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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또 하나의 울음소리 (마 2: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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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울음소리 (마 2:13-18)
  
『대지』(大地, The Great Earth)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여류 소설가인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여사가 쓴 작품 중에 『크리스마스 이야기』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떠들썩하던 크리스마스 전날 밤, 소란스러움이 잠잠해진 늦은 밤이었습니다. 잠을 자기 위해서 침대에 누워있던 여섯 살 된 샌디는 정원에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트리 주변에 놓여진 선물 꾸러미들을 구경하고 싶어졌습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온 샌디의 눈에 크리스마스 트리 주변을 산책하고 있는 생쥐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신기하듯 생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생쥐를 덮칠 것만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샌디는 재빠르게 고양이를 쫓아, 생쥐의 목숨을 건져 주었습니다. 
  
생쥐의 목숨을 건져주고 침실로 들어온 샌디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쥐의 목숨을 건져준 것은 참 잘한 일이야. 불쌍한 생쥐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샌디는 생쥐를 구해준 일을 생각하느라고 크리스마스에 대한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비록 6살짜리 꼬마 아이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성탄절을 맞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성탄절이지만 성탄절의 본질에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주변 것들에만 관심을 갖고 성탄절을 맞이하지 않았나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루돌프 사슴을 타고 온다는 산타클로스와 산타클로스가 가져다 준다는 선물에는 관심이 많지만, 말구유에 조용하게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젊은이들은 친구와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은 기대감이나 크리스마스 캐롤에 심취되어서 왜 우리에게 성탄절이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성탄절을 즐기려 할 뿐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하나 고민하는 날, 또는 성탄절 인사와 연말 인사나 하는 날쯤으로 생각하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성탄절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아기 예수님 없는 공허한 성탄절을 만들기 위한 사탄의 전략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탄의 전략은 이미 2천 년 전 첫 번째 성탄절 때에도 있었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외에 어느 누구도 메시야가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먼 나라 바벨론에서 동방박사들이 왕이 탄생하셨다는 징조를 발견하고 예루살렘에 찾아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왕이 태어나셨다면 분명 왕궁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헤롯 왕궁으로 찾아가서 헤롯왕에게 ‘우리는 새로운 왕으로 태어나신 분께 경배하러 온 사람들인데, 그 태어나신 새로운 왕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동박박사들의 방문으로 인해 온 예루살렘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한 편에서는 기쁨의 함성을 외쳤을 것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충격으로 인한 소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질문에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사람이 헤롯왕이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인데, 그리고 자신에게서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는데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니!’ 이건 그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왕위가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왕을 중심으로 반역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헤롯왕은 급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롯왕이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성경해석 전문가들을 불렀다는 것은 그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면 그는 분명 메시야임을 알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메시야가 어디에서 태어나신다고 예언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성경해석 전문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해석 전문가들로부터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고, 동방박사들에게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으로 예언되었기에 만약 왕이 태어나셨다면 베들레헴일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베들레헴에 가서 새로 태어나신 왕을 찾거든 내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분께 경배를 드려야겠소.” 물론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 - 메시야가 태어났다면 언제 자신의 왕좌를 빼앗을지 모르기에, 자신이 먼저 손을 써서 그를 죽이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헤롯왕은 기다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 가서 왕을 만나고 자신에게 돌아서 ‘베들레헴 아무개네 집에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분이 새로 태어난 왕입니다’ 하고 보고해 줄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베들레헴으로 갔던 동방박사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 가지 말고 바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예루살렘 헤롯왕에게 가지 않고 곧바로 고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잔뜩 두려움과 긴장 속에 기다리고 있던 헤롯왕은 초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이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헤롯왕은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군사들을 풀었습니다. 메시야가 태어나기로 약속되어 있는 베들레헴에 군사를 급파해서, 그 지역에 있는 갓난아이들 - 태어난 지 2년이 되지 않는 2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메시야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이미 애굽으로 피난을 떠난 후였습니다.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정보를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화가 난 헤롯이 군사를 풀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니 빨리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불과 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간다 하더라도 8km 정도의 거리입니다. 헤롯의 명을 받은 군사들이 창과 칼을 들고 달려온다면 한두 시간 안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 한두 시간 안에 요셉은 태어난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는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머나먼 애굽으로 피신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저것 준비할 틈도 없었습니다. 전쟁보다도 더 긴급하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베들레헴을 빠져나온 순간 베들레헴 지경에는 헤롯왕이 보낸 군사들의 고함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곧 이어서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군사들이 닥치는 대로 아이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군사들에게 아이를 빼앗긴 엄마들의 절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절규하는 엄마들의 정신 잃은 고함소리,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정신없이 도망치는 엄마들과 그들의 뒤를 좇아가며 호통치는 군사들의 고함소리, 도망치는 엄마의 품에서 불안을 느낀 아이들의 울음소리까지, 베들레헴은 온통 울음소리와 목놓아 절규하는 소리들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지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런 죽음과 통곡으로 가득 찬 지옥에서 아기 예수님은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베들레헴에 있던 2살 아래의 죄 없는 아이들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그 기쁨의 날에 왜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사탄의 몸부림을 보게 됩니다. 사탄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세상의 권력자인 헤롯을 앞장 세워서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여야만 인류 구원이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지 못합니다.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지 못한 대신 수없이 많은 다른 생명들을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여기에 세상의 비극이 있습니다.

사탄과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은 아기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처럼,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둠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진리를 싫어합니다. 진리가 오면 자신들의 불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사라져야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마음껏 자기들의 욕심을 채울 수가 있습니다. 진리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불의한 방법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오면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의 죄가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진리의 빛이 비춰지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합니다. 그 진리의 빛을 제거하려고 온갖 음모와 술수를 꾸미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진리와 정직과 정의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시대가 올바른 세상이었다면 그런 피비린내는 살인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올바른 세상 - 정의와 진실이 통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어둠이 판을 지고, 불의가 지배하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이었기에 더욱 진리가 필요했고, 빛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진리의 빛이 비춰지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래도 이만큼 사회적으로 성숙하게 된 것에도 그만큼 많은 희생이 따랐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4.19의거를 통해서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함으로 우리 사회를 한 걸음 성숙시켰습니다. 1980년에 있었던 5.18광주민주화항쟁, 1986년의 6.10 민주화 운동 등 수없이 많은 희생들이 오늘 우리 사회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희생 없이 성공할 수 없고, 희생 없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학생들은 놀고 싶을 때 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희생하고 고생해야 나중에 보람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사업에 숱한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 실패의 경험 없이 성공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건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기독교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서, 또 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전달되어 왔고, 우리가 이렇게 평안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순교의 피가 한국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가장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어둠 가운데 있던 이 땅에 빛이 비취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희생이 없는 열매는 없습니다. 조금은 비약적인 추론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베들레헴 지경에서 죽어간 수많은 어린 생명들의 희생이 아기 예수님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조연으로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게 성경에 예언한 것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온누리에 울려 퍼지는 성탄의 기쁜 찬송이 있기 위해서는 어린 생명들이 죽어가야만 하는 슬픔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그런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 생명이기에, 그런 죽음과 희생을 강요하는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신 예수님이기에 그 예수님이 더욱 찬송과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또 하나 성탄절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속에는 가슴 아픈 영혼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천사의 지시를 받은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 애굽으로 피난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른 평범한 소시민들의 가정에 있던 어린 아이들은 권력의 칼날 앞에서 무참하게 죽어가야 했습니다. 수많은 부모들이 아기를 잃고, 슬픔과 통곡 속에 울부짖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쁘게 성탄 찬송을 부르고 있을 때에도 이 나라 이 민족 구석구석에는 아직도 아픈 가슴을 쓸어안고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그 아픈 가슴을 우리가 감싸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부르는 성탄의 기쁜 노래는 그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기는 노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탄감사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법의 사각지대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인권을 무시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탄식의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희망찬 발랄함을 가지고 친구들과 뛰놀아야 할 나이에 부모를 잃고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연탄불과 라면에 연연해 살아가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돌보아주는 사람 없이 나라에서 지급되는 몇 푼 안 되는 보조금에 의지해서 인생의 마지막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노인들도 있습니다.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고통당하면서도 말도 못한 채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 청소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며칠 전 대구에서 자살한 중학생의 모습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가족이 그립고 보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어 추운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하는 노숙인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굶주림에 죽음의 문턱 앞에 다달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북한을 탈출했지만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주지 않아 중국을 떠돌아다니는 탈북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 붙잡힐 지 모르는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북한에 남아 있으면서 여전히 굶주림 속에 살고 있는 북한 동포들도 있습니다. 엊그제 유엔 산하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아시아 식량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에 처해 있어 외부에서 식량을 지원하지 않으면 수개월 내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그런 아픈 마음이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위로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부른 성탄 찬송이 그들에게는 어떤 음악으로 들리겠습니까? 백성들의 피와 원성으로 담겨진 술을 퍼마시고 있는 변사또의 풍악 소리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이번 성탄절에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마십시다. 그리고 그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아기 예수님을 대신해서 죽어간 수없이 많은 어린 영혼들과 헤롯의 칼날에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울부짖는 소리도 외면하지 마십시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귀에도 들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의미의 성탄절을 보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한 마구간에서 들려온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울음소리는 이 세상에 평화를 알리는 기쁨의 울음소리입니다. 그러나 헤롯의 칼날에 죽어간 수많은 어린 생명들의 울음소리와 자기의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울부짖는 울음소리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 희생된 고통의 울음소리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 탄생의 기쁜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님의 탄생 때에 죽어간 힘없는 사람들의 울음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냥 기쁘기만 한 성탄절이기보다는 함께 기쁨을 누려야 할 세상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에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평강과 사랑이 필요한 곳에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울고 있는 우리 이웃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그들의 울음소리에 귀를 막지 마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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