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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지기헌신예배] 믿음의 분량대로 헌신합시다 (롬 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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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분량대로 헌신합시다 (롬 12:3-13)

어느 목사님의 인터넷 방송설교를 들었는데 그 설교의 요점 중에 하나는 성도들의 믿음의 수준이 다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어온 분이 있고 최근에 교회를 나오기 시작한 분이 있습니다.   오래 믿고도 연약한 믿음이 있고 믿은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수십년 신앙생활을 한 분들보다 훨씬 좋은 믿음이 있습니다.  아직 어린 믿음이 있는가 하면 목사들보다 훨씬 영성이 깊고 성숙한 믿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이 강단에서 설교하면 목사의 설교보다 훨씬 더 은혜가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주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주일마다 모든 레벨의 교우들을 한 자리에 놓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내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에 부담이 되어 실족하고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이미 알고있는 너무 당연한 말씀을 들으니 밋밋하여 좀 더 강력하고 도전적인 메시지를 들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성도들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른데 어떤 성도들에게 기준을 맞추어 설교해야 할까요?   설교자들의 고민입니다.  그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설교를 들을 때 자신의 신앙 수준에 맞게 받으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을 내것으로 받기에 거북하고 힘들면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랍니다.  참 쉽지 않습니까?  얼마나 편리한 방법입니까?  듣기 싫으면 귀를 막아버리거나 아니면 듣고도 못들은 척 흘려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한쪽 귀로 흘려보내되 예배당을 나설 때 정답은 알고 가랍니다.   강단은 모든 성도의 귀에 듣기 좋고 위로가 되는 말씀만 전하는 자리가 아니라 정답을 전달하는 자리입니다.  같은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분은 그 말씀에 위로와 도전이 되지만 어떤 분에게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메시지가 됩니다.   설교하는 목사 자신도 그 말씀대로 다 실천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치며 정답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사명이고 책임입니다.  

그 목사님 설교 중에 또 하나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영성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귀찮음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들은 말씀이 내 연약한 믿음을 자극하여 보다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촉구합니다.  내 무뎌진 양심을 건드려 회개하게 하며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 앞에 벌거벗은 심정으로 서게 한다면 그 말씀이 나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영성이 됩니다.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상황이 힘들지만 견디고 순종할 때 그것이 나의 영성이 되고 어려운 과정을 넘어설 때 나의 영성이 한층 고양됩니다.   그렇다면 그 부담스런 말씀이 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성도로 만들어줍니다.  

반대로, 오늘 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내 형편에 어울리지 않고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의 의도는 이해하겠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 생각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딪히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을 들을 때 심기가 불편하여 자리를 뜨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예 귀를 닫아버리고 딴 생각에 몰입합니다.   지루한 저 설교가 언제쯤 끝나려나 하고 시계를 몇 번씩 쳐다봅니다.   그날 그분에게 들려진 말씀은 귀찮음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바울이 몸의 가시가 떠나게 해달라고 세 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울을 심하게 괴롭히는 어떤 질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바울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로도 충분한데 무엇을 또 구하느냐?  나의 능력은 너의 연약함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응답입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마음의 상처를 입고 괴로웠을텐데 바울은 이 응답에 순복합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비한 계시들 때문에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두신 안전장치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차고 나가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9, 10)   바울을 괴롭히는 그 가시가 단지 귀찮음으로 끝나지 않았고 도리어 주님을 더 강하게 의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영성입니다.   

어떤 분들은 건강이나 재정문제, 진로의 문제가 앞에 가로막혔을 때 연약한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고 분노합니다.  내가 이만큼 하면 하나님도 이정도는 보상해주셔야 하지 않느냐 투정하고 돌아섭니다.  상처받은 마음에 기도를 중단하고 예배를 소홀히 여기며 끝내는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합니다.   고난의 과정이 영성으로 승화된 것이 아니라 감당하기 불편한  귀찮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볼까요?  어떤 분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며 연약한 내 안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도록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거두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회개와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나를 괴롭히고 곤란하게 하는 어떤 약점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시는 나로 하여금 자고하지 않도록 설치하신 하나님의 안전장치로 여깁니다.   나의 약함 때문에 내가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고 더 가까운 교제를 나누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려움을 통해 성장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모두 바울이나 욥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바울의 영성을 강요하는 것은 젖을 먹는 아기에게 엄마가 먹는 거친 음식을 주며 왜 먹지 못하느냐 조바심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막 숫자를 읽기 시작한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고3 대입 수험생이 푸는 수학문제를 주고 풀어내라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청지기들도 다양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리가 긴 황새와 짧은 다리 뱁새를 비유로 설명해봅니다.  (뱁새 :‘붉은머리오목눈이’는 13cm 크기로 참새보다 약간 작다)뱁새가 황새를 좇아가다 다리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열정적인 헌신자를 앞세우고 모두 다 따라오라 하면 초신자들이나 아직 연약한 믿음의 성도들은 숨이 가빠 따라가기 벅찹니다.  그래서 기준을 하향조정하여 가장 약한 초신자에게 맞추고 우리 교회는 이정도만 하자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항상 어린 유아들만 양육하다 맙니다.  한참 성장하고 더 발전할 수 있는 성숙한 일군들마저 타성에 젖어 주일예배 한 번 참석하는 것을 믿음생활의 전부로 여겨 그럭저럭 편안히 지내다 헌신의 기회를 잃고 맙니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는 평준화라는 말이 있는데 신앙의 평준화가 가능할까요?   우리나라 교육 평준화 정책이 가져온 문제점들을 우리가 잘 압니다.  한 교실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똑같은 수준의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해야 차별이 없는 평준화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에 따라 특별한 재주가 있거나 잘하는 분야가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모두 똑같이 음악과 미술과 체육까지 100점 맞아야 우등생이라 하면 이건 정말 미칠노릇입니다.   드물게는 10가지를 다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한 두개만 잘해도 세상 사는데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에 즐겁게 헌신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배려하며 함께 일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은사요 달란트입니다.   모든 제직들이 똑같이 기도를 유창하게 잘하고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섬기는 일과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살피고 위로하는 일을 모두 다 잘하지는 못합니다.  더 잘하는 분이 있고 아직 연약한 분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고 은사가 풍성한 사람이 ‘나는 많이 그리고 더 힘든 일을 하는데 왜 당신은 나만큼 하지 못하느냐’ 무안을 주는 것은 은사에 대한 이해부족입니다.   아직 연약한  청지기에게는 감당할만한 일을 나누고 그 사람이 더 자라면 또 다른 방식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도 일군을 양육하는 방법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가 받은 은사대로, 믿음의 분수대로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받은 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사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정답대로 따라올 힘이 부치거든 오늘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 됩니다.  힘겹다고 귀찮음으로 여기거나 나는 안된다고 자책하지 맙시다. 그러나 정답을 마음에 두고 노력해봅시다.  섬김과 나눔이 언제까지나 귀찮음이 아니라 언젠가는 나의 믿음을 한층 성숙하게 하는 영성이 되기 바랍니다.  

청지기 헌신주일에 본문을 통해 또 한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 하십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마지못해 사랑하고 체면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되 서로 먼저 하라 하십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면 부지런하고 열심으로 하며 소망 중에 즐거움으로 합니다.   그러고 보면 헌신의 원동력은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사랑으로 섬기면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믿음의 차이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온 경력과 연령의 차이를 서로 존중하는 법도 배웁니다.

제가 10년 전에 ‘은퇴노인들에 대한 목회적 돌봄’이라는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며 성경적인 노인공경과 돌봄이 무엇인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공부하며 배웠던 성경적인 노인 목회의 요점은 노인 공경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세드신 어른을 안방 또는 뒷방에 모셔두고 아무 일도 하지 마시고 무조건 편하게 쉬세요 하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노인들이 보람있는 활동을 하실 기회를 제공하여 삶의 의미를 가지도록 배려하는 것이 옳습니다.   

교회에서도 70세면 공직 은퇴라 하여 제직회에도 대표기도에도 열외를 시키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일군이 필요하고 또 건강한 분들은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 장로님 연세가 금년에 80인데 아직 주일예배 안내위원도 하시라고 부탁드립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해야 젊은이들을 만나고 젊은이들이 어른의 수고를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60세도 안된 분들은 어른이라 생각지 맙시다.   자신을 벌써부터 노인층에 올려둘 필요가 있습니까?   연세가 드시더라도 젊은 마음까지 퇴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빨리 노인되려고 애쓰지 맙시다.   옛날에는 60이면 살만큼 살았다 하여 환갑 잔치를 크게 벌였지만 100세를 바라보는 지금은 70도 청춘이라 합니다.  해외 이민교회 특히 우리교회처럼 젊은 세대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노인분들이 드물지만 한국교회는 은퇴하신 어른들로 충만합니다.  

그러니 아직 60세도 안된 분들은 너무 성급하게 노인대접 받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활발하게 앞장서고 어른들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둥처럼 일할 4,50대 황금기의 연령들이 손 놓고 팔장끼고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고 은사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불충한 청지기입니다.   이 다음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 계산하자 하시면 ‘저는 일찌감치 일할만큼 하고 조기은퇴하여 나머지 인생은 골프나 치며 잘 쉬다 왔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본전에서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실겁니까?

세상에서는 은퇴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은퇴가 없습니다.   우리끼리는 누가 더 나이가 많으냐 따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자녀들입니다.   나는 옛날에 고생 할만큼 했으니 이제는 젊은이들이 맡아라 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 지나온 날 교회와 사회를 위해 섬겼던 수고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합시다.  일선에서 물러나 손 놓고 방관하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거기다 궁시렁 궁시렁 잔소리가 늘어나고 젊은이들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면 그나마 가졌던 공경심도 슬금슬금 떠나갑니다.  저 어른 보면 내 심장이 두근거리고 나에게 또 무슨 꾸중하실까 겁난다 하는 말 듣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외로운 뒷방 노인이 됩니다.  

아직 힘이 있으면 소매 걷어부치고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일하는 분들을 응원해야 합니다.  일해야 할 청지기가 힘써 일하지 않고 손 놓고 있으면 남는 것은 시간 뿐입니다.  그래서 앉으면 맨날 공상소설 쓰거나 옛날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나도 소시적에는 고생 좀 했어.   지금 너희는 편한 시절 사는거야 하며 자꾸 옛날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자기 발전은 거기서 끝입니다.   내가 고생했으니 너도 고생 좀 해야 한다는 발상은 인정머리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고약한 시어머니 노릇입니다.  그런 고약한 시어머니 소리 들으며 남은 인생을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연세가 드시더라도 젊은 마음을 가지고 젊은 세대와 교류하고 어른으로서 가진 경륜과 지혜와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어른이 될 수록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꾸지람보다는 칭찬을 나누고, 불평과 볼멘 소리보다는 따스한 격려와 위로의 말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섬기는 일군들에게 ‘고맙다. 수고가 많다. 당신의 섬김때문에 우리가 즐겁다.  나는 고생했지만 여러분은 더 좋은 환경에서 즐겁게 봉사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  내가 힘이 달려 옛날처럼 마음껏 돕지는 못하지만 여러분이 기쁨으로 일하도록 마음으로 응원하고  기도할게’  이런 격려가 일군들에게 활력소가 됩니다.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을 나누어야 멋지고 지혜로운 어른입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어렵다 생각될수록 더 노력합시다.  안된다고 그냥 내 편리한 방식대로 살아야지 하면 고집쟁이 노인 소리 듣다 좋은 기회 다 지나가고 맙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봅시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베드로, 바울과 요한 같은 분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어진 건강과 기회를 선용하여 선한 청지기로 살았던 분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을 수 없지만 각자에게 주신 기회와 달란트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처럼 땅에 묻어두지 말고 힘써 일하시기 바랍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권합니다. 어른들을 공경하여 섬김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어른들은 연세가 드실수록 존재감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집니다.   나 아직 죽지않고 살았다 보여주려고 헛기침도 하고 듣기싫은 꾸지람도 합니다.  어른들은 나보다 먼저 어려운 시절을 살며 수고하였고 자신들을  희생하여 오늘의 기반을 닦은 분들입니다.  가정에서도 어른들을 잘 섬겨야 하지만 교회에서도 연세드신 어른들을 잘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 사회가 점점 메말라 갑니다.  세상은 물질적인 생산성에 가치를 둡니다.  생산성이 없어지면 기계든 사람이든 가차없이 퇴출시킵니다.  생산력이 없어진 은퇴노인들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도 느껴집니다.  어른공경에 대한 좋은 전통을 가진 우리 나라가 갈수록  그 미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 자녀들 세대에는 서구사회보다 더 삭막한 세대간 갈등이 있을 것이 뻔합니다.

요즘은 지하철이 아니라 지옥철 또는 지욕철이라 부른다지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화가 잔뜩나서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습니다.   노인들은 젊은이들의 무례함과 건방진 태도에 분노하고, 젊은이들과 아이들은 어른들의 막무가내식 호통과 어거지 쓰는 이기적 행동에 화가나서 악을 쓰며 대듭니다.   어른들도 어린 세대들도 이성을 잃었습니다.   어른들은 어른의 기품과 너그러움을 잃었고 어린 세대는 어른에 대한 섬김과 질서에 대한 기본을 잃었습니다.  세상이 점점 흉악해집니다.  

학교가 더 이상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책임질만한 기관이 아닙니다.  그럼 교회라도 깨어있어야 하는데 교회는 교회대로 찬 바람이 쌩쌩 붑니다.   결국 가정이 가장 먼저 책임을 져야하는데 자녀들이 가정에서 어른들에게 보고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너무 바빠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삶과 가르침을 나눌 기회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가르쳐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기 자식에게는 모든 것이 너그럽습니다.  

가정에서 어른에 대한 공경과 예절을 배우지 못했는데 어찌 학교와 교회에서 예절을 아는 아이들이 될 수 있을까요?   어른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를 쏟아내는 아들 딸을 보며 우리 새끼가 어쩜 저렇게 똑뿌러지게 말을 잘하는가 감탄하기만 합니다. 철이 없는 부모들이지요.   자식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고 너그러운 부모들의 무책임한 관용과 빗나간 사랑이 우리 아이들을 버릇없고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어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니라고 극구 변명하고 부정하겠지만 그건 부모의 눈에 그렇게 보일 뿐이지 옆집 사람이 보는 눈은 부모와 절대로 다릅니다.  사고를 친 자녀의 부모에게 물어보면 열이면 열 대부분 부모들은 내 자식이 절대로 그럴리 없다고 장담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부모의 본능적 믿음입니다.  다른 집 아이들의 버릇없는 행동에 분개하고 그 부모를 비난하면서 내 자식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하는 부모의 편견과 애정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하셨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른은 어른으로서 아이들은 아이들로서 자기 위치와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초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아봅시다.   하나님의 청지기는 교회에서만 헌신하는 일군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2005년 통계청 자료입니다만, 서울 인구의 ¼이 개신교 신자들이랍니다.  서울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주께 받은 사랑을 제대로 나누며 살면 서울이 지금보다 훨씬 정의롭고 정직하며 희망적인 도시가 되고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는 힘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삭막하고 거친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깁시다.  

오늘 청지기 헌신주일에 두 가지 큰 주제를 말씀드렸습니다.   각자 받은 믿음의 분량대로 헌신합시다.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주어진 직분과 자리에서 섬김을 다합시다.  서로 다름은 믿음의 분량과 은사만 아니라 먼저 되고 나중 됨의 다름도 있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이 있고 젊은이가 있으며 오래 믿은 분이 있고 나중에 믿은 분도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면 헌신의 즐거움이 배나 더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는 만큼 나의 순종과 헌신이 나옵니다.   받은 것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원래 ‘하라, 하지말라’는 지시와 명령을 따르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본성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헌신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서 하고 스스로 원해서 일할 때 보람을 얻고 힘든 줄 모릅니다.  자원하는 마음은 내 속에 사랑이 있을 때 시작됩니다.  그 사랑을 느끼며 살고 계십니까?  

청지기 여러분, 헌신은 나를 드리는 일입니다.  몇 주 전에 로마서 12:1,2절을 본문으로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완전히 드린 것처럼 우리도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립시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이며 주의 일을 맡은 청지기의 헌신자세입니다.  이 마음만 확실히 가지면 그 다음은 주님이 주신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청지기는 내 것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받아 섬기는 일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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