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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가? (요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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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가?  (요 3:1-15) 
 

1. 새해,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흔히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해가 바뀌었으니 무엇인가 변한 것 같은 느낌에 젖어 마치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생각을 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새 옷을 입고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고 느끼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날이 바뀌고 해가 바뀐다고 해도 저절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새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자신을 보면서, 또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보면 새해라는 것이 도리어 부담이 됩니다.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은 새날과 새해를 욕되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을 찾아서 변화를 시도합니다. 새 옷을 입거나, 새 친구를 사귀거나, 새 차를 구입하거나, 새 집을 사거나, 그것도 안 되면 도배장판을 새롭게 하거나 집안을 새롭게 꾸며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뭐든 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잠시 동안은 뭔가 변화된 것 같은 느낌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 시들해 집니다.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죠. 이렇게 이런 저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답답해하고 실망합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진정한 새로움과 참된 변화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중심이 변해야 합니다. 즉 겉만 변하는 것은 참된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죠. 중심, 마음, 인격이 변해야 진정한 변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면 중심이 변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2012년 새해를 새롭게 살 수 있을까요? 그 답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2. 정말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은?

1) 새롭게 됨이 필요한 사람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행적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도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즉 평범한 人間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표적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2). 이러한 그의 판단은 논리적 인식에서 온 것입니다. 즉 “열매를 보니 나무를 알겠다”는 式의 논리이지요. 이러한 니고데모의 인식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았으나, 그 신기하고 놀라운 것을 보고서도 예수님께 나와 그것이 의미하는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저 신기한 기적 자체에만 관심을 두었고, 또 ‘어떻게 하면 그 혜택을 좀 받아볼까’ 하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표적의 외적인 면보다 그것이 가진 속뜻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 무명의 한 길릴리 청년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찾은 니고데모는 사실 보다 궁극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 역시 당장 풀고 싶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가지고 온 問題는 무엇이었을까요? 

니고데모는 굉장히 열심 있는 종교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배웠고 또 계속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산헤드린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70여 명밖에 되지 않았던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이라는 신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주 특별한 신분으로서 유대 사회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학식과 경험을 두루 갖춘 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스승, 랍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에게는 남모르는 고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즉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인간적으로 볼 때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지만, 그에게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의 문제요, 진정한 구원의 문제였습니다. 니고데모가 야밤에 혼자서 자신보다 젊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바로 이 영생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리 다른 모든 것을 가져도 만족할 수 없고 평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가지고 온 문제는 영생의 문제, 구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문제를 가지고 왔다는 것도 니고데모가 직접 밝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으로 우리는 그의 문제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가 가진 ‘하나님 나라 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남과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약 600년 동안의 이스라엘의 상태는 떠돌이요 노예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통치와 그 하수인인 헤롯 아래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민족이든 이런 상황에 처하면 극렬한 독립 운동가들이 출몰하고 이단 종파가 난무합니다. 그런데 당시 독립 운동가들과 이단 종파들은 아주 비슷한 ‘천국 관’과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메시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새 이스라엘을 세워 도덕적 종교적 수준이 높은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약간씩의 차이는 있었는데, 니고데모와 일부 학자들의 생각은 ‘메시야 왕국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지 않으며 미리 그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 준비는 다름 아니라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생활화시켜 종교적 도덕적 수준을 높이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니고데모와 그의 동료들은 구약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나름 메시야 왕국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특별한 청년 예수의 행적을 지켜본 후 그가 메시야라고 결론짓고 그 확인 차 예수님께 온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을 가진 니고데모를 향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3). 그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질문을 물으려고 왔지만, 그가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고민하고 논한다고 해도 니고데모와 그의 동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하던 나라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아니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니고데모는 그 나라를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알고 그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온 이스라엘과 자신이 믿었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거듭나야만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말씀은 이해도 잘 안 되었지만 굉장히 혼란스러운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 중에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은 더더욱 이해가 안 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5). 이 말씀이야말로 니고데모를 깨우치고, 그로 하여금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해주는 말씀이었으며, 옛 시대와 옛 체제와 옛 신학 아래에서 도무지 변하지 않았던 그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 “물”

오늘 본문 5절을 성경 원어에 맞게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누구나 물에서 나와서 영에게서 나지 않으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김홍전 목사). 즉 먼저 물에서 나오지 않으면 영에게서 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물에서 나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물”은 “물 세례”를 뜻하는데, 세례란 바울에 의하면 죽는 것, 곧 장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서 6장 3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즉 물에서 나온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쿨만이라는 신학자는 이 물을 피와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현재까지의 과학으로는 완전히 규명할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 생명의 신비 가운데서도 “생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피”입니다. 피는 사람의 몸속을 흐르면서 양분과 산소를 운반하여 몸의 기능을 유지하게 합니다. 피는 또 몸속에 들어오는 병균과도 싸우며, 몸 안에 있는 노폐물을 제거하는 일도 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피는 매 분마다 두 번 순환 합니다. 심장에서 뿜어낸 피가 동맥과 모세혈관과 정맥을 돌면서 몸의 모든 세포에 계속적으로 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며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므로 몸의 어느 부분도 이 활발하게 계속 되는 생명의 물줄기와 접촉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성인에게는 대략 6에서 8리터의 피가 있는데, 피 1미리 당 5백 5십만 개의 세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포의 수명은 110일에서 120일 정도입니다. 수명을 다한 세포들을 보충하기 위해 몸은 매초마다 2백만 개의 새로운 세포들을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피의 신비로움이 많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피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만 아시는 신비가 남아 있습니다. 아무튼 그 신기한 비밀이 무엇이든지 간에 피가 신체의 생명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피는 단순히 물리적인 생명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피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생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너희 피 곧 생명의 피(창9:5,역대상11:19,이사야 63:3참조)”라고 말했습니다. “혈통(요1:13,행17:26)” 이라는 말도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드문 경우이지만 피와 생명이 서로 바뀌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5절이 “물과 성령으로”라고 할 때 그 물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피요, 바로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R. 로우리’라는 분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찬송가 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여러분, 결론은 무엇입니까?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러면서 정작 바로 듣는 귀,바로 보는 눈조차도 없던 니고데모가 정말 변화되는 길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만이 니고데모를, 아니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소원하십니까? 새해를 맞아 뭔가 달라지기를 기도하십니까? 그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 십자가의 은혜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보혈의 능력이,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을 새롭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3) “성령”

두 번째로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할 때의 “성령”입니다. 조금 전에 성경 원어에 맞추어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을 다시 말씀드리면, “누구나 물에서 나와서 영에게서 나지 않으면”이었습니다. 즉 물, 곧 예수님의 피에서 나온 자에게 다음으로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 7절 “내게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에서 “거듭난다”는 말은 성경원어로 “위로부터” 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즉 믿음으로 새롭게 나는 것은 ‘위로부터 낳음을 당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래, 땅, 혹 인간에게서, 어머니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나는 것이 거듭남이요 중생이라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디도서 3장 5절에서는 “중생”이라는 말을 ‘다시 출생함’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물에서 나온 자는 성령에 의해서 낳아지는 또 다른 출생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 5절의 의미는 진정한 거듭남, 진정한 변화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역사로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圖式的으로, 順次的으로 설명하자면 우리의 옛사람과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없어지고, 그런 우리가 하늘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변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의 거듭남이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거듭남, 사람의 진정한 변화는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없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새사람으로 낳아주셔야만 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 힘, 내 방식, 세상의 방식, 그리고 인간적인 그 어떤 것에 의존해서 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말씀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죠. 그때부터 이상한 현상이 생깁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기쁨, 평안, 감격이 넘칩니다. 아무리 병들고 가난해도 그것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읽고 싶어집니다. 밤새도록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기도하면 할수록, 찬송을 부르면 부를수록 더 그 소원이 커지고 강해집니다.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소망과 꿈, 놀라운 능력, 신령한 생각이 우리 안에서 꿈틀거립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오늘 여러분들은 이 비밀을 알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니고데모가 못 알아 들은 것이 얼굴에 분명히 보이자 예수님은 한 마디 더 하셨습니다. 6절과 7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소는 소를 낳고, 돼지는 돼지를 낳을 뿐 사람을 낳을 수는 없습니다. 즉 種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육을 아무리 훈련시켜봐야 성령과 그 역사를 대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훈련, 노력, 열심이 여러분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죄성, 옛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새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새로워지기를 원한다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한다면 성령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에 침묵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성령을 근심시키지는 않았습니까? 성령이 침묵하는 성도에게는 그 어떤 변화와 새로움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성과 인격의 성장이 멈춘 채로 여기까지 왔다면 회개할 것은 회개하면서 성령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변화와 새로움의 감격 속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3. 새해를 새롭게!

말씀을 맺겠습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다들 새해를 새롭게 살아보려고 대단한 결심들을 하고 또 노력들을 합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과 같은‘mind control’과 같은 방법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군부대에 입소해서 극기 훈련을 받거나, 금식을 하고, 또 기도회나 부흥사경회 등 집회를 통해서 변화를 꿈꿉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효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더러운 그릇을 세제로 닦아내는 것과 같은 효과만 있을 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새롭게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주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버리지 못한 죄의 습관을 버리게 하고 옛사람을 버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활발하게 역사하실 때 비로소 여러분 안에,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진정한 변화와 새로움의 세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날마다 새로워지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성숙해져가는 올해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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