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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각교정 (출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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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교정 (출 3:1-12)            


장 폴 카우프만 이라는 프랑스 기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베이루트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습니다. 
1988년 5월 4일에 풀려나와서 한 기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기사 몇 토막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기자가 질문합니다.
“마침내 프랑스에서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셨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무엇입니까!”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파리의 모든 전화번호 앞에 붙는 4라는 숫자, 그 4라는 숫자 때문에 내가 전화를 다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장 폴 카우프만은 숫자 하나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갇혀있는 동안 무슨 책을 읽었습니까?”
“세 권의 책이 무척 소중했습니다. ‘성경’, 사르트르의 ‘자유에의 길’ 그리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였지요.”

기자는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인질생활을 겪고 나서 달라진 태도는 없습니까?”
“그렇죠. 실제로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내겐 모든 것이 달라졌지요. 나는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나뭇잎의 떨림을 들을 수 있으며, 두 줄로 늘어선 가로수 사이에서 아른거리는 새벽을 볼 수 있습니다.” 

파리에도 빗물은 있었고, 나뭇잎은 있었고, 가로수 사이에 새벽은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빗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나뭇잎의 떨림을 들을 수 있으며, 가로수 사이에서 아른거리는 새벽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각이 교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장 폴 카우프만! 
그가 살고 있는 파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각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일상성에 불과한 모든 것이 그에게는 감격으로, 떨림으로, 놀라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각이 교정되어 삶을 감격으로, 떨림으로, 놀라움으로, 신비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젖히고 싱그러운 아침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면서 살아있음을 감격해하는 것! 
직장에서 돌아올 때 ‘아빠!’ 하고 달려오는 자녀들을 가슴에 꼭 껴안으면서 가정의 신비를 뼛속 깊이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대상)을 바로 보라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바로 보라는 눈입니다. 
이 바라봄이 달라져야만 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불행해질 수도 있고, 행복해 질수도 잇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원망할 수도 있고,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짜증으로 얼굴을 찌푸릴 수도 있고, 감격으로 가슴을 부풀릴 수도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시각이 교정된 사람만 들어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시각이 교정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됩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시각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까? 

1.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본문에서는 상황을 ‘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 당시 모세는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품꾼에 불과했습니다. 
40년 전 바로의 왕궁에서 가졌던 꿈과 기백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도망자에게는 목숨 하나 챙기는 것만도 버겁습니다. 
하루 종일 내 양도 아닌 장인의 양 무리를 이끌고 다니다가 해가 져서 집에 돌아오면 그뿐입니다. 

따라서 모세에게 있어서 그 ‘땅’은 자기 자신의 꿈을 앗아간 절망의 땅이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자포자기의 땅이며, 뭐 좀 해보려고 하지만 도대체 되는 게 없는 실패의 땅이며, 자기 자신의 젊음을 앗아간 슬픔의 땅입니다. 
한마디로 그 ‘땅’은 모세에게 있어서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 땅은 절망의 땅이 아니라 거룩한 땅이라고 모세의 시각을 교정시키셨습니다. 
‘네가 서 있는 땅은 절망의 땅이 아니라 거룩한 땅이다. 다시 봐라!’
‘네가 만난 상황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다시 봐라.’ 
‘네가 겪는 고통은 절망의 수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아야 할 훈련의 도장이다. 다시 봐라.’
‘상황을 다시 보라, 땅을 다른 눈으로 보라, 시각을 고쳐라! 그러면 그 땅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신’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은 지금까지 걸어온 갖가지 삶의 잔재들이 묻어있는 물건입니다. 
여러분! 구두 밑바닥을 한번 보십시오! 
씹다가 버린 껌도 붙어 있습니다. 
지푸라기도 붙어있습니다. 
압정도 박혀 있습니다. 
걷다가 돌에 부딪혔는지 깊숙한 상처도 있습니다. 

뒷굽은 쓰라린 연륜을 말해주듯이 많이 닳았습니다. 
‘신을 벗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과거를 벗으라는 것입니다! 
씁쓰레한 어제의 기억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한줌도 안 되는 자격지심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버릇처럼 습관적으로 형성된 부정적인 사고의 틀을 깨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시각을 고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여러분께 질문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직장은 저주의 땅입니까? 거룩한 땅입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은 저주의 땅입니까? 거룩한 땅입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의 가정은 저주의 땅입니까? 거룩한 땅입니까?
상황을 보는 눈을 고쳐야 됩니다! 
땅을 보는 눈을 고쳐야 됩니다. 

어떤 시각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서 축복을 받겠습니까? 
어떤 시각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서 성공하겠습니까? 
어떤 시각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서 행복하겠습니까?
자신의 삶의 자리를 거룩한 땅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겠지요?

어느 세일즈맨이 세일즈하기에 가장 어려운 지역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지역이야말로 내 실력을, 내 능력을 진짜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이다.’ 
어떤 사업가가 불경기를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때야말로 내 사업가의 기질을 발휘할 때이다. 경기가 좋을 때 사업하는 것은 누군들 못하겠는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교정된 사람의 고백입니다.

2. 모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내가 누구이기에’
이 말씀은 “나는 나 자신을 너무 잘 아는데 나는 너무 약합니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출 2:13의 말씀과 비교해보십시오.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여기서 모세는 재판관으로 나섭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평가합니다. 
자기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씀과 비교해보면,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고백은 정말 깊이 있는 자기 성찰입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만에 차 있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 ‘자기 자신이 약하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① 하나는, 자신감을 상실하여 좌절과 실망의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적인 앉은뱅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우리가 계속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하나님은 화를 내십니다.
출 4:14에 보면, 모세가 자기 자신은 약하고, 자기는 할 수 없다고 계속 거부하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로 이끈다면 자기 자신을 불신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영적인 앉은뱅이를 만들 뿐이다.”
(Self-distrust is good, but only if it leads to trust in God. Otherwise it ends spiritual paralysis!)

② 또 다른 가능성은, 자기 자신의 약함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것을 '믿음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해주십니다.
12절을 한번 봅시다. 
자기 자신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사람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고 어떤 증거를 보여주십니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자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 의롭게 살 때나 죄지을 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순간이 언제 있었습니까? 
홍해가 가로막혔을 때 길을 열었고, 굶주렸을 때 만나를 내려주셨고, 목말랐을 때 반석을 깨뜨려 물을 주셨고, 더위에 지쳤을 때 구름기둥으로, 추위로 떨 때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는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육신의 약함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의 한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능력의 한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고,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박두진의 ‘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새해 해돋이를 보기 위해 꼭 정동진에 가거나 천왕봉에 올라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해가 솟아야 할 곳은 바로 우리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2011년 12월 31일의 달력이 떨어지고, 2012년 1월 1일의 달력이 붙여진다고 새해가 된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새해를 맞이하려면 시각이 교정되어야 합니다.
어제의 부정적인 시각을 그대로 놔둔 채 새로운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망한 일입니다.

얍복 시냇가에 엎드려 번민의 밤을 지새우던 야곱을 아시지요?
칠흑같이 어둔 밤, 그는 미구에 닥쳐올지도 모를 위험을 예감하며 떨고 있었습니다.
복수를 맹세하는 형 에서의 땅에 들어서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날이 추운지 더운지, 배가 고픈지 부른지 몰랐습니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기억의 편린들 속에 간간히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발버둥 치며 살아왔던가? 
그 밤 야곱은 해체되었습니다.

무너지고 무너져 결국 ‘나’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절감할 때 마침내 그 마음의 ‘어두운 밤’은 물러갔습니다.
야곱이 스스로 무너진 자리에 이스라엘이 피어났습니다.
‘야곱’은 ‘붙잡는다.’라는 뜻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 없이 못 산다.’는 뜻입니다.
그때 브니엘의 아침 해가 솟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간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시각을 교정합시다. 
주님을 만남으로 시각을 교정합시다.
성령의 역사로 시각을 교정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각을 교정합시다.
상황을 보는 눈도, 내 자신을 보는 눈도 달라져야 합니다. 
왜 기쁨이 있는데 슬픔을 보고, 행복이 있는데 불행을 보고, 감격이 있는데 원망을 보고, 떨림이 있는데 타성을 봅니까? 
시각교정으로 날마다 새 삶을 시작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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