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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아굴의 소원 우리의 소원 (잠 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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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굴의 소원 우리의 소원 (잠 30:1-9)

새해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사역 위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주일이나 오늘이나 우리의 몸과 마음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주위 환경이나 옆에 함께 앉아 예배에 동참하고 있는 분들도 그렇게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묵은 해를 보내고 이제 새로운 해의  첫 주일을 맞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의 소원이 무엇이고, 그가 그 소망 앞에 얼마나 진실하게 살아 왔는가에 있다.” 

여러분의 평생에 꿈과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적인 꿈입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꿈입니까?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각자가 금년에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잠시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소원이 철저하게 육신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오래,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 하더라도 오늘 본문의 아굴과 같은 기도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아굴에 대하여 많은 정보는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앞 부분을 보면 그가 인간의 보편적 무지와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굴은 지혜자이면서도 자신은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5절).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섭리를 나타내 주시는 말씀이 있으므로 어리석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희망에 아굴은 자신의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7절,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여러분, 아굴의 자세를 보십시오. 앞선 2-4절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무지와 한계를 지적하고, 이어지는 5,6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대해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원천인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함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구들을 반드시 들어주셔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도 아굴처럼 간절하게 구하는 소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아굴의 소원을 우리의 소원으로 삼는 시간이 되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1. 진실한 삶을 소원함
  
아굴이 기도한 첫 번째 간구는 정직하고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8절상,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

“허탄”(샤웨)이라는 말은 ‘공허함’. ‘허무’, ‘거짓’ 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거짓말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가식이나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절의 “거짓말”(카자브)은 앞의 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추가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는 태도에 그 강조점이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본절의 “허탄과 거짓말”은  ‘헛됨과 거짓말’, 또는 ‘악함과 거짓말’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진실한 태도, 그리고 말씀을 의지하는 자세와는 반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
  
지혜 추구자 아굴은 자신의 마음조차도 스스로는 완전히 제어할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직하게 해 주시도록, 또 말씀을 진심으로 의지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소망은 진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실하려고 힘써 보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진실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살아보려고, 깨끗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진실한 삶의 가치가 어떠함을 잘 압니다.

지혜자 아굴은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욕심이나 허영심으로 헛된 영광이나 재물을 좇으며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하나님께 기도한 제목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라고 하셨을 때, 솔로몬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만을 구했습니다(왕상 3:9). 
  
자기 자신과 육신을 위해서 구하지 아니한 그의 진실한 모습에 흡족해 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지도 않았던 부귀와 영화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진실하고 투명한 삶, 그리고 말씀을 의지하는 삶만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설득력 있는 가장 큰 무기요 힘이 됩니다.
설령 우리가 억울한 말을 듣고 오해받거나 심지어 감옥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진실되고 의롭다면, 그 진실은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행동하지도 못하는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삶인가를 때로는 알면서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굴은 “죽기 전에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해 우리의 첫 번째 소원으로서, 진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에 강조점을 두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구역적으로, 그리고 전 교회적으로 우리 모두 진실한 삶을 향하여 전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적당한 재물로 만족하게 되기를 소원함
  
아굴이 기도한 두 번째 간구는 너무 많거나 적지 않은 재물에 만족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8절하,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앞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제게 가난도 부도 주지 마십시오’ 입니다. 여기서 아굴은 ‘가난’과 ‘부’를 동일선상에 놓고 부정하고 있는데, 잠언의 다른 곳에서 부요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이채로운 표현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기서 강조점은 부요함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물질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인간이 최고의 가치를 두는 재물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데에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본절은 ‘나의 정해진 몫의 빵을 제게 주소서’ 라고 번역됩니다. ‘정해진 몫의 빵’이란 인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양의 양식입니다. 일종의 중도의 삶(via media)의 수준을 영위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금욕주의자처럼 육신의 필요를 부정하는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 중심의 삶의 전형을 나타냅니다. 아굴은 적당한 재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꼭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할 뿐, 허망한 욕심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필요한 양만큼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아굴의 두 번째 소원은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양식이 없어서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재물과 양식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지었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유함 속에는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원치 않지만 찾아오는 가난도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자족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혜 추구자 아굴이 “물질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할까” 두려워 한 것은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직시한 기도입니다.

 '디오게네스 콤플렉스’라는 게 있습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자기가 사는 생활에 스스로 만족하고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집이라는 게 둥그런 나무통이었습니다. 이걸 데굴데굴 굴리면서 가다가 세워놓고 거기 들어가서 웅크리고 자고, 또 굴리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부끄러움도 없고 고통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찾아 방문하고 얼굴이나 사는 모습이 부러워서 "내가 왕이 아니면 당신이 되고 싶소. 그리고 당신의 소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겠소" 했을 때, 그가 한 유명한 얘기를 아시지요? 
"예, 소원이 있습니다. 내가 햇빛을 쬐는데 왕이 가리고 있으니 조금만 비켜 주십시오.“  

본문의 아굴은 너무 가난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까 두려워했습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장발쟝은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을 후쳐먹었습니다. 

너무 가난하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불의와 독재를 용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양심도 진실도 잃어버리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비굴한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9절,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아굴의 기도는 인간이 가야할 정도(正道)를 제시하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헛된 욕심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구하는 것이 지혜롭고 바른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숙하고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겸손합니다.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는 기도를 마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마저 자신의 욕심을 따라 해석하고 사용합니다.
이들은 비전을 야심으로, 영광은 명예와 인기로, 높아짐은 출세로, 축복은 재물과 건강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으로 바꾸어서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들은 ‘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 역시 요구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생각하여 오직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밤낮으로 부르짖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의 무리한 욕심을 결코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이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기를 원하십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둘 때 하나님께서는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람이 없게 하셨습니다(출 16:18). 하나님은 그 이상의 욕심을 낸 자들에 대하여 무서운 심판으로 벌하셨습니다(민 11:4-34).

주머니도 일정 용량을 넘어 무리하게 담으면 찢어집니다. 
강하게 보이는 다리도 설계된 하중 이상의 차가 지나가면 무너지는 법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자신의 권세만 믿고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 앞길을 막느냐’고 교만을 떨다가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출 5:2). 
  
고라 일당은 분수를 모르고 한계 이상의 자리를 탐내다가 오히려 땅속 깊은 곳으로 떨어져 망했습니다(민 16장).
  
이스라엘의 역사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배가 불러지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 길을 가다가 징계받은 역사의 되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겸손한 자세로 “내가 하나님의 큰 일을 힘쓰지 못했나이다”라고 인정했고, 하나님은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며(롬 7:21-24) 자신의 고통마저 교만을 꺽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했고, 하나님은 이런 바울을 누구보다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제임스 매콘키 목사님이 쓴 글입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우리 과에는 나보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우리는 그를 톰이라고 불렀다. 그는 온화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그를 아는 학생들은 톰이 장차 사회에 나가면 큰 성공 을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졸업하고 35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톰이 내가 사는 도시에서 강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강연회에 참석하러 가보니 4천여 명의 청중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의 말은 힘이 있었고 화술은 뛰어나 청중들의 혼을 빼앗아갔다. 
  
강연이 끝난 후 나는 그를 찾아가서 대학생활을 회상하며 기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난 후 내 친구 톰은 대통령 관저로 돌아갔고, 나는 10층에 있는 나의 작은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친구는 지금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나 내게는 부럽다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또 비록 나는 세인들의 시선도 끌지 못하면서 조용히 생활하고 있었으나 그의 지위가 탐나지도 않았다. 
  
나는 톰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내 속에 없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발견해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이 주신 봉사의 장소를 발견한 후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본문에 기록된 아굴의 고백과 간구는 짧지만 깊은 여운을 던져줍니다. 오늘날 조금 알고 배웠다고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무가치한 비판과 토론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까지도 도전장을 던지는 무모한 짓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아굴은 이같은 현실 가운데서 자신의 무지함과 비천함을 인정하는 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구한 두 가지는 꼭 필요한 것들 외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오늘 우리에게 깊은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만족하느냐, 곧 지족을 아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 첫 주일을 맞는 우리는 금년을 보다 지혜로운 소망으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지혜 추구자 아굴은 이처럼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한 삶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옮겨 주옵소서.”
그는 적당한 재물로 만족해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그런데 지혜 추구자 아굴이 간구한 이 두가지 소원은 사실은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나 자신이 되게 해 주옵소서.” 

자신의 생을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다가 죽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보람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아굴의 소원이 여러분 모두의 소원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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