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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낮아지면 높아집니다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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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지면 높아집니다 (눅 2:1-7) 
 
 
❚바울의 깨달음

여러분은 이력서를 써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비록 일반 직장에 취직해 본 경험은 없지만 교회에서 전도사와 목사로 일하기 위해 이력서를 꽤 여러 번 써 본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담임목사로 오기까지도 이력서를 여러 곳에 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친구 목사들이 이력서를 쓸 때면 저에게 자문을 구해오기도 합니다. “이 목사, 이력서를 여러 번 써 보았으니 어떻게 쓰면 좋은지 좀 알려줘.” 그럴 때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 마디로 교회 이력서는 이렇게 쓰면 된다. 너무 성의 없어 보이게 달랑 한 장만 써도 안 되지만 반대로 논문 쓰듯, 무슨 보고서 쓰듯 너무 자세히, 많이 써도 안 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 경험에 의하면 이력서를 무성의하게 써도 떨어지지만 세상에서는 몰라도 교회는 너무 제 자랑 하듯 이런 저런 소리를 많이 쓰는 것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 나고 화려한 사람이 왜 목사가 되었나?”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도 바울이야말로 이력서가 너무 화려해서 “이런 사람이 왜 사도가 되었나?” 싶은 사람입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력서를 쓴다면 아마 이렇게 쓰겠지요. 이력서 전문가인 제가 대신 한 번 대신 써봤습니다.

가문 :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빌 3:5)
국적 : 로마 시민권자
학력 : 율법에 능통하여 당대 최고 율법학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 헬라 철학에도 능통
영력 : 3층천 하늘까지 갔다 왔음(고후 12:2)
능력 :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린 적이 있음
실력 :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함
경력 : 세계 최초의 선교사, 수많은 개척교회 세움

그런데 이렇게 흠잡을 데가 없고 완벽해 보이는 사도 바울에게도 남들에게 말 못할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후서 12장에 등장하는 ‘육체의 가시’ 혹은 ‘사탄의 사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치명적인 육신적 질병이라고 봅니다. 아마 심각한 시각 장애나 간질병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화려하고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눈이 너무 나빠서 글씨를 읽거나 쓰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면 어땠겠습니까? 간질병 아시지요? 시도 때도 없이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킨다면 얼마나 치명적인 문제였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세 번뿐이었겠습니까? 아마 기도는 수도 없이 하고 사십 일 금식기도 같은 절박한 기도를 세 번 했다는 뜻이겠지요.

저도 교회 일 열심히 하다가 병에 걸린 분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집사님, 하나님이 집사님 쓰시려면 반드시 고쳐주실 거예요. 안 고쳐주셔서 교회 일 못하면 하나님 손해 아닙니까?” 바울도 아마 이렇게 기도했겠지요. “제가 하나님 일 하겠다는데, 목숨 걸고 세계를 다니며 복음 전하겠다는데 하나님이 안 고쳐주시겠습니까?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고쳐주셨습니까? 안 고쳐주셨습니까? 안 고쳐주셨지요. 오히려 고린도후서 12:9에 보면 이런 대답을 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울은 속이 상했습니다. “아니, 내 욕심으로 구한 것도 아니고, 내 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일 하겠다는데 이렇게 방해가 되는 병을 왜 안 고쳐주시나?” 이해가 가지 않아서 몇 번이고 다시 구했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실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 깨달은 내용이 12장 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이 병을 통해 오히려 사도 바울은 위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고 더 위대한 사도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본문 바로 앞에도 사도 바울이 환상 중에 셋째 하늘이라 불리는 곳, 오늘날로 치면 천국에 가본 경험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배경도 좋고, 공부도 많이 하고,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 이런 위대한 영적 경험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조건이나 경력만 가지고 하나님 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사도 바울이 너무 좋은 조건 때문에 교만해 질까봐 일부러 그를 낮춰 겸손하게 하시려고 이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아무리 없애 달라고 기도해도 거절하신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사도 바울이 깨달았다는 사실입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 가시를 일부러 주셨구나. 그래서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낫게 해주지 않으신 게로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결정적인 사실을 깨닫습니다. 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강함에서 강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약한 데서 강함이 나오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강하고 조건이 좋고 잘 났을 때 참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해지고 가장 낮아지고 보잘 것 없어질 때 참 능력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욱 겸손해 집니다. 더욱 낮은 자세로 더 겸손하게 하나님을 일을 합니다. 얼마든지 넉넉하게 살 수 있고 큰소리치며 살 수도 있지만 일부러 가난해지고 일부러 약해집니다. 

박해와 고난도 당하고 때로는 정말 억울한 일도 당하지만, 충분히 내 힘이나 능력으로 반박도 하고 되받아 칠 수도 있지만 꾹 참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역사 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도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력서가 화려하고 조건이 가장 좋은 사람을 쓰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다. 사도 바울처럼 진정 약한 데서 강함이 나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 쓰십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낮아지면 높아집니다

바로 이 사실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친히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친히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약한 데서 강함이 나오고, 무능에서 능력이 나오고, 낮아지는 데서 높아지는 것이 나온다”라고 가르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가장 낮아지셨습니다. 친히 가장 낮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장 약해지셨습니다. 스스로 가장 무능해 지셨습니다. 빌립보서 2:5~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처럼 우리 주님은 낮아지고 또 낮아지셨습니다. 얼마나 낮아지셨습니까?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계시는 분인데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신 것만도 엄청나게 낮아지신 것인데, 거기서 더 낮아져서 십자가에 달려 죄인으로 비참하게 죽기까지 낮아지십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뒤 이어 9절부터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고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 무릎을 예수님 앞에 꿇게 하십니다. 낮아지시니 높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가장 낮아지시니 하나님이 가장 높여주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탄절의 정신’입니다. 성탄절이 뭐 하는 날이냐? 하고 물으면 “연인끼리, 혹은 부모가 자녀에게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는 날”이라거나 “백화점이 1년 중 최대 매출 올리는 날”이라고 기억할지 모릅니다만 성탄절의 진정한 정신은 이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낮아지면 높아집니다!”

오늘 본문으로 가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십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호적을 하기 위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는데 그만 마리아가 해산할 때가 임박합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여관방이 꽉 차서 이 가족은 잘 방도, 아기를 낳을 방도 없었지요. 하는 수 없이 말이나 소들이 자는 마구간에 짚을 깔고 아기를 낳게 되었고 갓 태어난 아기는 ‘구유’ 즉 돌로 만든 여물통에 누이게 되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도 잘 아실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처음으로 경배한 것은 “저 들 밖에 한 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들어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기 위해 말입니다. 그런데 그냥 사람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탄생 자체도 참 낮고 구질구질합니다. 집도 아닌 타지에 가서 그것도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납니다. 아기를 누일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누입니다. 이 아기를 경배한다고 처음 찾아온 자들은 당시 가장 천한 직업으로 무시당하던 목자들입니다. 

세상 어느 탄생 이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까? 이번에 죽은 김정일은 1941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북한에서는 생년도 아버지 김일성의 생년(1912년)과 맞추기 위해 1942년으로, 태어난 곳도 민족의 성지라는 백두산이라고 조작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화려하게 꾸미는데 성경은 오히려 예수님을 더 천한 사람으로, 더 낮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앞에 답이 다 나왔습니다. 세상에서는 강해지고 인정받으려면 스스로를 높여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과장을 해서라도 더 높여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여주십니다. 낮아지는 만큼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만큼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못나지는 만큼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바로 이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일부러 사람이 되시고, 일부러 마구간에 태어나시고, 일부러 말구유에 누우시고, 일부러 십자가에 달려 가장 비참하게 죽으신 것입니다.

❚무능력의 능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제가 효자교회에 부임해서 아홉 번째로 맞는 성탄절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 설교도 오늘이 아홉 번째입니다. 저는 이번 아홉 번째 성탄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지나온 9년의 목회를 돌아보았습니다. 9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목회하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제가 이름을 한 번 붙여보았습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무능력의 능력” 무능한 데서 오는 능력 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가장 약한 데서 오는 능력입니다.

물론 지금도 제가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9년 전 효자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는 훨씬 더 부족하고 경험도 없는 그야말로 ‘초보 담임목사’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실수도 부족한 것도 참 많았습니다. 여러분이 너그러이 봐주시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이런 실수가 있었습니다. 저 스스로 ‘강한 목사’가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직 나이도 젊고 경험도 없으니까 혹시 나를 깔보거나 우습게 알까봐 두려웠나 봅니다. 그래서 강한 목사가 되려 한 모양입니다. 

제 주장을 많이 앞세웠습니다. 제 뜻대로 고집대로 안 되면 짜증도 내고 화도 냈습니다. 뭐든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애썼고 제가 뜻한 대로 안 되면 속이 상해서 잠 못 이룬 적도 있었습니다. 아닌 것 같지요? 정말 그랬습니다. 누군가와 의견이 다를 때 할 수 없이 내 의견이 아니라 저 사람 의견대로 해야 할 때면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강한 목사’가 되고 ‘힘 있는 담임목사’가 되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뭘 깨달았을까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약한 데서 진정 강함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가장 약해질 때 진정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힘을 뺄 때 정말 힘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가장 낮아지면 교회는 잘 되고, 성도들은 행복하다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높아지려 하고 강해지려 하니 성도들이 불편하고 교회가 화평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낮아지는 만큼, 목사가 약해지는 만큼 성도가 살고 교회가 살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요. 사도 바울인들 쉬웠겠습니까? 

예수님이라고 쉬우셨겠습니까? 힘들 때도 있고, 너무 억울할 때도 있습니다. 저도 참고 약해지려니 솔직히 자존심 무척 상하더군요. 때론 정말 답답하고 억울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내가 할 말이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닌데, 말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닌데, 목소리가 작아 큰소리 못 치는 게 아닌데, 나도 남부럽지 않게 목소리 큰데 그렇게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던지요. 나도 고집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인데 고집 꺾고 남의 말 들어주려니 얼마나 힘 들던지요.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성도들이 행복하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가 약해지면 하나님의 교회가 강해진다는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깨달음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낮아지고 약해지는 것이 마냥 힘들고 억울하기만 한 일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내 진심을 알아줄 날이 오고, 언젠가는 성도들이 나를 인정해 줄 날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들은 다 몰라주고 인정 안 해준다 해도 하나님은 알아주시고, 하나님은 인정해 주시고, 그래서 낮아지고 또 낮아진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여주신 것처럼 언젠가 나도 낮아진 만큼 하나님이 반드시 높여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낮아지고 겸손해지려 합니다. 더 힘없고 약한 목사가 되려 합니다. 지금도 아직 낮아지고 약해지지 못한 부분이 저에게 많은데 앞으로는 더 노력할 것입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분위기가 좀 가라앉은 것 같으니 우선 성탄절 인사부터 하지요. “메리 크리스마스!” 하지만 진짜 메리 크리스마스는 뭐냐? 즐거운 크리스마스, 기쁜 명절보다 먼저 성탄절의 참 의미를 되새겨보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낮아집시다. 새해에는 우리 더 약해집시다. 우리 더 못나집시다.” 그리하면 나를 통해 교회도 살고 성도도 삽니다. 가정도 삽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드디어 너도 깨달았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를 존귀히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약해진 만큼 우리를 높여주시고 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아무쪼록 이 성탄절의 참 정신을 실천하여 모두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존귀한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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