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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실 때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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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실 때 (왕상 17:8-16)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거하게 하시면서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까마귀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릿 시냇물도 마르게 되니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방 땅인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난한 과부를 통해서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사르밧에 가난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이 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녀에게도 엘리야를 공궤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시돈에 속한 사르밧 땅으로 가서 가난한 과부를 만났고 그녀에게 자신을 위하여 떡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사르밧 과부는 아들과 함께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죽음을 기다릴 생각으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나타나서 과부에게 떡을 요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14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이 생기고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가루로 엘리야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주었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그대로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여 오랫동안 그의 식구가 먹게 되었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황당한 사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놀라우면서 재미있는 사건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내가 약하지만 하나님을 환영할 때 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십니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3년 6개월의 기근 앞에 사르밧 과부는 약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여인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환영하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르밧 과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사르밧 과부에게만 엘리야를 보내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르밧 과부가 주님을 사모하고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주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을 육신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주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라실 때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육신적인 눈으로만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태도를 보시고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환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신 후에 본문에 나오는 과부를 언급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시돈 땅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르밧 과부는 주님을 환영하지 않는 나사렛 사람들과는 상대적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환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기근 앞에 약한 자였으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환영했기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셔서 과부의 모든 필요를 채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기근을 만나 병이 들 때도 있고, 경제적인 기근을 만나 물질이 막힐 때도 있습니다. 또 관계의 기근을 만나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기근은 누구나 당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기근을 만났고, 이삭도 야곱도 기근을 만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근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입니다. 사르밧 과부처럼 기근 중에도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환영하고 주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성경 롬 8:28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케몬스 윌슨이라는 미국의 한 남자가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남자들에게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다는 것은 인생의 위기이며 기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보통 남자들은 이럴 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해고 시킨 회사와 상사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케몬스 윌슨은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는 대신 해고 통지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해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여관 사업을 해라.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여관을 만들어 보아라.’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받은 그 감동에 순종해서 작지만 깨끗한 여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차츰 여관의 수를 늘리기 시작해서 전 세계에 수많은 호텔을 가지고 있는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 호텔이 바로 홀리데이인 호텔입니다. 케몬스 윌슨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홀리데이인 호텔을 창업하여 재벌이 된 것입니다. 해고를 당해도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새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나 자신의 약함과 무능함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사모하고 환영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중심을 보시고,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십니다.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만나기 전에 엘리야를 공궤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서 머물라고 하시면서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르밧 과부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또 10-14절을 보면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말씀과 엘리야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마지막 남은 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집에 있는 가루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쓰고 또 써도 가루와 기름이 또 생기고 또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사르밧 과부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면 육신의 감정과 환경의 압박을 이겨야 합니다. 감정이나 환경에 매이지 않아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만날 때 사르밧 과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성문 앞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를 무엇 하려고 주었습니까? 12절에 보니 마지막 남은 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자기와 아들이 먹으려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남은 가루로 엘리야를 공궤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와 아들이 먹을 떡을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불순종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통해서 재차 임한 하나님의 명령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감정이나 환경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어려웠지만 믿음으로 순종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은 과부의 필요를 기근이 계속되는 내내 채워주셨습니다. 16절을 읽어 봅시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저는 엘리야의 입장을 생각해 봤습니다. 과거에 제가 헌금 설교로 인하여 고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을 보니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헌금 설교로 성도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여러 성도들이 힘을 다하여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데 제가 또 헌금설교를 해서 돈을 좋아하는 목사라는 인식을 갖게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 기도를 하는데 주님께서 본문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가루로 아들과 떡을 만들어 먹고 죽을 날을 기다리려고 하는 과부에게 떡을 만들어서 자신을 공궤하라고 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과부에게 마지막 가루를 달라고 하셔서 과부가 굶어죽었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되어 기근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도 마지막 남은 가루로 자신을 공궤하라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벼룩이 간을 빼먹지요. 하지만 말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말했던 것이 과부에게 복이 된 것입니다.
   
이 과부의 마지막 가루를 요구한 것은 그녀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씨앗을 심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씨앗의 열매로 풍성한 열매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설교는 돈 설교가 아니라 축복 설교인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부흥회 설교는 물질에 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설교를 듣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에 순종해서 옥합예물을 드리고 차량헌금 작정했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제 자동차 감동을 받은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국에서 나오는 자동차 중에서는 가장 비싼 에쿠스를 감동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에쿠스의 가격을 검색해 보고 놀랐습니다. 에쿠스 중에서 가장 싼 것이 6천9백만 원입니다. 사실 저는 그 집사님이 에쿠스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한 후부터 설교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 승용차 감동을 받으신 집사님은 작은 사업을 하지만 아직은 회사가 어렵습니다. 살고 있는 집도 아주 규모가 작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타고 있는 자동차는 아직 탈만합니다. 또 저나 우리교회 형편으로 에쿠스를 타는 것은 무리입니다. 제가 에쿠스를 타고 다닌다면 저를 비난할 사람들도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간 상당한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형편을 볼 때 그분의 감동을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조금 싼 자동차로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없던 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하신 것처럼 그 집사님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하여 감동을 주셨다면,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감동을 받은 대로 감동 받은 자동차를 받아야 하는가... 아마 엘리야도 저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할 때 12절에 나오는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이라는 말에 시선이 머물더군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지막 가루, 마지막 기름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이제 마지막이다’라고 말할 상황 까지 갈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시느냐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만 하면 마지막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필요도 채워주셨고 사르밧 과부의 필요도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님은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3. 축복의 마중물을 부을 때 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십니다.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엘리야를 공궤한 마지막 가루와 마지막 기름은 축복의 마중물이었습니다. 그것을 드림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림으로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수도가 나오기 전에는 펌프를 사용했습니다. 지하에 파이프를 박아놓고 지상에 펌프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그 펌프에 물 한 바가지를 붓고 펌프질을 하면 지하에 있던 물들이 파이프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펌프에 붓는 그 물 한 바가지가 마중물입니다. 마중물을 붓는 것은 물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 바가지의 물을 붓지만 그 한 바가지의 물 때문에 필요한 양만큼의 물을 얼마든지 공급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마중물의 원리를 심고 거두는 법칙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 갈 6:7에서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난 후에 성경 마 7:12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심어야 거두고 하나님을 대접해야 하나님에게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에서 특이한 것은 내가 심은 것에 비해서 항상 더 풍성하게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 12:24에 보면 한 알의 밀을 심는데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농사의 원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심고 거두는 법칙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흥미 있는 인도 설화의 한 토막입니다. 인도에 가난한 거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늘 왕궁 가까운 다리에서 구걸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소원은 그곳을 지나가는 임금이 한번이라도 자기에게 금 한 조각만 직선을 하면 평생 거지 생활을 안 해도 되지 않겠는가라는 기대였습니다. 당시의 왕은 마하라자라는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왕이 마차를 타고 다리를 지나가다가 마차를 정지하고 서더니 다리 위에 있는 거지에게 물었습니다. “넌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예, 저에게 황금 한 조각만 있으면 전 다시는 거지를 안 하겠습니다” 왕은 다시 그에게 “그러면 넌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거지는 “저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이 묻습니다. “넌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예, 저는 이 밥그릇 안에 밥알 몇 개 밖에 없습니다.” 왕이 거지에게 말합니다. “네가 가진 밥알을 나에게 줄 수 있느나?” 거지는 생각했습니다. ‘아니, 나를 적선해도 부족함이 없을 왕이 오히려 내 밥알을 달라니 정말 너무하는구만’ 거지는 할 수 없이 밥알 다섯 개를 골라 왕에게 드렸습니다. 왕은 밥알을 받더니 그냥 가버렸습니다. 거지는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 돌아가 보니 밥그릇에 황금알이 정확하게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후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드리는 것이었는데...” 그가 만일 왕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왕에게 얼마나 기쁘게 자기의 밥알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교인들의 희생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목사가 교회의 운영을 위하여 교인들의 헌금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인생을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방법인 것입니다.
   
록펠러는 평생 4,982개의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경제적인 능력을 주셔서 세계 제1의 부호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한번은 기자가 록펠러에게 물었습니다. “미국 내의 그 많은 사업가들이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재투자해도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당신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 많은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봉헌을 했는데도 어떻게 세계 제1의 부호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까?”
   
록펠러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제학을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씨는 반드시 풍성한 결실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위대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하나님의 경제학은 세상의 경제학과 다릅니다. 세상의 경제학은 사업에 재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제학은 하나님께 재투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대접을 받으면 자신도 상대를 대접해 줍니다. 실화입니다. 6.25 전쟁 직후 부산에는 고아들과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 집 저 집, 이 식당 저 식당에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밥을 얻어먹으려는 사람들이 들어오면 거의 모든 식당 주인들이 인상을 썼습니다. 그런데 한 식당의 주인은 거지 아이들이 오면 “얼마나 춥니? 어서 오너라.”하며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뜨끈뜨끈한 밥과 국물을 담아 주었습니다. 그러니 거지들이 계속해서 그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퍼주었습니다. 하루는 거지 왕초가 거지들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그 식당에 많이 가면 그 식당에 손님들이 오지 않는다. 거지가 많이 오는 식당을 누가 좋아하겠나? 그러니 삼가 조심해라. 가능하면 그 식당에는 가지 말고 어쩔 수 없을 때만 가도록 해라.” 그 다음 날부터 그 식당에 거지들이 뜸해졌습니다. 식당 주인이 ‘내가 그들을 섭섭하게 대했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꼬마 거지가 왔습니다. “왜 요즘에는 우리 집에 오지 않지?”, “우리 왕초가 조심하라 했어요. 우리가 자꾸 오면 손님들이 싫어한다고 했어요.”, “괜찮아. 괜찮아. 배고프면 언제든지 우리 식당으로 와.” 그렇게 거지들이 드나들어도 그 식당은 장사가 잘 되어 식당도 좋게 꾸미고 큰 건물을 사서 옷 가게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겨울, 부산 시민들이 다 자고 있는 시간에 그 시장에 불이 났습니다. 그날 밤, 바람까지 거세게 불어 시장의 모든 건물이 사정없이 타들어갔습니다.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다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놀랍게도 그 식당만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모든 건물은 잿더미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거지들이 밤새도록 그 식당에 물을 퍼부어서 그 식당만 타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도 이렇게 대접을 받으면 돌려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대접하면 하나님은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분입니다.
   
김광선 목사님의 [성경적 경제부흥]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대구에 가면 서현교회라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그 교회가 지어질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교회 건물이었습니다. 그 교회에 지금은 작고 하셨습니다만 정규만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했습니다. 한번은 그분이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죽을 병 이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 목숨을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성전을 한 번 멋지게 짓고 싶습니다.” 그 후 정장로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이 회복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정장로님은 건강이 회복된 후에 목사님을 설득하고 교인들을 설득해서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정장로님은 그 당시에는 큰 부자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장로님은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쳐서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학개 2:9에 나오는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정장로님에게 하늘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 무렵 대구에서 이상한 병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병을 고칠 약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정장로님의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서 먹기만 하면 감쪽같이 그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문이 삽시간에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 한약방에는 날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자기의 순번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결과 정장로님은 큰돈을 벌게 되었고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멋진 예배당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했습니다.
  
저는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정장로님과 같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은 부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많은 사람들과 그 복을 나누는 성경적인 부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사르밧 과부가 받은 복을 가지고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 날’이 우리 뜻으로 보면 며칠간이지만 히브리어로는 ‘야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오랜 기간’을 말합니다. 또 식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집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르밧 과부와 아들과 엘리야만 먹은 것이 아니라 사르밧 과부의 집안이 다 먹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나눈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먹은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먹여 살린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와 축복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복을 나누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내가 비록 약하지만 하나님을 환영할 때 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나 환경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가 축복의 마중물을 부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공급을 풍성하게 받으시고 받은 은혜와 복을 나누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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