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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나의 순서는 언제 오는가? (눅 8: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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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순서는 언제 오는가? (눅 8:40-56)

오래전 라디오를 듣던 시절에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내보신 분 계십니까? 요즘도 신청곡을 보내는 제도가 있기는 한데 문자 메시지와 콩게시판으로 보냅니다. 정성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엽서를 보냈습니다. 거기에 정성이 있었지요. 보낸 후에 내 차례가 올지 기다립니다.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당첨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청자들은 자기의 엽서가 당첨되도록 엽서를 예쁘게 꾸미고 또 재미있는 사연을 담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DJ가 내 신청곡을 틀어주기는 하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도중에 끊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신청곡은 별로 보낸 적이 없지만 라디오 시사프로에 의견을 제시한 경우는 있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PD에게 나는 이런 이런 의견이 있다고 말하면 PD가 잘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그리고 몇 십분 기다리면 정말로 전화가 옵니다. ‘앞에 있는 사람 다음 순서입니다. 라디오 볼륨을 줄여주세요.’ 그리고 진행자가 ‘다음 분 받겠습니다. 안녕하세요?’하면 그게 큐입니다. 그때부터 말을 시작하는데 ‘어디 사는 누구이십니까?’ 이러면서 대화가 시작됩니다. 제 목소리를 들어보신 적도 아마 몇 번 있으실 것입니다. 

순서를 기다리는 것은 문화인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건 본능적인 것입니다. 줄서는 것, 질서를 기다리는 것, 새치기 하지 않는 것, 이것은 선진문화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본능적인 것입니다. 짐승의 세계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사자들이 먹이를 먹을 때 순서가 있습니다. 수사자가 먼저 먹습니다. 수사자가 간과 내장을 먹는다고 하지요. 그 다음에 암사자가 먹고 그리고 새끼 사자가 먹습니다. 사자들이 먹고 나면 공중의 새와 하이에나가 청소를 합니다. 

가족 간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요즘은 전부 외아들, 외딸이다 보니까 기다리지 않지요. 맛있는 게 있으면 전부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형제가 많은 집은 순서대로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서열이 있습니다. 장유유서대로 어른이 먼저 드시고 이런 식으로 식사든 무엇이든 순서가 있습니다. 

조금 기다릴지라도 내 순서가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다면 기다리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연금에 대한 염려가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은 잘 운용되는지 모르겠지만 노인인구가 더 많아지고 젊은 인구가 줄어들고 소득이 줄면 나중에 은퇴할 사람이 받을 연금이 남아있을지 그것은 보장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국민연금이 폰지 사기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폰지 사기는 나중에 가입하는 사람의 돈으로 먼저 가입한 사람에게 주는 제도입니다. 이건 계속해서 가입하는 사람이 있는 한은 지속될 수 있지만 더 이상 가입하는 사람이 없으면 돈이 떨어집니다. 

압살롬이 왜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까. 자기 순서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이미 아버지 눈 밖에 났기 때문에 왕위가 자기에게 돌아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선수를 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건 전체주의 사회에서 항상 벌어지는 문제입니다. 자식은 많고 자리는 하나밖에 없을 때 같은 아버지의 자식 간에도 암투가 벌어지고 아버지에게까지 반란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순서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직장생활 하시기 때문에 승진에 대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내가 승진할 기회를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만일 나보다 어린 사람이 승진하면 그건 이제 기회가 없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옷을 벗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기다림의 끝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기다리는 차례가 있으십니까? 순서가 있으십니까? 언제까지 순서라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까? 한번은 제가 페이스 북에 ‘이성은 버스와 같다. 하나를 놓치면 그 다음 게 온다.’ 이렇게 글을 올렸는데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어느 젊은이가 답글을 올리기를 ‘하지만 막차는 놓치면 안 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막차를 놓치면 기다린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더 이상 오는 게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순서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에 기회와 소망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아니고 막차를 놓쳐서 이제는 기다리고 기다려도 내 순서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적막한 인생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이로라는 사람은 기다리던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야이로가 예수님 면담 1순위였습니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그래서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1순위에요. 그런데 도중에 어떤 여자가 새치기를 했습니다.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순서를 가로챘습니다. 그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기로 했던 예수님이 도중에 이 혈루병 걸렸던 여인과 대화하느라 시간이 지체됩니다. 그 도중에 집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옵소서’ 이 말은 더 이상 기다려봤자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 예수님도 이제 도와줄 수 없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소용이 없다, 당신은 막차를 놓쳤다…. 

이것은 야이로의 심령을 무너지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자기 딸이 죽은 것도 슬픈 것이고 예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도 슬픈 것입니다. 인생도 끝났고 신앙도 끝이 나는 것 같은 순간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듣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야이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사람의 눈에는 이제 기회가 날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래서 더 큰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습니까. 야이로의 딸이 살아있을 때에는 병을 고치는 기적이 되겠지만 죽은 다음에는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더 큰 기적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살면서 늘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순서대로 사람에게 복을 주실까 하는 것입니다. 나이 순서대로 복을 주실까, 아니면 믿음의 순서대로 복을 주실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순서대로 복을 주실까, 부모님의 쌓은 은덕대로 복을 주실까,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순서는 무엇에 의하여 결정되는가, 알 수 없습니다. 제일 쉬운 답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충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을 알고자 합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보시고 다윗을 선택하셨을까. 무엇을 하나님이 보시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까. 예수께서 무엇을 보시고 열 두 제자를 선택하셨을까. 예수님이 무엇을 보시고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사도로 부르셨을까. 성경이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했고,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린 다음부터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야곱이 하란으로 홀로 가는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하나님이 우리 삶속에 역사하시는 일은 순서가 있고, 때가 있고, 약속의 단계에 있다가 성취의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사십년을 보낼 때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광야 끝 편에서 떨기나무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부르신 그 다음 사십년은 변화와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같은 사십년인데 광야에서 보낸 사십년은 침묵의 연속이었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역사하신 그 다음 사십년은 기적과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기다림, 순서, 때, 이것을 누가 미리 알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왜, 그런 식으로 역사하실지 모세는 알지 못하고 오로지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순서가 언제 올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눈에 내 뒤에 기다리는 사람은 안 보이고 우리 앞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 뒤에도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 앞에 나보다 먼저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목사님은 앞에 누가 눈에 들어옵니까?’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제 앞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들, 하나님이 저보다 먼저 쓰시는 사람들이 앞에 줄을 서서 있습니다. 그래서 차마 ‘빨리 은퇴하셨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지요. 그러나 제 앞에 분명히 줄을 서서 기다리는 분이 있습니다. 때로는 저보다 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이로 정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모세가 팔십 세가 됐을 때 그의 사역을 시작한 것을 보면 나이로 자격을 잃는 일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을 시기하다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뭐가 특별해서 하나님이 저 사람을 저렇게 배려하실까. 저 사람은 어떻게 예수님에게 줄을 댔기에 나보다 먼저 복을 받는가,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착한가, 나보다 더 온유한가, 나보다 더 믿음이 좋은가, 나보다 더 기도를 많이 하나, 저 사람은 나보다 뭐가 더 의로워서 주님이 더 먼저 복을 주시고 먼저 만나주실까, 나보다 우선순위가 먼저일까?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 상으로 보면 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야이로보다 순서가 앞섰지만 그렇다고 이 여인에게 특별한 것이 있었느냐. 하나도 없었어요. 이 여성의 신상을 보세요. 병자이지요. 그것도 부정한 병인 혈루병을 열 두 해나 앓고 있습니다. 또 여자이지요, 가난하지요,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습니다. 특별한 게 없는 사람이에요. 저 사람이 나보다 더 특별하기 때문에 주님이 먼저 신경을 쓰시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야이로보다 더 의롭다거나 더 특별하기 때문에 주님이 먼저 만나주신 것은 아니고 차이점이 있다면 더 사정이 딱하고 더 오랫동안 갈급해했고 그리고 믿음의 손으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댄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우리는 그들이 더 의롭고 더 뛰어나고 더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여성은 더 약하고 더 불쌍하고 더 간절하고 더 딱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먼저 그의 상황을 돌아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보다 앞서 줄 서 있는 사람을 원망하는 습관을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보다 더 사정이 딱하고 더 불쌍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시고 또 믿음의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십니다. 마치 맨 뒤에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를 부르셨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윈루즈 논리로 보면 안 됩니다. 그 말은 저 여자가 내 앞에 있기 때문에 내 순서가 늦게 온다, 저 여자가 예수님의 시간을 빼앗았기 때문에 내 딸이 나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내가 소원을 이루려면 저 여자보다 더 빨리 가야된다, 이게 바로 윈루즈 논리입니다. 이 여자가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게 아니에요. 이 여성이 예수님의 시간을 뺏으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냥 몰래 손을 대고 그리고 가려고 했는데 예수님이 시간을 내신 것이지, 이 여자가 예수님의 시간을 뺏은 게 아니에요. 시간을 내신 것은 예수님의 결정이에요. 그걸 야이로가 알아야 돼요, 그 여자가 야이로의 시간을 뺏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세상의 논리로는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먹지 않으면 남이 먹어버리고 그런 게 세상에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의 기독교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쓴 <빙점>을 보면 주인공이 기독교인이 된 계기가 자기가 타고 가던 배가 가라앉을 때 한 가톨릭 신부가 자기의 구명조끼를 구명조끼가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이 됐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는 구명조끼를 내가 입지 않으면 내가 죽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아요. 적어도 그 신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 순서는 언제 오느냐? 옵니다. 올 때 옵니다. 예수님에게 줄을 섰다면 옵니다. 왜 지체되느냐? 주님이 먼저 처리해야 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이 야이로에게 뭐라고 말했느냐면 ‘예수를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건 지극히 세상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에게 줄을 서는 것이 예수님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도 예수님을 괴롭히지 않을 테니 예수님도 나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얌체입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나는 예수님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예수님도 나를 괴롭히지 말아라’ 예수님은 그것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여기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다리고 당신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여기시지 않습니다. 그걸 믿음으로 보십니다. 오히려 괴롭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불신이에요. 내가 주님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에요. 

그리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다릴 것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인천공항에 가면 마중 나오는 사람들이 대합실 문 앞에 서서 쳐다보지요. 오랫동안 기다립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도착했나 어떤 경우에는 물어봅니다. ‘어디서 온 비행기 도착했어요?’ 늦으니까 그러나 늦더라도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우리가 뭔가 기다리고 또 줄을 서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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