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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하나님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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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 (창 28:10-22)

팔십 년대 초 KBS 주선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할 때 저는 한국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뉴스 클립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때의 감격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직 그 당시의 감격적인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게 아직도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이 남매가 상봉하는 장면입니다. 여동생이 네 살이었을 때 오빠와 헤어졌습니다. 몇 십 년 만에 상봉한 것인데 그 순간 여동생이 울부짖으면서 ‘오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그 장면이 인상에 남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성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야곱이 죽은 줄로 알았던 자기 아들 요셉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그 자리에서 죽었느냐. 그건 아니고 수십 년 더 살았습니다. 오빠와 상봉한 그 여동생도 아마 지금까지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결과 · 성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시대에 주목해야 될 인간의 매우 중요한 심리입니다. 내가 지금 죽지 않고 앞으로 계속 살고 앞으로 할 일이 많이 남았고 내 갈 길이 아직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다, 이것으로 족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인생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한 미래, 성공적인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오기 이전에 미리 그 기쁨을 맛보게 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을 보는 것처럼 또 프로젝트의 착수금을 미리 받는 것처럼 미리 미래를 맛볼 수 있어서 그때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금 만족할 수 있는 그것입니다. 그 심리를 표현하는 말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리 맛보는 즐거움이 나중에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의 즐거움보다 더 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과 바닷가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버님과 방파제에서 파는 해삼을 사먹은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너무 맛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더 먹고 싶은데 아버님이 그만 먹고 호텔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저는‘ 아, 저녁식사도 이 해삼처럼 맛있겠지.’라고 생각하고 호텔로 식당에서 생선을 주문해서 먹는데 방파제에서 먹은 것처럼 맛있지가 않아요. 그래서 ‘아까 좀 더 먹게 내버려 두지.’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무엇을 기대하는 즐거움은 그것을 얻었을 때의 즐거움보다 더 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시작은 있는데 끝은 없습니다. 창세기는 있지만 세상의 끝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천국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교회를 세우시고 시작하셨지만 그러나 교회는 아직 최후승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직 세상 끝까지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시작했지만 아직 결론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엘든 레드는 우리는 ‘이미’ 와 ‘아직’ 사이에 끼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부분이 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작했지만 끝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 재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심을 믿지만 세상에는 예수님을 높이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최후 승리를 거둘 것을 믿지만 그러나 교회는 아직 불완전하고 연약하고 어립니다. 그것뿐만이 아니고 우리 개인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장래가 잘 될 것을 믿지만 아직 그것을 다 보지 못하고 그것을 향하여 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여행 중에 있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아직 나아가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잘 될 줄 믿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 될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장차 이룰 모든 일을 우리가 사는 동안에 다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든 교회든 우리 개인의 삶이든 우리의 자녀든 국가의 미래든 결국 그 끝을 우리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게 잘 될 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얘기냐. 약속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약속. 주님은 약속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약속을 믿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믿음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믿음도 예수님의 약속에 의거한 것입니다. 약속에서 믿음이 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맛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리 이후에 일어날 것을 맛봄으로써 이후의 일을 확신하고 미리 그것을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맛을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맛을 보는 것은 포식하는 것과 다릅니다. 음식을 만들 때 맛을 보지 않습니까. 맛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간이 적절하냐, 맛이 있느냐, 그때는 포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맛을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후에 먹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후에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기 전에 미리 맛을 봄으로써 이것이 준비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taste and see-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충족하게 경험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천국에 가면 충족하게 느끼면서 살 것입니다마는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본 적이 없지요. 천국에 가 봤다면 이미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을 어떻게 믿습니까. 천국을 맛봄으로써, 천국의 기쁨을 맛봄으로써. 초막이든 궁궐이든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땅에서 천국의 평강 · 천국의 기쁨 · 천국의 소망을 맛봄으로써 비록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에서 허락하신 것은 맛을 보는 것입니다. 성찬식도 장차 천국 잔치의 맛을 보게 하기 위한 것이고 또 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장차 천국의 삶의 맛을 보게 하시는 것이고 성령의 은사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맛을 보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우리 삶에 완벽하게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산다면 죽는 사람도 없고 병든 사람도 없고 이 세상에 아무 탈이 없겠죠. 그러나 그건 아니에요.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믿더라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맛보고 하나님의 지혜를 맛보고 그것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다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생각은 탐욕이에요. 교만이에요. 인간의 미련함입니다. 이산가족을 찾을 때 그동안 많은 세월동안 괴로움과 아픔과 외로움이 있었지만 이산가족을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 그 사람의 심리를 주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동안 헤어져 있는 동안 내가 겪은 아픔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요구했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얼만큼 보상해야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그 괴로움의 값을 지불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하지만 잃어버렸던 가족과 상봉하는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처럼 우리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아직 들어가기 전에도 천국을 맛봄으로써 천국에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우리의 이 많은 죄를 주님이 사해주셨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겠습니까. 청구서, 영수증을 우리에게 주셔서 ‘자 봐라. 네 모든 죄 이렇게 다 내가 사했다.’라고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사함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시고 또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느끼게 하심으로써 비록 영수증이 내 앞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내 죄를 사해주셨고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맛을 봄으로 그 이후의 성취를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도대체 얼마만큼의 사랑을 받아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님은 아무리 사랑하시고 쓰시는 사람이라도 스포일(spoil) 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자식을 징계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든 다윗이든 바울이든 그리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 하나님이 다 사랑하셨지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생을 쉽게 산 사람이 없고 어느 누구도 귀한 외아들처럼 스포일(spoil) 시킨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어요. 쓰셨어요. 그럼에도 그들에게 지름길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쉬운 삶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고난으로부터 면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고 우리가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받은 아픔이든 실망이든 상처 이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일일이 다 치유해 주시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에 내가 섭섭했던 것, 상처받았던 것, 그거 다 주님이 일일이 갚아주시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에요.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일일이 요구한다면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무슨 상급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이상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누가 밉지 않고 또 마음이 괴롭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았기 때문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동안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주님이 일일이 다 갚아주어야만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창을 찌른 사람, 손과 발에 못 박은 사람,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운 사람, 모욕한 사람, 배반한 사람, 주님이 다 그들 원수 갚기를 요구하시지 않으셨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상처에서 치유를 받으셨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들 쫓아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치유와 은혜가 충분하기 때문에 비록 그것을 일일이 다 되돌아가서 이 값을 요구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맛보는 것으로 족하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우리가 다 좋아하는 성경구절이지요. 야곱이 하란으로 가던 도중에 돌을 베개로 베고 자다가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야곱이 이전에도 들어보지 못하고 이후에도 들어보지 못한 정말 풍성한 축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축복하실 줄 그는 몰랐어요. 돌을 베개로 하고 잘 때까지 몰랐어요.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지만 과연 하나님이 나를 얼마만큼 사랑하시고 복을 주실지 몰랐어요. 

여러분도 아마 모르실거에요. 우리 모두가 잘 몰라요. 하나님은 인색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완고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요.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후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충분한 기회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충분한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해 드려야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과연 어떤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실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급함을 버려야 돼요. 우리의 참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함을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무엇을 하기 전에 직성이 풀리지 않는 이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 때에 그동안 우리가 인색하고 짠 분이라고 생각했던 하나님 관이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꿈에서 깨어나서 그 장소를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벧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꿈꾸기 전과 깨어난 후의 야곱의 삶에 변화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혼자이지요, 여전히 빈털터리지요, 여전히 나그네입니다.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달라진 것은 야곱 자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고 빈털터리지만 비굴하지 않고 나그네이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그는 미래를 맛보았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객관적인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이 변했어요. 야곱의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우리의 입장이 야곱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도 나그네요,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미래를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난 아직 맛보지 못했어요.’ 그런 분들은 돌을 베개로 주무시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돌을 베개로, 고난을 말합니다. 잘 때도 쉬지 못한다는 얘기에요. 돌을 베개로 하고 자는 경험을 해봐야, 아무도 내가 의지할 사람이 없고 홀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해봐야 그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다리를 놓으시고 거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벧엘의 경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이 계셨어요.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해볼 때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알고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돌을 베고 자는 곳이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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