 그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귀국해 아내의 임종을 지킨 뒤 체포돼 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합니다.

‘마지막 잎새'’와 ‘현자(賢者)의 선물’ 등 주옥같은 그의 초기 단편들은 대개 옥중에서 쓰인 것입니다. 특히 ‘현자의 선물’은 옥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외동딸인 마거릿에게 선물 대신 써 준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옥살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O 헨리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합니다. 셋방살이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남편은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금시계를 팔아 아내에게 줄 선물로 예쁜 머리빗을 사고, 아내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에게 줄 선물로 시계 줄을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유일한 가보(家寶)를 팔았고, 아내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았으니 이들 부부야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해야겠으나 작가는 “선물을 주고받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이들이 가장 현명했다”는 말로 작품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주고받았다는 뜻입니다. O 헨리가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이 작품을 딸에게 보낸 것도 바로 그 ‘현자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경제 한파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는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우울합니다. 성탄절 용품과 선물을 취급하는 상인들은 “캐럴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입을 모으고 있으며, 매년 이맘때 가족. 친척. 친구들과 선물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은 가벼워진 호주머니로 저마다 울상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의 흥청망청한 분위기도 지금의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습니다. 주고받은 선물에 ‘아름다운 마음’이 얹혀 있었던가를 되새겨 보면 특별히 우울해 할 일이 아닙니다.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기쁜 선물이란 반드시 값진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탄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산타클로스와 선물일 정도로 성탄절은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가지고 싶었던 것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 사실은 성탄절이야말로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선물해 준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 예수를 믿음으로 하늘나라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 것인지를 이 시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준비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은 세상입니다. 거기다가 사람까지 지으신 다음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세상이 점점 쓰레기 소굴로 바뀌어져 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며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인간의 타락입니다. 타락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아주 몹쓸 짓을 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아주 작은 불신과 불순종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처음 사람이 살도록 허락된 에덴동산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단지 한 가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명령이 있다면 그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데도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그 금기를 깹니다. 그까짓 거 선악과 하나 먹은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불순종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만든 것이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더 큰 불행은 단지 몸만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불 못이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모두가 죄 가운데 태어나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 하나님은 몹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 멸망의 자식이 아닌 복을 누리며 복의 근원이 되는 인생이 되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은 순종을 통해서 얻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패하는 인생을 보다 못해 하나님께서는 제사법을 통해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서 보듯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만을 섬기는데 실패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근본적으로 인생은 죄 가운데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올바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으며 피 흘림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를 통해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한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것이 가능한 것이요 따라서 남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시는 그분은 죄 없이 이 세상에 오신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한데 그 분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오실 것이요 또한 오시는 곳은 다윗의 본 고향인 베들레헴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를 위해서 택하신 마리아는 저 북쪽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작은 산골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기를 낳기 위해서 베들레헴까지 가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가이사 아구스도입니다. 정확하게 로마 말 지금으로 말하면 이탈리아 말로 표현하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카이사르라는 말은 원래 로마의 장군 출신으로 황제가 된 시저의 이름이었는데 시저 이후 황제를 부를 때 카이사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원래 옥타비아누스인데 저가 권력을 잡고 황제가 될 때 원로원에서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 아우구스투스가 자기가 다스리는 영토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모든 백성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신고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 결과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신고를 하게끔 됩니다. 따라서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함께 그와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남편 될 요셉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그녀가 임신하게 된 것을 알게 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어서 조용히 이를 끊고자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처녀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가브리엘의 전하는 말을 받아 믿음으로 순종한 마리아의 믿음 역시 참으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이건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여자를 돌로 쳐 죽입니다. 단 그의 약혼자가 내 아이라고 할 경우는 예외입니다. 
한데 마리아가 아이를 뱄습니다. 자기 아이가 아닙니다. 그래도 마리아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냥 죽도록 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탈 없이 해결할 수 있겠나 고민할 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약혼자를 데려옵니다. 그런 때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이 내린 것이요 그 때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도 아주 정확합니다. 결국 이건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 아이를 낳을 때가 다 된 아내를 위해 나귀를 준비해 나귀에 태우고 먼 길 베들레헴까지 호적하러 가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이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세상의 권력자를 들어 쓰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우리들 가운데 어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는지를 언제든지 깊이 살펴야 하고 그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작은 자들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도 기억하여야 합니다. 비록 죄로 가득한 도시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죄인 중의 죄인이었을 지라도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듯 갈릴리 나사렛 촌 동네에 살던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순종이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 디딤돌이 되었던 것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로마 황제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셔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시도록 하시지 않습니까? 

그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또한 동방박사들을 멀리서 찾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또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누가 그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까? 순종하는 자입니다. 나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도 그 작은 자의 순종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귀한 디딤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산 역사의 증인들이요 산 역사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작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영국에 매우 가난한 한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가난해 만삭의 몸으로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일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그녀는 차가운 방에서 어렵게 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1642년 크리스마스 때 태어난 이 아이가 바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천체 망원경”을 만든 아이잭 뉴턴입니다. 고통의 순간을 감사로 극복한 여인에게 내린 하나님의 성탄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는 보잘 것 없다고 한탄할 때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그 작은 자들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메시야의 오심을 위해서 찾으신 여자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작은 산골 마을의 보잘 것 없는 처녀 마리아였습니다. 그때 마리아의 나이가 얼마나 됐을까요? 당시의 풍속도를 생각해 보면 아무리 많아봐야 10대 후반일 것입니다. 

그런 어린 나이의 산골 처녀의 목숨 건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왕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 동방의 박사들이 착각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연히 세상의 왕으로 오실 그분이시라면 왕궁에서 태어날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자리한 작은 마을 베들레헴입니다. 마을도 작은 마을이지만 거기서도 예수님은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겨우 얻어 들어간 곳이 우리입니다. 짐승이 사는 곳 짐승이 머무는 곳이 바로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요 구유가 예수님의 처음 침대였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처음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인간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낯을 피하여 스스로 동산 나무 사이로 숨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짐승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죄 가운데 태어나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을 위해 예수님은 짐승들이 사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십니다. 그것도 있는 자라면 여관이 아니더라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갖춰져 있는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려서 많은 돈을 지불해서 방을 구했을 것입니다. 한데 요셉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외양간을 찾아들어가겠습니까? 

이 말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던 아브라함만 해도 나이 75세나 된 우상 장사가 아니었습니까? 겨우 우상이나 만들어 팔던 그나마 자식 하나 없는 노인이 아닙니까? 그런 그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100세나 된 그에게 아들 이삭을 주시며 복의 근원을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이라는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그것도 당시는 가장 낮고 천한 자의 상징인 목자입니다. 그나마 그 아버지 이새의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입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도 지극히 작은 자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오십니다. 그것도 아주 보잘 것 없는 환경을 통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들을 보면 작은 자들을 특별히 많이 이야기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해서 타셨던 짐승도 보잘 것 없는 나귀 새끼였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서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나를 하나님이 찾으시고 하나님이 자녀 삼아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들어 사용하신다고 하는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직임을 통해서 나를 쓰고자 하실 때도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말씀대로 따르는 마리아의 고백처럼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고백하며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보잘 것 없는 나 하나의 순종이, 나 하나의 충성이 하나님께서 그 놀라우신 뜻을 이루가시도록 하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하지만 바로 그곳으로 하나님께서 이끄신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옵니다. 최고 신분의 사람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최고의 선물들을 준비합니다. 거기다가 베들레헴 인근의 지극히 작은 목자들이 또 찾아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찬양을 들려줍니다. 이처럼 작은 자의 순종에는 하나님의 격려가 따른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이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도록 버려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작은 자의 충성과 헌신에는 꼭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격려하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 힘을 얻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사실 이때 요셉이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듣기는 했어도 시간이 흐르면서 진가민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그것도 강보에 쌓아 구유에 뉘어놓은 아이를 경배하기 위해서 멀리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별을 따라 찾아오고 천사의 전하는 말을 듣고 목자들이 찾아올 때 요셉의 마음은 아주 뜨겁게 용솟음쳤을 것입니다. 잠시 흔들렸던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꿈에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고 애굽으로 피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작은 것에 감사하십시오. 보잘 것 없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나의 무능력함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나를 기뻐하시고 그러한 나를 찾아주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십시오. 그래서 감사함으로 깨어 기도하고 날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역사하심의 중심인물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 함박눈이 몹시 내리는 성탄절 날이었습니다. 믿음이 깊은 남편을 따라 성탄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내는 계속 의심을 토해 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 있지? 난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남편은 의심하는 아내에게 계속 설명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집 문 앞에 이르러 이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참새들이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먹이를 얻지 못해 집 문 앞에 비실비실 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 먹이를 가져와서는 새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푸드득 하며 날아가 버렸습니다. 남편은 실망하여 “새들아! 난 너희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먹지 않으면 너희들은 굶어서 얼어 죽는다고......” 새들이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날아가는 새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뜻을 어떻게 너희에게 전할 수 있겠니? 내가 새가 되지 않고서는 ......”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내의 뇌리에 번쩍 무엇인가 스쳐 갔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속 사랑을 베풀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 품을 떠났던 거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야. 그리고 그 사랑을 십자가로 표현하셨던 거야......” 

“성탄”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장소는 거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도둑의 소굴로 변해버리고, 장사치들의 시장으로 변해버린 예루살렘의 성전은 만원이었습니다. 여관방도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 어디에도 빈 방이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3D 업종에 종사하는, 들판의 양떼를 돌보고 겨우 입에 풀칠하는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으로 맞이할 뿐이었습니다. 유대 땅도 아닌 외지의 박사들처럼 오늘도 빈곤을 이기려 모여든 외로운 외국인 노동자들 가운데 깨어 있는 자가 희망을 품고 맞이하는 성탄절입니다.

세상의 그늘진 곳, 굶주림에 허덕이고 질병에 시달리는 곳,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심한 곳…. 그런 낮고 낮은 곳의 상징인 구유에서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그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가장 높으신 분의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 아름다운 역사에 동참할 작은 자를 찾으십니다. 
그 주님의 뜻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순종하는 마리아처럼 “주의 작은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고백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역사의 산증인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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