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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한 가지라도 고칩시다.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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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라도 고칩시다. (막 10:17-22)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012년 새 해, 첫 날, 첫 주일, 참으로 뜻 깊은 주일입니다. 한 해의 계획은 새 해 첫날에 세우고, 한 해의 농사 계획은 조춘 즉 이른 봄에 세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새 해 첫 주일은 참으로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됩니다. 새 해가 돌아와도 아무런 결심도 없고, 아무런 계획도 없다면 그 사람은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덤 속에 있는 시체는 생각하고 계획하고 도전하는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성 백양사에 가 보신 일이 있지요? 백양사 절 마당에 보면 돌비 하나가 서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글귀가 쓰여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뭣고?”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화두’라는 것입니다. 화두란 불교에서 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선을 탐구하는 의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해를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일 년이 지금처럼 365일 단위가 아니고, 십년이나 50년 단위라고 한다면, 얼마나 그 기간이 길고 단조롭고 지루하겠습니까? 따라서 인간은 장구한 세월을 아무런 새로운 결심도 없고 새로운 도전도 없이, 구태의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춘하추동 사계절을 경험하면서, 일 년을 365일 단위로 하여 새 해를 맞이하도록 하신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새 해를 맞이할 때마다 지난해의 실수와 잘못을 청산해 버리고, 금년에는 인생을 보다 보람 있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후회 없는 삶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해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발전이 있고 성장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그가 만일 정상적인 신자라면, 새 해에는 더욱 믿음으로 살고,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맡은 바 직분에 더욱 충성하며 살고, 그래서 더욱 주님을 닮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보리라 믿습니다. 

만일 그러한 생각이 전혀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한 해를 또 다시 그럭저럭 어영부영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새 해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는 사람이요, 금년에도 신앙의 성장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그래서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방불한 불행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때문에 새 해 첫 주일에 새로운 결심, 새로운 각오, 새로운 도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 한 해에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고치고, 일시에 온전해지려고 하는 계획은, 그 발상 자체가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어서 실현 가능성도 희박하려니와, 해마다 더 큰 실패와 좌절감만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해에는 한 가지라도 고치고 한 가지라도 회개의 열매를 맺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 동안에 한 가지라도 고치면서 살고,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된다면, 십년 후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얼마나 주님을 많이 닮은 모습이겠습니까? 그래서 한 가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제가 초등학생 때로 기억됩니다. 그 때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예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강에 다리가 31개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한강 철교와 인도교 하나씩 밖에 없을 때입니다. 그 한강 인도교에 자동차가 수백 대 멈추게 되었는데, 원인은 한 자동차에 모래알 하나가 끼어 고장이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 가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주님의 발 앞에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은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젊은 청년이었고, 관원이었으며 큰 부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허술하게 장난삼아 사는 젊은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진실하게 살고 보람 있게 살려고 애쓴 청년입니다. 이를테면 모범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좀 더 깊은 인생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로 구원과 영생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는 학문이나 이론의 영역을 넘어선 바로 종교 문제인 줄 알고 예수님께 찾아 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었습니다. 꿇어앉은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그 청년은 부와 명예와 종교적 열심과 고상한 도덕성 등 누가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것을 다 갖춘 그 시대의 일등 신사였습니다. 그러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발 앞에 꿇어앉아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아뢰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 위하여, 또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또는 배불리 떡을 얻어먹기 위하여 나오는데, 이 부자 청년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까 하는 인생 최대 최고의 궁극적인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궁극적 목적인 영생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목적을 물질의 축복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혹은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자식들이 잘 되고 성공하기 위한데 두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을, 영생을 얻는 데 두시고 구원을 얻는데 두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 온 이 부자 청년은, 한 가지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곧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이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몰랐습니다. 마 19:16절에 보면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영생을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도의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떤 선행을 통해서 그 공로로 영생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생과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 청년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그러한 계명들이라면 자신 있다는 듯이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의 준수에 있어서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대답에 전혀 만족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당장 해내고 말테니 말씀을 해보라는 눈초리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에서 떨어진 말씀은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만 자신을 잃어 버렸습니다. 다리의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귀중하고 아까운 재산을 하루아침에 포기하라는 것은, 너무나 무겁고 가혹한 명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님을 찾았던 고상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슬픈 기색을 띄고 근심에 쌓여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부자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도 슬픔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티끌 같은 재물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육체의 만족을 버릴 수 없어서, 영생을 포기해 버리고 돌아가는 그 부자 청년의 영혼이 너무나도 불쌍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주님은 제자들을 조용히 둘러보시면서 무겁게 입을 여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크게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깜짝 놀라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면서 주님은 또 다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은 심히 놀라며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은 놀라는 제자들에게 다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오늘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과 그 생각을 단번에 꿰뚫어 보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그 청년이 영생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심은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신뢰하고, 하나님과 천국과 영생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님의 권고를 뿌리치고, 그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영생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는 천국과 영생을 소원하여 예수님께 달려 나오는 열심은 가졌지만, 천국 입성에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다른 것은 다 잘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들도 아주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것, 곧 돈을 더 신뢰하고 돈을 더 사랑하여 영생을 포기해 버리고 주님을 떠나간 것, 그것이 그를 멸망으로 이끈 치명적인 부족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우리의 신앙 성장에, 우리의 영혼에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실한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믿음이 더욱 성장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신앙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자 청년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재물에 대한 탐심 때문입니다. 호킨스는 말하기를 “탐욕이야말로 하늘에서부터 오는 부흥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다.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곳에는 이내 심령의 부흥이 뒤따른다.”고 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해묵은 동일한 시험에 부딪혀 망설이면서, 신앙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 나도 십일조를 하긴 해야 할텐데.....하면서 수년을 망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십일조를 드린다는 사실은, 신앙생활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됩니다. 대나무에 비하면, 십일조 생활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매듭과도 같습니다. 대나무에 있어서 매듭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①계속하여 성장하지 못하고, ②매듭이 약하면 부러지기 쉽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또한 신자에게 있어서 십일조를 하겠다는 결단이 서게 되면, 그것은 마치 제 2의 회심과도 같습니다. 루터는 “모든 인간에게는 두 가지 회심이 필요하다. 첫째는 심령의 회심이고, 둘째는 그의 돈지갑의 회심이다.”고 하였고, 웨슬레는 “한 인간 중 회심해야 할 마지막 부분은 그의 돈지갑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건너야할 강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곡식의 종자와 같은 성격도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듬해의 풍성한 소출을 바라보는 농부는 아무리 배고프고 힘들어도 종자까지 먹어치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리를 아신다면 오늘 이 시간 이 후로, 이 달부터, 모든 성도들이 꼭 온전하고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고 살며, 꾸러 가지 않고 꾸어주며 살고, 경제적인 불황 가운데서도 구제하며 선교하면서 사는 축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우리의 신앙 성장을 방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주일을 범하는 것입니다. 롬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 주일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은 자라고 성장하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받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자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신앙생활의 가장 초보 단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원수 사랑의 단계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하면, 주일을 심상하게 여기고 함부로 범하는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 수준이 아직 유치원 단계에 불과함을 알고, 새 해에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온 성도들이 꼭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고, 온전히 주님께 바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만, 또 하나님께서는 복주시마고 약속하신 날이므로, 이 날에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며 받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주시기 위하여 성별하신 날을 외면하면서, 복 받기를 기대하는 신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연목구어’ 곧 마치 산에 가서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성수주일을 힘써야 합니다. 성수주일을 잘 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는 어김없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을 주님의 거룩한 날이라 하여 존귀하게 여기고, 성수하는 신자를 존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을 함부로 범하고, 경홀히 여기며,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멸시해 버리시겠다고 하신 경고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 해에는 또한 빠짐없이 선교헌금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 두고 떠나실 때, 그들에게 맡기신 오직 한 가지 일, 오직 한 가지 유언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독생자를 선교사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하늘나라 시민들에게 분부하십니다. 

‘너희는 가라!’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안타까울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가라!’ 이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①Go Missionary ②Send Missionary가 있습니다. 오늘 이 선교에 관한 말씀을 들은 우리 청년, 대학생 여러분 중에서, 직접 복음을 들고 가는 선교사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교회에서 자라나는 학생들 가운데서, 복음을 들고 세계로 흩어지는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 복음을 들고 직접 갈 수 없는 성도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러한 성도들은 Send Missionary 곧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현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을 물질로 돕는 보내는 선교사가 다 되어야 합니다. 

죤 차이나맨에게 어떤 무신론자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천국에 가면 맨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죤 차이나맨은 대답하기를 “첫째,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를 하겠다. 둘째, 내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다. 셋째, 선교사님들을 물질로 도와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천국에 당도했을 때, 여러분의 선교 헌금으로 구원을 받아서, 이 복된 곳에 오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도하지 못한 성도가 있으시면, 새 해에는 꼭 그 한 가지를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가 전도해야 합니까? 1)주님의 至上命令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구주되심과,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4)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긍휼 때문입니다. 5)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막과 같은 불모지에서 하나님의 기름진 동산에 옮겨 심겨진 나무들입니다. 거름만 실컷 빨아먹고 열매는 맺지 못하는 땅만 버리는 나무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6)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7)전도자에게 주시는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온 성도들이 한 영혼이라도 꼭 주님께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뜻 깊은 새 해 첫 주일입니다. 이 첫 주일에 귀한 결심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해까지 실천하지 못한 것 있으면, 새 해에는 한 가지라도 꼭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성수주일을 하지 못한 성도들은, 새 해에는 꼭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한 성도들은, 새 해에는 꼭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작년에 선교 헌금에 동참하지 못한 성도들은, 새 해에는 꼭 선교 헌금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 해에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반드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입술에 재갈을 먹이지 못하고 성내기를 잘 하는 분들은 김준곤 목사님의 고백을 가슴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한다. 노와 독과 증(미움)은 안에 있는 잠복한 상태라면, 성내는 일은 폭탄의 폭발이요, 독가스의 분출이요, 더러운 것을 토하는 것과 같다. 한번 성내면 그 사람과의 인간관계는 비록 화해와 사과를 한 다해도, 감정의 거울에 금이 가서 없었던 상태로 원상복구가 잘되지 않는다. 내가 성내서 맘을 상하게 해준 분들의 무덤까지 찾아가서 사과했으나, 커다란 인격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내가 목사가 된 때부터, 성내는 일 한 가지만 절제할 수 있었더라도, 내 신앙인격이 지금 50점이라면 80점은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내에게, 자녀에게, 형제에게, 친구에게, 제자들에게, 내 성난 표정과 말로 상처 입은 분들에게, 즉석에서 혹은 후일에 늘 사과는 드렸지만, 다시 땅에 엎디어 빕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 속에 성난 귀신 한 마리가 나갔다 들어갔다 합니다. 내가 성낼 때는 이 귀신이 내 속에서 성령대신 발언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들에게 고칠 것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도 생활이 없는 것, 독경 생활이 없는 것, 시기와 질투, 게으름, 음란과 호색 등.....이 모든 것들 중의 한 가지가 자신의 신앙 성장을 방해하고 영혼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자기의 결점은 자신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결점과 허물들을 새 해에는 꼭 한 가지라도 고쳐서 살기로 이 시간 굳게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결심하시고 실천에 옮기시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놀라운 복을 주실 것입니다. 받아서 하십시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다!” 새 해에는 꼭 오늘 증거한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의 믿음이 더욱 아름답게 성장하고, 영육 간에 큰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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