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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나루터에서 맞는 새 아침 (창 3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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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에서 맞는 새 아침 (창 32:22-32)


임진년 새해를 맞이하여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위에 인류의 축복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좌우를 돌아보시면서 새해 덕담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은 어린아이가 공원에서 비둘기에게 빵을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세계 평화만을 생각하는 아저씨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얘야, 지금 아프리카 같은 나라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다.  그런데 너는 사람들도 못 먹는 빵을 새한테 던져주고 있구나."

그러니까 작은 어린아이가 아저씨보다 몇 배나 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아저씨, 저는 그렇게 먼데까지는 빵을 못 던지는데여."

먼데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 내 형제와 이웃을 더 많이, 더 뜨겁게 사랑하고 이해하는 금년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세상 모든 만물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하루 하루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 위에 실패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모두가 귀한 일을 감당하고도 남을 사람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에는 주 안에서 성공할 것이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신앙이라는 것은 언제나 최악에서 최선을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최악의 상태가 최상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환경이 나빠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믿음이 없어서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만,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강한 믿음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고, 환경을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면 삶의 리듬이 살아나게 됩니다.  강하고 적극적인 믿음의 확신이 기적의 리듬을 낳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강하고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삶의 리듬이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생기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시간마다 때마다 믿음의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에 붙잡혀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나와 가정을 위해서 무엇인가 거룩한 도전을 시도하는 이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보다 더 나은 점을 발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바꾼 위대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을 지녔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할 때에 그에게는 그만한 위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인간적으로 결코 내놓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야곱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묘사된 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야곱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재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모든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환경과 이런 신앙의 조건 속에서, 이런 신앙의 기대를 받고 있는 야곱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일생이 보여주고 있는 삶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사기 치고, 거짓말하고, 잔꾀를 부리고, 수작을 부리고, 가는 곳곳마다 문제를 만들고, 그리고는 도피 행각을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의 행동이나 말이 매우 거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저게 무슨 신자라고?"  "저게 무슨 예수를 믿는다고?"  야곱의 일생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너무하다고 느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야곱의 삶 속에 도전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현장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 속에서 오늘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야곱, 너 이제는 손 좀 봐야겠어."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내 자녀이기에 사랑함으로 주께서 채찍을 드시고 야곱의 삶의 현장 속에 개입하십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는 좀 달라져야지….  그 많은 세월을 교회에 나가고, 그 많은 세월 동안 신앙적인 환경에 접촉하고, 그만큼 신앙의 도전을 받았으면 이제는 뭔가 달라져야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야곱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당한 수많은 사건들 속에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계속 반항하며, 계속 도피하며,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런 의미 있는 삶의 간증을 나타내지 못했던 야곱입니다.  이런 야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만큼 왔으면 이제는 무엇인가 나타나야지?"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접근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중대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의 상황은 절대로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본문은 야곱이 하나님에게 싸움을 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오시는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 편에서는 처음부터 싸움을 할만한 의지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2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보십시오.  이 씨름의 주격이 누구입니까?  누가 야곱에게 싸움을 거시는 겁니까?  본문을 보면 누구라고 했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이 싸움의 주체가 야곱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심각하게 보셔야 본문의 진정한 내용과 의미가 풀려집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형을 피하여 자기의 외삼촌이요 장인이었던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봉사합니다.  처음에 7년, 그리고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다시 7년, 그리고 다시 6년, 그래서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고생 고생하며 그를 섬기다가 약간의 재물을 얻고, 약간의 출세를 하고 보니까, 문득 고향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야겠구나.  이제는 20년의 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정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르기로 결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이민 생활에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출세하고 성공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 고향 길에 데리고 가는 이 거대한 행렬은 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를 보게 됩니다.  보십시오.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이것이 다 야곱의 재산입니다.  많은 재산과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그리고 하나 이상의 부인을 거느리고….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형을 만날 일이 걱정입니다.  왜 걱정이 안되겠습니까?  어머니하고 짜고서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이 일 때문에 형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자 정든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 머나먼 타국으로 야밤 도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 20년 동안 형은 이 동생을 얼마나 향해서 칼을 갈고 있었을까?  내가 어떻게 무슨 면목으로 형님을 만날 수 있으며, 또 형님이 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고향 가는 그의 발걸음이 그렇게도 무거울 수가 없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즐거워서 야단들이었을 것입니다.  "여보, 당신 고향은 어떻게 생겼어요?  아빠, 아직도 멀었나요?"  그렇게 흥분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야곱의 가슴은 천근의 무게가 짓누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 듯 얍복 강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야곱은 다시 특유의 잔꾀를 쓰기 시작합니다.  수작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일단 3분대로 나누었습니다.  제1분대, 제2분대, 그리고 제3분대에는 자기가 아끼는 아내와 자식들을 마지막에 배치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강을 사이에 두고 남아서 여차하면 마지막 목숨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 제일 뒤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종들에게 "형님을 만나서 이게 다 뭐냐고 묻거든, 형님에게 드릴 예물이라고 하라"고 일러줍니다.  다시 말하면 20년 동안 피땀 흘려 일해서 모은 전 재산을 형님에게 바쳐서라도 형님의 환심을 사서 무사히 귀향하려는 야곱의 심정을 우리는 여기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들을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혼자 떨어져서 얍복강 나루에서 밤을 지새는데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는 이 밤에 걱정과 근심이 야곱을 계속 안타깝게 만듭니다.  어쩌면 별 하나 없는 캄캄한 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밤 철야 기도를 해서 내 문제를 해결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냥 고민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고향에 무사히 돌아갈 것인가?"

그렇게 괴로워하며 불안과 근심과 초조 속에서 별 하나 없는 깊은 밤중에 얍복 강변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자기를 툭 찹니다.  자기를 막 쓰러뜨리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싸움은 야곱이 시작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야곱에게 걸어온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걸어온 씨름입니다.  무엇을 하시려고, 어떻게 하시려고, 도대체 어쩌자고….

하나님이 그 많은 세월을 지켜보았지만 하나님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타성적인 교회 생활, 형식적인 교회 출석을 계속하며 변화의 흔적이 없으며, 뚜렷한 변화를 보지 못하는 야곱을 마침내 이 얍복 강변에서 그를 바꾸기 위한 하나님의 비상한 개입이 지금 이 사건 속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야곱을 홀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하나님께서 야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야곱으로 하여금 홀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 때, 섞여 있을 때 우리는 괜히 폼을 재고 싶어합니다.  괜히 허세를 부리고 과장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있을 때에 우리는 가면을 씁니다.  그렇지만 혼자 있을 때에 우리는 정직할 수가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 우리는 가면을 뒤집어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도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홀로 있을 때에 고독 속에 절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홀로 있는 순간에 정말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필요했던 이 고독의 순간이 없었습니다.  어울려 다니며, 섞여 다니고, 밀려다니면서 계속해서 허세를 부리는 연극의 삶을 살았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이 연극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이 연극 때문에 우리 자신들의 참된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이 허세 때문에, 괜히 재는 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하고 자신 앞에서도 정직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홀로 있게 하십니다.  그가 나의 나된 모습을 참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기의 삶을 털어놓도록 하시기 위해서 얍복강 앞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얍복'이라는 말은 '자신을 비운다, 털어놓는다'는 뜻입니다.  이 얍복의 나루터에 야곱을 부르십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나타내며, 하나님 앞에 자기가 살아온 삶의 내용을 결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날 밤의 이 순간이 야곱의 삶에서 위대한 전환점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얍복이라는 강변에 홀로 두셨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을 이곳 영신 나루터에로 불러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을 비우고, 여러분의 삶에서 위대한 전환점이 되도록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영신 나루터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자신을 발견하고 새롭게 일어나는 거룩한 도전을 시작하십시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 25절 말씀입니다.  2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히프의 조인트가 나간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버리니까 그는 한방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 고통스러워하면서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이제는 어쩔 수 없구나.  그는 자기 힘의 마지막 한계를 느끼는 그 순간 앞에 도달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자기의 힘으로 언제나 어떻게 해볼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있다!

보십시오.  야곱이 지금까지 노력하면 안된 것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다 되었습니다.  어머니하고 각본을 짜고 마침내 장자의 권한을 빼앗았습니다.  처음에 부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했던 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물러섰습니까?  7년을 다시 노력해서 라헬을 얻어냈습니다.  이런 야곱인데 물러날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지금까지 자기의 노력, 자기의 투쟁, 자기의 정열, 자기의 계획을 가지고 그가 얻어내지 못한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자기의 수작이, 자기의 계획이, 자기의 논리가, 자기의 노력이 다 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요령을 부린 것입니다.  그래서 잔꾀를 부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긴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로 나의 삶 속에 필요한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찬송이야 합니다.  요식상,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입니다.  이따금 함께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묻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정말 내 삶 속에 하나님이 없어서는 안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이 사실을 깨닫습니까?  그렇다면 왜 요령을 부리십니까?  그렇다면 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십니까?

이것은 아직도 내 힘으로 어떻게 하면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더 신뢰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지금까지의 삶은 하나님을 들먹였지만, 예배를 드렸지만, 그가 직분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자기 중심의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게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주저앉아야지요.

우리의 착각은 다음 구절에서 계속됩니다.  본문 26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야곱이 계속 씨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씨름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씨름은 이미 25절에서 끝났습니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서 쓰러졌는데 무슨 씨름을 더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싸움은 거기서 이미 끝나버린 것입니다.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당신은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붙드는 것, 이것은 더 이상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달림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하신 후, 야곱으로 하여금 정말 하나님에게 매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매달림이 아니라 발버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발버둥과 매달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발버둥은 누구를 믿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내 힘을 믿고 내 힘으로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내 능력으로, 내 지식으로, 내가 가진 삶의 모든 환경과 조건과 공급과 재료를 가지고 하는 것이 발버둥입니다.  그렇다면, 매달림은 무엇입니까?  매달림은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점이 내가 매달리는 상대에게 있습니다.  이제 이 지경에서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야곱에게 있어서 놀랍고도 귀한 사실은 자기가 한참 싸움을 하다가 "이 사람이 누구다" 라는 사실을 깨달은 점입니다.  야곱이 깊은 밤에 혼자서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싸움을 걸어오니까 처음에는 그가 형이 보낸 자객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살고자 발버둥을 쳤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낯선 이 사람과 밤이 새도록 씨름을 하면서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그 순간에 그는 깨닫습니다.  "그렇다.  이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셨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매달립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발버둥치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금년에도 내 노력과 내 능력을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발버둥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의 전 존재를 맡겨버리십시오.

가만히 보면 신앙 생활을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어려운 사건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여전히 자신을 경험과 지식을 믿고 발버둥칩니다.  어떻게 해 보려고.  그래서 사기도 칩니다.  그래서 요령도 부립니다.  그러다가 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어려워집니다.  물론 그래서 잘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잘되니까 이렇게 계속해도 되겠구나 싶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 삶의 위기를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야곱만은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사는, 그리고 진정한 변화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온 것입니다.  네 인간성의 한계를 알아라!  네가 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알아라!  좀더 심한 말로 하면, 네 꼬라지를 알아라!

그래서 도도하고 잔꾀를 부리는 그를 뉘어버리는 것입니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져 넘어지면서 야곱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져 일어설 수가 없는 야곱,그는 마지막으로 옷자락을 붙잡고는 전 존재를 걸고 매달립니다.  그리고 부르짖습니다.
"도와주세요.  이제는 당신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 순간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27절의 말씀입니다.  2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야곱이라는 뜻은 "발뒤꿈치를 붙잡다. 계략을 써서… 대신 들어 앉다, 사기를 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그가 태어날 때 받은 이름입니다.  야곱은 형님과 쌍둥이로 출생할 때에 뱃속에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신경질 나서 2등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1등이 아니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목적을 관철시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면서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쳤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름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이스라엘.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입니까?  그래서 야곱이 정말로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의 더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네 마음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결코 발버둥이 아닙니다.  신앙은 매달림입니다.  그것은 신뢰입니다.  그것은 안식입니다.  초점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분에게 있어요.  내 연약함을 알기에, 내 절망을 알기에 그분에게로 기대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시고 내 인생을 살아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기대십시오.  그분께 매달리십시오.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긴 밤, 그 고통스러운 갈등과 싸움의 밤이 지나고 해가 돋기 시작합니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남으로 인하여 야곱은 절었다고 했습니다.  절뚝절뚝 절면서 해가 돋은 새벽에 얍복강 나루터를 지나는 이 사람,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더 이상 인생의 낙오자가 아닙니다.  그는 절고 있었지만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난밤에 그렇게도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던 야곱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다스리심에 전존재를 다 맡겨버린 이스라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 절고 있었지만 그러나 얼마나 속이 시원했겠습니까?  그는 절면서 눈물을 흘렸겠지만, 그 눈물은 기쁨에 넘치는 감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치시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굴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에 그는 절뚝거리며 걸어가면서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날 절면서 얍복 나루를 떠나던 야곱이 이렇게 말했으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저를 잘 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방법은 하나님의 일상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방법이요, 채찍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루터에 여러분을 홀로 있게 하시기 전에 여러분이 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십시오.  내 삶의 내용을 보십시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입니다.  내가 가진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신앙이라는 것이 일주일에 한 번의 악세사리입니까?  나는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갑니까?  내가 하나님의 이름은 들먹이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필요를 깨우쳐 주시고자 이 나루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십시오.  알아서 나루터로 혼자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나루터에서 내 인간성의 한계를 아십시오.  내 스스로의 연약함을 아십시오.  발버둥은 이제 그만 두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매달리십시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나루터는 필요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이 나루터에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 언양 영신교회의 나루터에서 새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요식상 부르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삶을 살아오는 사람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기에 하나님께서는 얍복강의 나루터와 같은 나루터를 예비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발버둥치지마.  내게 매달려.  내가 네 삶의 주인인 것을 인정해.  그리고 항복해"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해를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야곱의 인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인생으로 이 한해를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허벅지 관절을 치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삶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그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얄팍한 잔꾀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지혜가 아니라 그분의 전능하신 지혜를 의지하십시오.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새 아침을 맞았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은혜로 금년 한해를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얍복강을 건너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나아가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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