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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빛으로 오신 예수 (요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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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오신 예수 (요 1:1-5)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약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서 여러 번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일념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바로 오늘이 그 성탄절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그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요한은 예수는 왕이시고 영광의 주시오, 또 영생의 주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그 예수님을 또 다른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압축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은 또 몇 가지로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오심 

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나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2-3절에서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그”와 “말씀”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정신 차리지 않고 읽으면 헷갈립니다. 여기서 소위 삼위일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아주 어려운 교리이고 난해한 신학입니다. 우리가 흔히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합니다. 이 세 분은 속성은 하나이지만 격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성경을 공부하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만들게 된 신학이론입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 개념은 균형 있는 신앙이고 건강한 신학입니다. 

균형 없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거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한때 예수론만 강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만 강조했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성령론만 강조되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성령 받고 능력 받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편협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균형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6-20절을 보면 삼위일체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의미합니다.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사죄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소속이 하나님께로 이전되게 됩니다. 즉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나의 이전의 삶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에서 살아가는 새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삶에서 세례 이전과 이후는 엄청나게 신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의 세례는 과정이고 생명이고 주님의 부탁이고 명령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을 보면 그 세례를 줄 때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주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를 베풀 때 삼위일체의 하나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이 삼위의 하나님 모두가 창조사역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했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오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빛으로 오심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오셨고, 동시에 생명과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께 가면 그 빛을 이어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생명, 빛, 사랑, 진리라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빛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빛은 어둠을 밝게 만들고 죄를 태워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게 되고 심판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사람들은 이 빛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밝은 것보다는 적당히 어두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삶이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이 어둡고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는 “어둠의 자식”이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금년 전반기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비가 많이 왔다는 얘기는 구름이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일조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각종 채소들과 과일들이 자라지 못했고 농사가 잘 안되었습니다. 특히 벼농사는 일조량이 풍부해야 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구름이 많이 끼면 곧 바로 벼에 도열병이 발생하고 벼멸구가 왕성하게 됩니다. 도열병은 일조량이 적으면 발생하는 병입니다. 일조량이 부족하면 습한 곳이 많게 됩니다. 그러면 그곳에 곰팡이가 발생하고 이끼가 끼고 벌레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농사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햇빛이 적기 때문입니다. 빛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세계적으로 맛있는 사과는 캘리포니아 산 사과입니다. 캘리포니아는 사막지역이라 연중에 거의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기 때문에 일조량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벌레가 없습니다. 심지어 여름에는 모기도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벌레가 없으니까 농약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일이 빛깔이 좋고 맛이 좋아 껍질 채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물이나 채소나 과일이나 자연 모두가 햇빛을 필요로 합니다. 햇빛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받아들이면 먼저는 내 안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밝아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나 이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빛이 밝으면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것을 꺼립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치부가 전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밝은 빛을 싫어하고 그 대신 어둠을 좋아합니다. 많이 밝은 것보다 적당히 어두컴컴한 곳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도 큰 교회를 좋아합니다. 큰 교회에 가면 적당히 사람들 속에 묻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교회에 가면 자기가 훤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싫어합니다. 또 앞자리도 싫어합니다. 앞자리에 앉으면 자기가 훤히 나타나버립니다. 그래서 뒷자리를 좋아합니다. 뒷자리는 자세가 참 편안한 자리입니다. 졸기도 좋고 전화 문자도 하고 메일도 볼 수 있고 주보도 읽기도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배가 시작될 때면 언제나 앞자리는 많이 비어있습니다. 또 선을 볼 때도 밝은 곳은 피합니다. 좀 컴컴한 곳에서 선을 봅니다. 밝은 곳에서 보면 내 얼굴 주름살이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을 보는 곳에 가면 한결같이 어두컴컴한 곳에 촛불을 켜 놓습니다. 

그런 곳에 가서 앉아 있으면 다 돋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이렇게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두운 곳을 좋아하면 부정적인 결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치 햇빛이 없는 곳에 곰팡이가 일고 이끼가 끼고 벌레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빛이 없는 곳은 우범지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세상의 각종 불의가 다 모여들게 됩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은 생명을 주는 빛이고 들추어내는 진리의 빛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무섭게 심판을 하는 빛이기도 합니다. 이 빛 되신 예수를 내가 받아들이고 영접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오심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을 이어받은 자임과 동시에 예수의 생명을 이어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생명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생명과 구원받지 못한 생명은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해 어둠속에 있는 생명은 살아있으나 죽은 생명입니다. 옛날에 구원받지 못한 나, 이 빛을 모르던 나와 구원받은 나와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용, 모양, 속성, 질, 색깔 등 전체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옛날과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를 모르고 살 때의 나와 오늘 예수의 자녀가 된 이후의 나를 비교해 보십시오. 얼마나 다릅니까? 내용이 다르고 질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모양이 다를 것입니다. 분명 예수는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 생명이 오늘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고로 나는 나이지만 예전과 엄청나게 달라진 나입니다. 질이 잘라졌고 내용이 달라졌고 색깔이 달라졌고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예수의 생명을 이어받으면 그렇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달라지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진정 예수의 생명을 이어받았다면 나는 품질이 달라져야 합니다. 모양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그 생명의 능력 가운데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김익두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고 변화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많은 쓴 뿌리가 없어지게 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먼저 없어진 것이 바로 술이었습니다. 술에 인박혀 살았던 분이었지만 예수를 만나고 그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술친구들이 자꾸 찾아와서 술을 먹이려고 유혹하고 시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익두 씨가 “나는 요즘 약을 먹고 있어 술 마실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약을 먹느냐고 친구들이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신구약을 먹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안에 생명 되신 예수가 들어오시니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메고 있던 멍에를, 쓴 뿌리를, 인박힌 술을 딱 끊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가 주시는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을 낳게 합니다. 

길로 오심 

5절에서는 “빛이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빛으로 생명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참된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가 없이는 내 앞길도 운명도 미래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불안하고 미래가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이 앞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답답한 것도 없습니다. 

안개가 짙게 깔려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합니까? 마찬가지로 미래가 불투명하면 너무나 답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미래가 너무도 암담하고 불투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옛 우리 조상들도 지금까지 깜깜한 상태에서 어둡게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운명도 모르고 미래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를 보면 절차가 그렇게 복잡한 것입니다. 장례절차만 봐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것이 죽음이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만든 절차들입니다. 

모두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 빛 되신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보니까 예수가 빛이시고 길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그제야 훤히 앞길을 보게 된 것입니다. 미래가 보이고 운명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내세가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그 길을 보았고 그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는 미래를 훤히 내다보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운명까지도 훤히 꿰뚫고 살았습니다. 

이다음에 천국에서 의의면류관이 주어질 것 까지도 다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항상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사도 바울을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빛을, 생명을 길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태연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이 서서 내려다보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그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원망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나의 앞길을, 내 운명을, 내 미래를, 심지어 내세까지도 보고 믿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빛이요 생명”이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빛을 내가 품고 그 생명을 내가 품으면 나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 10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꿈쩍도 안했습니다. 믿기는커녕 매일 술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매일 술만 마셔도 문제인데 한밤중이 되면 그 술 취한 친구들을 다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술상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주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그 때마다 불평한마디 안하고 그 시중을 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술상을 아주 잘 차려 내놓는 것입니다. 

남편의 술친구들은 그런 부인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자기들 부인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이 부인은 불평 한마디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불평한마디 없이 그 시중을 다 하십니까?” 했더니 그때 그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10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전혀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포기했습니다. 이제 나는 천국 갈 텐데 저 사람은 분명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평안하게 해 주려고 시중을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나의 길, 나의 미래를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는 질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는 사람은 오늘 조금 어려운 일이 있고 고된 일이 있고 가난과 질병과 실패가 있어도 그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에서 평안함을 누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오셔서 감추어진 길을 밝게 해서 길을 찾게 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의 소망이고 내일이고 미래이고 길이고 생명이고 빛이십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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