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절] 하늘에서 내려주신 평화 (눅 2:13-14)

첨부 1


하늘에서 내려주신 평화 (눅 2:13-14) 

성탄의 복된 주일을 맞이하여 이곳에 함께한 모든 분들의 심령과 가정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와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전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온 인류에게 주어진 은혜와 축복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으로 아무리 유명한 가르침이나 교훈을 다 모아도 비할 수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두움에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통해 온 인류가 어떤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입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고 살아가거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거리끼며 감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미국의 대통령이 한번 움직이려고 하면 그에 따르는 수행원들의 수나 비용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전용 비행기에서부터 방탄 자동차와 온갖 첨단 장비들이 공수될 뿐만 아니라 경호원 외에도 전담 주치의나 미용, 코디, 요리사등 엄청난 인원이 동원됩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이 가는 곳은 전세계 취재진들이 모여서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말 한마디가 기사가 되며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시킵니다.

여러분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큰 나라입니까? 경제나 국방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에서 대단한 나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먼지보다도 더 작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는 우주에 비하면 정말 모래알보다 더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보다 더 작은 지구상에서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에도 그렇게 요란을 떨며 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정작 하나님의 아들, 그 크신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에는 누구 하나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관심도 가지지 않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오늘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14절의 말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바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샬롬’ 이며 우리 말로하면 ‘화평’ 이요, ‘화목’ 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본문에 앞서 눅1:79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냄을 받았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꼭 오셔야 될 이유, 그것은 우리에게 ‘평강’ 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 천년 전에 이사야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평강의 왕’ 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가 없는 우리의 상태는 무엇이었습니까? 

골1:21 말씀에는 우리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였습니다.  

여러분 자식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하룻밤인들 편하게 잘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지, 만일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의 현주소가 얼마나 저주스러운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평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 세대를 완전히 불로 심판하시면서 다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함부로 거역하고 범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성을 본보기로 심판하시면서 남아있는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경고하시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화해의 몸짓에 눈을 돌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내가 직접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 라고 하시며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친히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 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면서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크게 다투고 사이가 나빠지고 일년이 넘도록 그들은 서로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인간의 우정입니다.
일년이 넘도록 서로가 상종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사이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던 도중 마음에 가책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해서 되겠는가?’ 집으로 돌아 간 후 그는 옛날 친구와 다시 좋은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편지를 계속 보내어도 그 친구에게는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다 못해서 이 친구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대단히 추운 어느 날 밤, 도무지 그날 밤을 그대로 넘기면 안될 것 같아 눈보라를 맞으며 꽤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으로 찾아 갔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친구가 문을 열어 보니 친구가 눈을 소복이 맞고 오들오들 떨면서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이고 그 두 사람이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더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너무 낮아진 자리에서 자기와 평화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그 앞에서 녹아지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사람의 모습, 그것도 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마구간에 탄생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눈을 맞고 떨면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친구의 모습과 같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러한 비유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엡2:14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저와 여러분 모두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보면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평화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다시 손잡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면 온 인류가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과 평화하는 은혜의 길이 열릴 것도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습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구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보셨습니다. 우리만 보시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라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이 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며 한순간도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황홀해서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하리요?’ 다시 말하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를 어찌해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부르신 다음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다음에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화로운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흔들 자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을 만나 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는데, 왜 기쁩니까? 왜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없어지지 아니하며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래서 찬송가 469장 3절의 가사를 보면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 내가 주야로 주님 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십니까?
우리 중에 아직도 믿음이 없어서 이 평화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평화의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더라도 제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너무 무거워 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을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다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가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평화할 수 있게 하시게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티끌보다 많고 검은 죄를 예수의 이름으로 씻음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사람은 자기 안에 놀라운 능력이 생기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해서 다른 형제와 평화 하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 은혜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도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며 한번 상처를 입으면 두고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모습들도 비일비재합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다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친했다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더욱 평화를 힘써야 합니다.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결국은 자신이 손해입니다.
기도가 막히고 영적으로 말라가고 은혜와도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육신까지 병이 납니다. 

여러분 성탄의 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로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후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탄의 큰 기쁨이 있는 날 원하기는 여러분의 삶과 일터와 사업장에도 이와 같은 평화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