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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모든 일이 좋습니다 (Now All Is Well)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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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All Is Well! (눅 2:8-14)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옛날에 게으르기로 소문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밭으로 일하러 가고, 그 게으른 농부만이 텅 빈집에 남아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른한 오후, 언제나처럼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소린가 싶어 농부는 게슴츠레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간 큰 도둑이 담을 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농부가 잠결에 들은 소리는 바로 도둑이 낡은 담장을 타 넘으면서 떨어뜨린 벽돌 소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도둑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다시 스르르 잠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어어, 도둑이네. . . 저놈, 담장을 넘어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중얼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내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농부가 다시 힘겹게 졸린 눈을 떠보니 도둑이 담에서 뛰어내려 마당을 슬금슬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다시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오기만 해봐라. . .”
농부가 깊이 잠든 줄로 안 도둑은 살금살금 집안으로 들어와 농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농부는 잠에 취한 채 속으로만 중얼거렸습니다. 
“저놈이 안방으로 들어가네. . . 뭘 가지고 나오기만 해봐라. . .”
얼마 후 도둑은 안방에서 값이 나갈 만한 물건들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대문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습니다. 게으른 집주인은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도둑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이놈, 다시 오기만 해봐라. . .” 
(김남준 목사의 "게으름" 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바로 "게으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대강절을 지나면서,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크리스마스는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오늘 크리스마스의 첫 기쁨의 소식이, 추운 겨울에도 열심히 양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 목자들에게! - 영적 게으름을 극복하라는. . .
저는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성탄의 첫 메시지가 목자들에게 제일 처음으로 전해진 사실에 대하여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이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특별한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게다가 목자들이 추운 밤에 자기 양을 지키고 깨에 있던 것으로 보건대, 성실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탄은 성실하고, 그리고 부지런하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에 대한 대망(待望)이 있었습니다. 약속이 있었기에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은 주님이 태어날 때 깨어있었던 사람에게 였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 부분에서 아주 강력하게 도전하는 성탄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세상 속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리는 귀중한 사명을 주셨다는 것. 즉 우리의 사역이란,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서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 지내는 이 크리스마스가 교회 안의 축제와 교회 안의 사건으로 제한된다면 정말로 무의미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오래 전 청년들과 함께 야탑역 광장에서 찬양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행사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 찬양으로 시작할 때보다, 춤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불행하게도 제가 마이크를 들고 메시지를 시작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저의 복장도 잠시 목사의 신분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화면처럼 말입니다. 저는 그 날 행사가 가장 강력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전달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안의 행사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울려 퍼진 복음의 소식으로 말입니다. 
크리스마스, 주님의 나심은 거룩한 곳에서가 아니라, 세상에 나심으로, 그것도 목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심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는 것을 세상과 동떨어진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룩한 일을 한다는 핑계로 세속적인 일을 무시하려는 경향들 말입니다.
어쩌면 세속적인 일에 대한 무능함을, 거룩한 일을 한다는 핑계로 정당화하는 경우들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신앙인들이 믿음 좋은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하려는 의지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조심스럽기도 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직원을 채용함으로 인해 낭패를 본 경우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직원들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회사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주보를 만들거나 교회 일을 하고, 언제든지 교회에서 부르면 회사 일을 접어 두고 교회로 뛰어갑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고, 회사는 세상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믿음은 좋은데 세상에서 무능하고, 교회일은 열심히 하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소홀한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음에도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만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장에서 구체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은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한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구절절 옳은 말을 잘도 늘어놓지만, 귀를 막고 눈으로 그들의 삶을 보면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다”(김남준, “게으름” 21 쪽)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명을 무시하고 사는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이 게으름의 문제는 영적인 부분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실성이 결여된 게으름은 소위 ‘한탕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한참 우리를 시끄럽게 했던 로또복권이 있습니다. 이 복권을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서 성실하게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한탕주의를 노리는 게으른 사람들 이었습니다. 한방에 인생의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 말입니다. 
800만분의 1이라는 확률에 매달리는, 마치 1년 동안에 벼락을 두 번 맞거나 교통사고를 5번 당할 확률인데도 말입니다.
목표가 불분명하므로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삶이 아니라, 어느 순간 바뀔 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무의미하게 사는 사람들 말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매일 매일의 삶에서 주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영적 경건을 유지하고 살아가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싫어서 어느 순간에 로또복권이 터지는 것처럼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마치 성경에 등장하는 열 처녀 중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말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성실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허랑 방탕한 세월을 지나면서, 기름이 있을 때에 신랑에 오기를 바라는 요행을 바라는 처녀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한 번에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혹,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댈지 모릅니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에 영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들이 충만한 은혜를 누리며 살 던 때가, 할 일이 없어서 한가하던 때이던가요?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없이 많은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던 때, 아주 분주하지만 하루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는 살 수 없던 때 소중한 시간을 내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으셨나요? 

우리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때를 지나면서 가장 절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났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크리스마스만 주님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갔던 날들이었습니다. 
좋은 환경이 우리들에게 영적인 기회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성실함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새벽예배를 드리면서, 매일 주님의 임재를 뜨겁게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의 역사하심을 뜨겁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리는 예배시간들의 성실함이야말로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지키며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쁜 소식은 묵묵하게 자신의 영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언제 임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목자들에게 거룩한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실한 목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습니다. 왜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해 주었을까요?
혼자만 알고 기뻐하라고요. 인간은 근원적으로 기쁜 소식을 안에 감추고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은 나가서 이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음을 전하는데, 효과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 이들이 전하는 말이라야 진실성이 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부담이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인 목자들에게 지워진 것입니다. 
이 시대에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가장 인정을 받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어울릴 수 없기에, 다른 사람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할 수 있는 성실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
당신이 그리스도인이기에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정도를 걷는 모습을 가르쳐주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늦은 밤이 되어 불을 피워 놓고 잘 수 있었지만, 늘 맹수들이 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남이 보지 않을지라도, 내가 지키고 있는 양이 소중하기에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사명감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학생들도 많이 나와 있는데,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은 교회 일에 매달리므로 학교생활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모범적인 학생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즐거움과 잠을 줄일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환경이 좋을 때까지 기다린다.” 가장 불성실하고 게으른 사람의 표본입니다. 
환경이 좋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환경은 영원히 우리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극복하고 싸우면서 이겨야 할 상대입니다. 잘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우리 육체의 게으름입니다.

바로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있던 목자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한 부담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부담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준행하기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 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모든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합니다.

거룩한 부담을 진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저는 훈련받을 때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주 힘든 200km 행군을 할 때, 그 행군 장비들은 짐인 것 같으나 그 짐이 없이는 행군을 마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그 짐이 힘이 되기도 하고, 그 짐으로 인해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 짐을 지고 행군을 해야 하는 이유는 행군의 여정에 필요한 장비들이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짐을 내려놓는다면 오랜 행군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가는 순간이 가벼울지 모르지만, 긴 행군을 완성시켜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 무거운 짐으로 인해 힘들고 어려운 길을 뛰어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그 짐을 베고, 10분간의 달콤한 휴식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Now All Is Well!"

목자들에게 주어진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땅에 있는 모든 백성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많이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럴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기초한 “저들 밖에 한 밤중에” 라는 찬송가입니다. 후렴에 나오는 가사 중에 “노엘 노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중세 라틴어 “Natalis"는 ”birth"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혹은 “Novella"는 말은 ”news"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신빙성 있는 말 중에 하나는
“Now all is well"이라는 말을 줄여서 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위대한 빛 되시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주셨으니 불안에 떨던 인생들이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셔 들여 말할 수 없는 평안을 얻었으므로 크리스마스 아침만 되면 “Now all is well"이라고 인사를 교환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므로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오늘 크리스마스가 여러분들에게 왜 기쁜 날 인가요? 크리스마스 때마다 수없이 들어온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보다는 산타가 관심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물이기 보다는, 산타가 주는, 누군가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선물로 인해 기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말입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예수님이 산타보다 더 좋은 이유를 이렇게 써 놓았더군요.
산타는 북극에만 살지만 예수님은 어디에든 계신다.
산타는 썰매를 타지만 예수님은 물 위를 걸을 수도 있다.
산타는 일 년에 딱 한 번 오지만 예수님은 언제든지 도와주신다.
산타는 불청객으로 굴뚝을 타고 내려오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대문 앞에 서서 문 두드리시며 우리가 초대했을 때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신다. 
산타에게는 젤리로 가득한 그릇 같은 똥배가 있지만 예수님께는 사랑으로 가득한 심장이 있다. 
산타가 줄 수 있는 건 ‘허허허’하는 웃음뿐이지만 예수님은 건강과 도움과 희망을 주신다.
산타는 ‘울면 안 돼’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염려를 내게 맡기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다.
산타의 도우미들은 장난감을 만지만 예수님은 새 생명을 만드시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하시고, 깨진 가정을 고쳐 주신다. 
산타는 우리에게 웃음을 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는 기쁨을 주신다. 
산타는 우리의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선물을 놓아두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물이 되어 나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김봉준 씨의 “온 세상에서 끌어 모은 감동”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운동회 경기 중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있다. 장애물 경주이다. 우리 반에서 두 명의 선수가 나갔는데 한 아이는 육상선수였고 또 다른 아이는 키가 가장 작은 아이였다. 
󰡒땅!󰡓하는 신호음과 함께 육상선수인 아이는 당연히 먼저 뛰어나가 사다리를 통과하고 뜀틀을 뛰어넘어 가마니까지 뒤집어쓰고 나왔다. 저만치 앞에 놓인 쟁반 위의 밀가루에 얼굴을 파묻고는 접혀진 종이를 입술로 물었다. 그리곤 관중석을 향해 쏜살같이 뛰었다. 접힌 종이를 펼치는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뿔사! 접힌 종이 속엔 󰡐할머니󰡑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그 친구가 아무리 잘 뛰면 뭣하나? 할머니가 뛰질 못하는 걸…. 결국 그 아이는 다 이긴 경기를 놓치고 말았다. 
반면에 키가 작은 아이는 종이를 펼치는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체육 선생님󰡑이란 글자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얼씨구나󰡑하고 선생님 손을 잡고 뛰는데, 아이의 걸음이 시원찮았던지 체육 선생님은 󰡒얘, 안되겠다. 내 등에 업혀라󰡓 하시곤 그 아이를 들쳐 업고 뛰기 시작했다. 1등으로 들어온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인생이라는 경주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장애물과 고비가 우리 앞에 있다. 빨리 가고 못 가고는 내 소원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함께 뛰는 경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수님께서 내 손을 잡고 뛰시다가 내가 시원찮으면, 󰡒얘, 안되겠다. 내 등에 업혀라󰡓 하신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만 믿고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인생 경주에서 앞으로도 계속 달려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이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디를 가든 걱정할 건 전혀 없다.

이것이 주님의 오심의 기쁜 소식입니다. “Now all is well."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어려움이 찾아올 때, 나를 등에 업고 갈 그런 분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힘이 있어도, 내 힘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나 혼자서는 설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짐을 져 줄 그분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아시시(Assisi)의 프랜시스는 제자들과 함께 몇 주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배가 고팠던 제자가 길을 가다가 맛있는 죽 파는 것을 보고 거의 발작적으로 달려들어 그 죽을 먹어 버렸다. 순간 다른 모든 제자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이 이 제자에게 쏟아졌고, 가엾은 그는 이제 자신이 파문당할 것을 각오한 듯 고개를 축 떨구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토록 존경하던 프랜시스가 주저 없이 자기도 죽 한 그릇을 들어 맛있게 먹고 난 뒤, 놀라 입을 못 다물고 있는 다른 제자들을 보며 말했다. 
“아, 실은 나도 너무 배가 고팠다. 우리 금식 기도는 오늘로 끝내자.” 
정말 감동적인 리더십 센스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주님이 오시므로 “Now all is well"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부담을 대신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될 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지시고 가시는 일, 그것이 임마누엘의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짐을 지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기쁨의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성실하게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그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바로 이 오심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심의 의미를 분명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집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교회의 위치를 몰라서 그 마을에 사는 사람에게 교회의 위치를 물었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향해 오늘 그 교회에 나오는 천국에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 “교회 가는 길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느냐고요.”
오늘 여러분들은 바로 “Now all is well"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 속에서 평안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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