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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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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9)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앞둔 출애굽 이후 세대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본문은 2008년 신년에도 함께 나누었던 말씀인데, 다시 한 번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4-5).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말씀은 아주 오랜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말씀만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우리를 향해 ‘성서계명교회야 들어라’라고 명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며, 교회에 속한 내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이스라엘’ 대신 자기 이름을 넣어 ‘○○야’로 시작해서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두 번 반복되고 있는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을 주실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을 때, 먼저 최상의 낙원을 선물로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때도 당신님을 여호와로 계시하셨습니다. 창조사건이나 구속사건과 관련하여 여호와라는 명칭은 인간은 지극히 사랑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모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많이 생각했을 사람입니다. 그 자신이 전능하신 창조주의 사건을 기록하였고, 구속의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여호와’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613개 항목이나 되는 율법을 전해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세’하면 무엇보다 ‘율법’이 연상됩니다. 그렇다면 왕에 대한 백성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복종’이라고 말할 법합니다. 실상 그는 지금까지 모세오경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교훈해 왔었고 불순종에 대해 경고해 왔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마지막으로 그분의 백성에게 강조한 말은 ‘사랑’이었습니다. 딱딱하고 근엄할 것만 같은 모세와 율법의 중심에서 사랑을 만나는 일이 저에게는 언제나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리고 사랑 없는 복종이나 사랑 없는 경외심은 껍데기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사랑’이 빠진 신앙인이었기에 외식하는 자가 되고 말았지요.

하나님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태도는 “여호와”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일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오히려 대적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그런 세상을 변함없이 사랑한다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담을 수 없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분께 복종하는 태도를 만들지 못합니다.

사랑 없는 복종의 태도는 피차간에 무척 괴로운 일입니다. 사랑 없이 남편에게 복종하고 있는 아내, 사랑 없이 부모에게 복종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 가정의 모습과 가끔 다투기도 하고 불순종해서 야단맞기도 하지만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가정의 모습을 비교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왕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 꼼짝없이 복종하고 있는 백성으로 구성된 나라는 어떤 국가일 것 같습니까?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무엇보다 사랑의 관계여야 합니다. 우리네 삶에 허물과 실수가 많아서 때때로 그분의 징계와 채찍을 면할 수 없을지라도 그분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기 원합니다.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만일 우리 마음이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있고 또한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은근이라도 이 세상을 사랑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의 시간과 재정의 씀씀이는 우리의 마음이 진정 무엇을 사랑했는지 점검할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더 많은 소득과 성취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조금 더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기까지 그 사랑이 자라가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분을 사랑하기는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의 일부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다하고 … 다하고 … 다하여” 사랑했는가를 생각해보면, 한 없이 부끄러워지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지만 고작 아내로부터 일부분의 사랑만 받는 남편, 아내의 마음자리 대부분은 남편을 대적하고 모욕하는 타인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남편의 기분은 어떨까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오늘날 우리까지 하나님께서는 줄곧 당신님의 신부인 교회로부터 그런 비참한 남편취급을 받아오시지 않으셨는지 반추해봅니다. 그리고 올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좀 더 자라가기를 소망해봅니다.

하나님께 대한 교회의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6-7). 첫 단계는 내 마음에 이 말씀을 새기는 일로, 두 번째 단계는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단지 마음속에 작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8-9)는 말씀에서 보듯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사랑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사랑하는 이의 말을 마음에 새겨듣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셨던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의 비중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셨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함께 이 말씀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선언하실 정도로 새겨들으셨습니다(마 22:37-40). 사랑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평범한 듯 보이는 말 한마디도 마음에 담아두고 되새기며 기회가 될 때마다 기쁨으로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그 마음에 사랑이 담긴 사람은 어떤 모양으로든 밖으로 표시가 나며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종종 아내들은 남편들이 자기의 말을 새겨듣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건성으로 듣는 남편의 태도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어린 아이들도 부모가 자기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으면 무시를 받는다고 느낍니다. 이런 태도가 고쳐지지 않고 반복된다면 사랑의 관계가 유지되기란 힘들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기 시작할 때,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성은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사랑이 금간 상태에서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교육하기란 불가능하겠지요. 신앙의 형식만 남은 사람이 교육한다면 아무리 부지런히 가르칠 지라도 더욱 외식하는 신앙인을 만들고 놓고 말 것입니다.

지난 연말 왕따 사건과 학원 폭력 사건으로 착잡한 심정이 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그 사건 속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귀담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고통이 반감되지만, 건성으로 가볍게 들으면 고통이 배가 된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목사가 성도의 말을 마음에 새겨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게 된다면 성도의 고통 또한 배가될 것임을 생각하게 되었지요. 반대로 성도가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한다면 그 목회는 배로 힘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듣는 성도라면 타인의 말도 귀담아 듣는 태도로 나타남이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특성이 있습니다(고전 13:6). 그래서 ‘진리를 떠난 사랑’은 위험하지요. 진리를 듣고 마음에 새기며 부지런히 가르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을 떠난 진리’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한쪽을 잃어버린 사랑과 진리는 성경이 말하는 참사랑도 참진리도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험 중에 한 측면은 진리 없이 사랑을 외치는 것이며, 다른 한 측면은 진리를 외치다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진리를 벗어난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며 참교회를 추구했던 개신교인들은 서로 진리를 두고 논쟁하다가 죽은 정통주의 시대를 맞이했는데, 참된 교회를 세우려는 우리가 열정이 역사의 전철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풍조를 쫓지 않고 바른 교회를 세워나가야겠다는 정신은 언제나 바른 교회를 세우겠다는 명목으로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는 정신과 함께 가야합니다.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 위해 힘쓰면서도 그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생각과 갈등을 사랑으로 보듬어가야 할 것입니다. 서로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김을 통해 한 몸이라는 사실 또한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상이나 관념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말씀을 반복해서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구체적인 환경도 만들어가야 하겠지요.

하나님을 신앙하는 세월이 더해갈수록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해가기를, 자녀들에게 그 사랑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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