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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와서 보라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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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 (요 1:43-51)


얼마 전 우리나라에 와있는 어떤 대사 부인의 얘기가 모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얘기는 이런 것입니다. 몇 해 전 어느 기자가 서울에  와있는 외국대사 부인을 인터뷰하러 갔습니다. 이 기자가 외국대사의 집에 가서 고물딱지 같은 재봉틀을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외국대사 부인은 그 재봉틀이 자기가 결혼할 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외국대사 부인은 자기 집의 커튼을 가리키면서 저 커튼도 이 재봉틀로 손수 만들었고 자기가 입은 옷을 가리키면서 이 옷도 재봉틀로 만들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여성들은 재봉틀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한국사람 같으면 외국에 대사로 가는데 몇 십 년 된 고물 같은 재봉틀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가져간다고 해도 새것으로 사가지고 갈 것입니다.

저부터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저는 이사를 무척이나 많이 다닌 사람인데 낡은 것이라도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다 가져가려고 하면 성도들은 의례히 버리라고 말씀하셔서 어떤 때는 억지로 새것을 장만한 때도 있었습니다. 요즈음도 어른들은 대개 “그것 버리기가 아까운데” 하고, 젊은 사람은 “구질구질하게 그런 것을 가지고 가느냐?”고 하면서 어른들을 궁상맞다고 합니다. 요즈음도 이사 가는 사람들을 보면 쓸 만한 것들을 그냥 버리고 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살림을 알뜰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재봉틀 질하고 있는 것 아닙니다. 심심풀이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또 옷 사 입을 돈 없어서 손수 재봉틀로 지어 입는 것 아니고 돈 없거나 커튼 집 몰라서 재봉틀로 커튼 해서 다는 것 아닙니다. 저들은 부지런하고 알뜰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을 보면 낭비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잔반이라고 부르는 음식찌꺼기가 일 년에 수조 원 어치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실은 우리가 가정에서도 음식찌끼가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버리는 음식이 없어야 합니다. 한편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금의 수고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직장을 버리고 나와서 더 좋은 직장이 없나 찾고 조금 힘만 들어도 어려워서 그일 못하겠다고 그만두는 예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땀 흘리려고 하지 않고 구정물에 손 넣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 주부들도 아예 시집갈 때에 모든 것을 자동화된 것 사가지고 가지를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누를 끼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누를 끼친다는 말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아무에게도 공밥을 얻어먹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일 안하고 돈 벌려 하고 힘 안 들이고 돈 벌려 하고 출세하려니깐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병들어 썩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계, 경제계, 교육계, 종교계, 사법부, 군인, 공무원, 민간인 할 것 없이 어느 한부분도 썩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공범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 병들어 썩고 있습니다. 계속 병들어 썩고 있는데서 같이 병들고 같이 썩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는 원했지만 땀 흘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를 잘 믿는 성도들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근면하고 더 진실하고 더 정직하고 더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갈릴리로 출발하시는 모습을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라 하면 주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사렛 동리가 있는 곳이고 또한 공생애 사역의 주요 무대였습니다. 그 당시 갈릴리는 주로 사회적으로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고 어업이나 목축업에 의존해서 생활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수입이 있었다면 국제적인 통로였기 때문에 그 지역을 통행하는 이들로부터 통행세를 받아서 그 지역생활에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헤롯시대에는 주민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목욕탕, 체육관, 경기장 같은 헬라적인 문화를 반영하는 건물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는 이방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라 해서 순수한 유대인들로부터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46절에서도 나다나엘이 빌립으로부터 주님을 소개받고 하는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쓰레기에서 장미가 필 수 있느냐?”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곳으로 취급받던 곳이 갈릴리 지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소외받는 계층이 많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주로 저들의 병을 고쳐주고 저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저들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 희망과 평강과 은혜와 사랑의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갈릴리에 대해서 예언하셨습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그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님은 고통 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지금도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죽음의 길에서 헤매는 자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께서 갈릴리로 향하여 가시려고 할 때에 빌립을 발견하고 부르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먼저 발견하시고 부르십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먼저 알고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먼저 보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는 항상 감사하게 마련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그리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벳새다란 “고기잡이 하는 집”, “그물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만큼 어부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보시고는 대뜸하시는 말씀이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 빌립의 사정이나 형편을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실 뿐입니다. 지금 당장 머뭇거리지 말고 좇으라고 강한 결단을 촉구하는 명령을 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 앞에는 “아니요” 혹은 “글쎄요”가 없습니다. 모든 말씀에 아멘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예”만 있고 “아니오”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 앞에서 예 하고 아멘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는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로 따라오라는 의미로 쓰였고, 둘째는 “본받으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서 진실한 기독교인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자신을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복종시켜서 주님의 완전한 제자가 되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본받겠다고 하는 자세 그리고 예수를 따라 살겠다고 하는 자세가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참 제자가 되겠다고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 빌립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소개합니다. 물론 저의 소개가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니라”고 했어야 되는데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고 거기에 덧붙여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를 합니다. 

그러니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메시야 예수라고 해야 할 것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하니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했거늘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는 결코 메시야일 수가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무화과나무 밑에서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그는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나다나엘의 진지한 자세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저가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말씀의 깊이가 있습니다.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지를 않습니까? 더군다나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첫 번째 이적을 행하셨던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바로 그 마을 가나 출신입니다. 

그 당시 가나 역시 갈릴리 지방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갈릴리 바다 주위의 도시에서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마을입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면 가나보다도 훨씬 더 골짜기입니다. 그러니 베들레헴도 아닌 갈릴리에서 그나마도 나사렛과 같은 골짜기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천을 가야한다고 하는 것을 잘못해서 이천을 가야한다고 해 보세요. 정반대로 가버리지를 않습니까? 
그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나다나엘의 말을 듣고 빌립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정말 지혜롭게 말을 합니다. 결코 그는 나다나엘과 말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 하나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단지 “와서 보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만나게 되었을 때 나다나엘이 어떻게 됩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중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만 그보다 더 훨씬 전에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다나엘이 그 이름처럼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했던 나다나엘도 주님을 마주 대하는 순간 그 앞에 거꾸러지지를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눈여겨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놀라서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는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인 줄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그 때 그 자리에서 나다나엘을 부르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동역의 원리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듯 나다나엘도 직접 부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빌립을 부르셔서 빌립으로 하여금 나다나엘을 인도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입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누구에게라도 강권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실컷 두들겨 패서라도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빌립을 부르듯 그렇게 우리들을 부르셔서 우리로 하여금 빌립이 나다나엘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듯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가족과 친지, 이웃과 친구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직접 부르시고 주님이 직정 직임을 맡기실 수도 있습니다. 한데 주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동역자로 삼듯 우리 역시 서로의 동역자로서 서로의 돕는 배필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또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독불장군이 아니라 합심의 원리 동역의 원리 돕는 배필의 원리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가 위대한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론과 훌과 같은 모세의 손을 들어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다윗이 위대한 성군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요나단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나바라든가, 누가, 실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동역자요 돕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혼자서가 아니라 곁에 좋은 동역자로서의 친구가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듯이 우리 역시 함께 믿음을 지켜나가고 서로가 서로를 세워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반드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예수가 아닌 좋은 선생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나의 구세주로서의 예수를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입술을 통해 고백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만남이 필요합니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는 우리가 결코 변화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올바로 만나고 예수님을 참으로 나의 구세주요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되면 나의 삶이 달라집니다. 보는 것이 달라지고 듣는 것이 달라지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나만 위하는 삶이요 내 배만 두드리는 삶이었을지라도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살아가는 목적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이제는 주를 위해서 하게 되고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다나엘처럼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주시는 은혜대로 순종하십시오. 그래서 하늘 영광의 중심에 우뚝 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지금 우리들을 위해 하늘이 열려져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직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는 이 열린 문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마25:14 이하에 보면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세 종에게 각각 1 달란트, 2 달란트, 5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 회계하는데 2 달란트와 5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수고하여 갑절을 주인 앞에 놓았는데, 1달란트 받은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작은 일이라고 불평불만만 하다가 1달란트를 주인 앞에 그대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때 주인은 열심히 수고하여 갑절을 남긴 종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자들아 그대들이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이제는 많은 것으로 그대들에게 맡기리라“ 하며 그 돈들을 다시 그들에게 주었고, 원래대로 1달란트를 그대로 자기고 온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자여! 그대가 작은 일도 감당하지 못했으니 내가 더 이상 너에게 맡길 일이 없겠구나“ 하며, 그 있는 돈을 빼앗아 유능하고 신실한 일꾼에게 주라고  명령하고, 그 게으르고 불신실한 종은 바깥 어두운 곳 즉 절망의 곳으로 내어 쫓았다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삶이나 신앙의 삶이 반드시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의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이 신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면 교회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개인생활에서 결코 성공을 할 수도 없고, 열매를 거둘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아무 쓸모없는 실직자로서 인생패배의 쓴잔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하고 속에 거짓이 없구나. 간사함이 없구나. 엉큼한 것이 없구나, 게으름이 없구나”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지 두려울 것이 없는 인생의 승리자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모두가 이와 같은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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