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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사람에게 넘치는 복 (롬 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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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 넘치는 복 (롬 10:1-13)

(롬10:1-13)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더 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이 구원받기만 한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도 좋다할 정도로 자기 동족을 사랑하여 구원받기를 소원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1절) 바울이 자기 동족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 받은 온갖 핍박들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후서11:23-28입니다.

(고후11:23-2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성전과 율법에 대해 철저했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구원받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율법준수에 철저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알고 율법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지식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야만 의롭게 되는 것이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오늘 본문 중,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율법을 다 지켜 행한 것으로 여겨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아니하면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되심으로 자신의 죄가 사함을 얻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간단히 말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義人)이 되어 구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롭게 되는 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 믿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열심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유대 관리 하나가 예수께 질문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8:19-20)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느니라.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대답합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느니라.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유대관리가 말한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는 ‘제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영생)은 곧 ‘구원’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느니라.”는 말씀하신 것은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리는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했지만 그것으로는 영생,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눅18:18-30) 가진 재산을 다 팔아 청산하라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성도들이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키며 살아왔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행위”를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율법을 지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순종치 아니하는 행위’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유대관리가 말한 자기 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즉 예수가 메시야(구세주)이신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참되고 바른 지식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알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영생(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를 알지 못하는 지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생(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다 아는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를 모르면 그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를 메시야(구세주)로 믿을 때 얻는 것입니다(본문4-6절).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를 인정받을 수 없고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이 안타까워 사도 바울은 온갖 핍박을 받아가면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전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혹독한 박해를 받아가면서 동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유를 깨닫고 구원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2. 그러면 바울이 그토록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올라가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상에 내려오시도록 해야 하는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믿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려오시게 하는 것도 불가한 일입니다. 

그렇게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어렵고 힘든 것인가? 사실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 구세주로 믿지도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역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말씀’이신 사실, 그리고 그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거나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내려오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고, 지금은 약속하신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이 세상에 임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 신명기 30:11-14을 인용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30:11-14)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교회가 전하는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주라 시인하며,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해야 합니다. 당시 주(主,큐리오스,kurios) 라는 말은 로마 황제나 신에 대한 존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라 말하는 것은 예수를 황제처럼 모시며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자기 삶에 가장 높은 자리를 예수께 드리는 것이고, 절대 복종과 경건한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유일한 분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심히 네게 가깝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입술로 주라 시인(是認)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십니다. 다 지킬 수도 없는 구약의 율법을 다 지켜야 할만큼 구원받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제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입술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영접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구원받는 것이 아주 쉬운 것이 되었습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3.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만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시인해야만 합니다.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 12:8)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한 고백은 곧 재산, 명예, 지위, 자유, 생명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모든 것을 몰수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보고 궁금해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운명으로 돌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명으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모습, 어떤 환경 가운데 태어나 살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했습니다.(마10:29) 하물며 그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는 한 인간의 소경된 사건에 어찌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가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해서 팔자소관으로 돌리지 마시고 그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같은 영적인 비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지내왔던 이 사람이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왔겠습니까? 또는 부모를 얼마나 원망하며 지내왔겠습니까? 소경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하루하루 구걸하여 연명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암담했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려 하심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불운하게 태어난 것에 대한 슬픔과 고통, 그리고 부모에 대한 원망 등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한 마디에 메말랐던 눈물이 흐르고 닫혔던 마음이 열리며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위로와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났을지라도 이제 존재 의미를 찾고,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어 예수께서는 “(요9:5-7)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명령하신대로 실로암에 가서 씻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평생 어두웠던 삶이 훤하게 밝아졌습니다. 

이 엄청난 기적에 놀란 “(요9:8-11)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이에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여러 말 할 것 없다. 바로 내가 너희가 말하는 그 사람이다.’며 자신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며 사실 그대로 자신의 예수 체험을 간증했습니다. 

이 소경되었던 사람은 놀랍게도 눈이 보이지 않았던 상황에서도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위로와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눈을 뜬 소경은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시기 원하십니까? 예수의 말씀이 그의 인격입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순종하실 때 그의 인격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후에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기적을 보게 된 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함께 기적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일이 안식일에 발생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검증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며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그대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가기 시작합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왜곡시켜 만든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어떤 병환자일지라도 치료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회당에 가다 담장이 무너져 다리가 부러졌다면 부러진 부분을 소독하는 것은 괜찮으나 부러진 다리를 바로 잡아 깁스를 하고 항생제를 먹이는 등 치료행위를 하면 안식일을 범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소경을 완치시켜 주었다는 것은 명백히 안식일을 범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권세 있는 예수의 가르침에 눌려 주가가 하락하여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바리새인들인지라, 예수를 잡아 죽일 호기를 잡았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한 예수를 일단 율법을 범한 죄인으로 결론을 내리고,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습니다. 

“(요9:17) 안식일에 네 눈을 뜨게 한 예수를 너는 어떤 사람으로 여기느냐?” 예수에 대한 신앙여부에 따라 그 사람도 처벌하겠다는 뜻입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자칫 안식일을 범한 예수와 공범으로 몰릴 수도 있었지만 그 사람은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이십니다.”며 예수를 증거합니다. 분명 이러한 그의 증거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각오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어떠한 불이익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를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위협적인 심문에도 막무가내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사람을 일단 제쳐두고 이제 그 부모를 소환해서 심문합니다. “이 사람이 네 아들이냐?”, “정말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났느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 이에 그 부모는 “(요9:21-22)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당사자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사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 처분받는다는 사실이 무서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출교는 문둥병자처럼 유대 공동체에서 영구히 격리되는 일종의 저주와 같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출교 처분받은 사람과는 그 누구도 상종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상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교를 당하게 되면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가족 중 하나만 출교당해도 그 집안은 몽땅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이 유대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경되었던 사람이 예수를 선지자로 고백했다는 것은 실로 목숨을 건 고백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마다 출교키로 결의한 마당에 예수를 시인한다는 것은 고통과 고난,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이 고백은 로마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이 목숨 걸고 드렸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황제를 ‘주’로 숭배하던 로마 당시에 황제숭배를 거절하고 오직 예수만을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재산 몰수, 사회적 신분 지위 박탈 등은 물론 사자굴, 십자가 처형, 화형 등에 처해져도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기 기독교인들의 고백과 같은 무게를 가지고 누구 앞에서도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는 생활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누구 앞에서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 생명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믿음이 살아있는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오직 예수 한 분만을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소경되었던 자는 출교를 각오하고 출교처분권을 가진 바리새인들 앞에서 당당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고 증거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소경을 전향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서 거듭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요9:27-33) 아니 내가 그렇게 여러 번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여기 “당신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시렵니까?”라는 말에 모멸감을 느낀 바리새인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며 반박합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이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며 반문합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은 자신을 눈 뜨게 해준 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라고까지 증거합니다. 출교당할 위기 상황에서도, 삶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있는 그의 살아있는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불이익과 처분을 받을지라도 오직 예수와 생명을 같이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진리가 되시는 예수 편에 서서 예수를 고백하고 증거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4. 그러한 믿음이 생명력을 지니고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소경되었던 사람의 성장해가는 믿음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고 제일 먼저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요9:9) 그 다음(요9:17)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자랐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하시나이까?”(요9:27)는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오신 분”(요9:33)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증거할수록 신앙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갈수록 자신의 신앙을 확고하게 증거하는 사람에게 바리새인들은 견디다 못해 “(요9:34)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면서 결국 “쫓아내고” 맙니다. 쫓아냈다는 것은 출교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즉결처분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환경이나 분위기에 따라 신앙 고백이 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자리, 어느 환경에서도 한 색깔, 한 목소리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며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기독교인임을 공개적으로 증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공개적 증거로 자신에게 엄청난 불이익이나 핍박이 따른다 해도 기꺼이 감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어야 살아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므로 가족들이나 친척들,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서 고립되고 소외될 것을 두려워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믿으려는 사람들은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증거하므로 더욱 더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소경되었던 사람은 출교당함으로 가정에서 쫓겨났고, 사회에서 고립되었고 유대교에서는 배교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유대인 사회에서 친구들이나 친척들이나 이웃들과 함께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소경되었을 때보다 더 못한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요한복음9:35-36입니다. 

(요9:35-36)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멸시 천대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소경이 눈을 뜨고 예수가 누구이신가도 알았지만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인해 이렇게 엄청난 고통과 멸시를 받고 가족들과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음에도 나를 믿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며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신의 삶과 생명을 주님께 드린다는 고백과 경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증거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소경되었던 사람처럼 예수 믿음 때문에 소외되고 손가락질 받고 손해보는 상황, 삶에 위기 상황에 처할지라도 주저없이 날마다 예수 믿음을 증거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데 편한 길, 쉬운 길, 남한테 싫은 소리 하나 듣지 않는 길을 택하는 것은 죽은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자신의 신앙을 증거함으로 사서라도 고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오는 그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사람, 어떤 신변의 위험과 상황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진리 편에 서는 사람이 살아있는 믿음으로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입술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영접한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당할지라도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이 영광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냄새가 나지 않고 세상 냄새가 나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일찍이 돈에 눈을 떠 부자가 되고, 권세에 눈을 떠 출세했을지라도 예수를 보지 못하면 영적 소경이 되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눈을 뜨고 예수를 알아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여 주님으로 모시고 살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고백하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그리스도의 향기’로, ‘생명에 이르는 냄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2:14-16을 보겠습니다. 

(고후2:14-16)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 냄새, 향기를 나타내지 못하고 사셨다면, 이제부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5.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으십니다. 모든 사람의 삶의 주님이 되십니다. 오늘 본문 11-13절을 보겠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신앙고백하며 증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부요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증거하는 향기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8:9, 에베소서3:8-9을 보겠습니다.(시50:10-12,학2:8,요10:10,엡2:7)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엡3:8-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인생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향기로운 삶으로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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