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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이제는 실천할 때입니다 (전 3:1-13,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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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실천할 때입니다 (전 3:1-13, 마 25:31-46)

<성서정과를 따라 말씀읽기>

임진년(壬辰年)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처럼 새해 첫 날이 주일인 경우도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2012년은 임진년, 흑룡의 해입니다. 60년 만에 찾아온다는 상서로운 해이지요.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 흑룡과 같이 힘차게 도약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 동안은 성서정과(聖書定課, Lectionary) 혹은 성서일과(聖書日課)에 따라서 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성서정과는 미리 정해놓은 성경본문을 말합니다. 성서정과는 구약과 신약 두 군데 모두에서 본문을 선택하는데, 신약에서는 복음서 한 군데와 서신서 한 군데에서 본문을 선택합니다. 3년을 주기로 성경의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부분들을 모두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사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은 자기 임의대로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하는 방법입니다. 설교자가 은혜받은대로, 흔히 주제적 관심에 따라 자유롭게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하는 방법이지요. 이렇게 설교를 하다보면 설교자가 선호하는 본문을 집중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모두를 골고루 본문으로 삼을 수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양식이라고 할 때, 교인들이 편식을 하면 안 되겠지요. 설교자의 입맛에 맞는 본문을 임의로 선택하다 보면, 이와 같은 영적 편식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성경을 종합 비타민처럼 골고루 먹일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정과에 따라 말씀을 전하면, 반드시 매주 구약과 신약을 다 다룰 수 있을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성서정과는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등과 같은 교회절기를 따라서 성경 본문을 선택해놓았기 때문에, 철저히 교회력을 따라 성경 본문을 쫓아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성서정과를 따라 설교를 할 때 생기는 한 가지 문제점은 설교 본문이 미리 정해져있기 때문에 설교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이나 교회의 상황과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성서정과를 따라 설교를 해보면 신비하게도 본문 말씀과 교회나 교인들이 처한 상황에 관련되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내리교회가 앞으로 3년 동안 성서정과를 따라 성경 본문을 읽고, 그 본문에서 나오는 설교 말씀을 들을 때 강단이 더욱 더 풍요롭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 위에 더욱 더 넘쳐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오늘 새해 첫날이자 성탄 후 첫 번째 주일에 주어진 성서정과는 신약에서 마태 25: 31-46절입니다. 예수님의 최후 심판에 일어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위에 초림하신 것처럼, 반드시 재림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초림주로 오셨을 때 세상은 알지 못했습니다. 재림주로 오실 때에도 그런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서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최후심판이 일어날 때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32-3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 모든 민족을 두 편으로 갈라놓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세운다는 것입니다. 중동 지역에 가보면 양과 염소는 한낮에는 항상 섞여 있습니다. 함께 섞여서 목자를 따라 다니고, 함께 섞여서 풀을 뜯어먹거나 물을 함께 마십니다. 하지만 갈라질 때가 있습니다. 양이 양털을 깎을 때, 염소가 젖을 짤 때 분리됩니다. 밤이 찾아와 우리 안에 들어갈 때 따로 떨어집니다. 이와 같이 양과 염소가 나누어지듯이 최후 심판 때에도 두 그룹의 사람들이 뚜렷이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양이 가는 오른쪽과, 염소가 가는 왼쪽으로 분리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 기준은 선행을 베풀었느냐 베풀지 않았느냐 하는 행위의 문제입니다. 먼저 35-36절을 보면, 양이 가는 오른쪽으로 가게 될 사람들이 한 일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오른쪽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배고팠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했습니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습니다.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모욕을 당했을 때 잘 해주었기 때문에 오른쪽,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왼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선행을 베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42-43절을 보세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왼쪽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은 정확히 양이 있는 오른편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배고팠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모욕을 당했을 때 냉대했기 때문에 왼쪽,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로 들어가는 나라인가?>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니,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인줄 알았는데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 때문에 들어간다니, 무언가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참으로 옳은 지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의 선행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실까요? 대답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오른쪽 천국으로 들어갈 사람들이나 왼쪽 지옥으로 들어갈 사람들이나 자기가 어떤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어떤 일을 했는지 분명히 알았다면, 천국행과 지옥행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이들은 자기가 선행, 혹은 어떤 비행을 했는지 전혀 무감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양쪽 진영 모두 깜짝 놀란 것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먼저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 묻습니다. 37-39절을 보세요.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아니, 주님이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는데 저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요?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다는데,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요?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했다는데, 그런 적이 없습니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는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다는데, 감옥에 갔을 때 찾아주었다는데, 도무지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한 일을 모르고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다고 볼 수 없지요! 

정반대로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 역시 자기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역시 깜짝 놀라 묻습니다. 자기가 한 일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44절을 보세요.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아니, 주님이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는데, 저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요?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는데,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요?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다는데, 그런 적이 없습니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는데, 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지 않았다는데, 감옥에 갔을 때 찾아주지 않았다는데, 도무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이들 역시 자기가 한 일을 모르고 지옥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행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 천국에 들어간 이들은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34절을 보세요.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상속받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에 보상으로 받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상속받는 나라이지요. 상속이라는 것은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에 상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본문 말씀이 인간이 베푼 선행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다고 잘못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행을 베푼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행을 베푼 것을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어야지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 선행을 베풀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어서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점수를 따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선행을 베풀어야지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도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상속받은 것뿐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도대체 주님께 선행을 베풀었는지도 모르고 했다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사실입니다. 양들이 있는 오른쪽 천국에 서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고 했는데 도무지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37-39절 말씀을 보면, “도대체 언제 우리가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깜짝 놀라서 묻는 것이지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4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한 것이라는 대답이지요. 주님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또 한 번 깜짝 놀랐겠지요. 그래서 본문의 제목을 “최후 심판”이라기보다는 “깜짝 놀랄 일”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정반대로 예수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주지 않았다는 사람들 역시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도대체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느냐고 반문합니다. 역시 주님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45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본문의 주제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 이웃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입니다. 걸인이나 노숙자 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영접해주고, 입을 것을 주고, 돌보고 찾아가며, 그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체스코가 말을 타고 가다가 나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마음에 감동이 와서 말에서 내려 그 나환자를 껴안았습니다. 그 순간에 나환자의 얼굴이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프란체스코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 하나에게 한 것은 주님께 한 것이었습니다.

투어스의 성 마르틴은 로마의 군인이면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미군들의 기갑부대, 즉 기병대의 수호성인이기도 하지요. 어느 추운 겨울날 한 시가지로 들어가고 있었을 때에 거지 한 사람이 그를 붙잡고 한 푼 동정을 했습니다. 때마침 마르틴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추위에 떨던 걸인이 새파랗게 얼어붙은 모양을 본 마르틴은 자기가 입고 있던 날고 헤어진 외투를 둘로 나누어서 반을 거지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날 밤 마르틴은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님이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계신 모습을 꿈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인 로마의 군인 외투를 반쪽만 걸치고 계셨습니다. 한 천사가 묻습니다. “주님, 왜 다 낡고 헤어진 군복을 반쪽만 입고 계십니까? 누가 준 외투입니까?”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 종 마르틴이 나에게 준 것이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수없이 들었습니다. 영어로 “Hindsight”라는 말이 있지요. 그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가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 때 불쌍한 사람 하나에게 작은 선행 하나를 베풀었을 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사람이 주님이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이런 경험들을 많이 했으면 합니다. 


<“푸른 내리! 물 댄 동산!”이 되려면>

2012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푸른 내리! 물 댄 동산!”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이파리가 시들지 않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람에서 이 표어를 정했습니다. 우리 내리교회가 우리 내리교회 교인들이 뿌리를 깊은 수원(水源)에다가 내려서 가뭄이 와도 걱정이 없고 사시사철 이파리가 푸르고 푸르러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12년 새해 첫 번째 주일 신년주일에 주신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 작은 선행 하나가 있으면, 우리 내리교회는 푸른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내리교인들은 물 댄 동산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연말에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중고등학생들이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슬픈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대구의 어떤 중학교 학생은 속이 너무 깊고 여리고 착한 학생인데 몇몇 친구들에게 너무도 큰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 학생이 죽기 전에 쓴 유서를 읽어봤는데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뺨을 때리고, 엉덩이와 허벅지를 집중적으로 때려서 노란색 멍이 들 정도로 오랫동안 폭력을 행사해왔는데, 무려 39번에 걸쳐서 폭력을 썼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물고문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아예 무시했던 것 같습니다. 

착하고 여린 제자가 이런 고통을 당하는데 선생님들은 무엇을 했고, 학부모들은 또 무엇을 했는지 답답합니다. 더군다나 바로 옆에 있는 친구가 부당한 고통을 당하고 이유 없이 시달리는데, 그냥 지켜보고 있는 급우들은 또 무엇인지, 이 세상에 인정도 정의감도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러한 때에 새해를 맞는 우리는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전도서 3: 1-8절 말씀을 보니까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만사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제 시간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2012년 새해 첫날이요, 첫 번째 주일인 오늘은 우리 모두가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새해에는 이렇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그 다짐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전도서 3: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오늘 제 설교의 결론입니다. 새해에는 기뻐하며 선을 행하십시오. 전도서 기자는 오랫동안의 인생경륜을 통하여 아주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우쳤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우리 모두 일일일선(一日一善), 하루에 착한 일 하나씩 하면서 살아갑시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베푸는 작은 선행 하나가 곧 우리 주님께 하는 일임을 나중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하는 일이 주님께 하는 일인지도 모르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어떤 칭찬이나 보상을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성품과 인격에서 자연스럽게, 저절로 나오는 선행이 될 것입니다. 선목선실(善木善實), 선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저절로 맺는 이치이지요. 임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결단을 하고 그 결단한 것을 실천할 때입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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